법원행정처 ‘재판개입’ 의혹 문건 받은 수석판사…“고민 끝에 파쇄”

입력 2019.09.19 (20:29) 수정 2019.11.0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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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조한창 전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한 내용을 일부 보강해, 11월 7일자로 수정됐음을 알립니다.

“존경하는 이 부장님! 어제 보낸 파일을 다시 보니, 추가로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파란색으로 표시하여 다시 보내 드립니다. 재수정 의견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이 사건 기사가 사실과 달리 허위라는 점을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설시하고 …(중략)… "비방할 목적", 즉 "훼손한 것"은 입증됐지만,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서 무죄라는 취지를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2015.11.18. 이메일 '카토 말미 재수정판 송부')

'재판 개입'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 그는 2015년 11월, 가토 타쓰야(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1심 재판장이던 이동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에게 이 같은 판결 구술본(법관이 선고기일에 읽을 판결문 요약본) '첨삭'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이메일은 3년여 뒤 재판 개입의 증거가 돼 돌아왔습니다.

검찰은 임 전 수석판사가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으로부터 이메일 내용과 같은 구체적인 '재판 개입' 요구를 받고, 이를 일선 재판장에게 그대로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수석판사는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성 요구를 재판부에 그대로 전달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임 전 수석판사는 후배 법관에게 사건에 대한 의견을 말한 것일 뿐, 재판 개입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⑩ 조언인가 재판 개입인가…수석판사실 불려간 ‘베테랑’ 재판장


■ '각하'가 싫었던 법원행정처

비슷한 시기, 임성근 판사처럼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 관련 요구를 받은 또 다른 수석부장판사가 있었습니다. 2015년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였던 조한창 판사(사법연수원 18기·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야기입니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관심을 가졌던 행정법원 사건은, 헌법재판소의 의원직 상실 결정에 반발한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이었습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결정과 함께, 통진당 소속 의원들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결정했습니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이 결정 이후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대법원보다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대응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통진당 의원들이 헌재 결정이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헌재의 결정이 옳았는지 법원이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이른바 '사법 심사'의 기회가 마련되는 셈이니 이를 활용하자는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의 성공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다수 언론이나 학자들은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이 법원에서 '각하'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각하(却下)란 해당 소송이 애초에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고, 법원이 재판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의원직 상실은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결론을 내린 문제였기 때문에, 법원 입장에서도 이 문제를 다시 판단하는 것은 권력분립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이유 등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소를 각하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우세했던 거죠. 기각이든 인용이든 결론을 내려서, 법원이 헌재 결정을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봤던 법원행정처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던 셈입니다.

결국, 법원행정처는 통진당 소송에 대한 '각하' 판결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하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작전의 목표물이 된 사람 중 한 명이 조한창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였습니다.


■ '동상이몽' 동기 법관과의 식사

2015년 5월 26일 화요일 낮 12시, 서울 강남역 근처의 한 일식집. 조 수석판사는 자신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일하던 이규진 양형실장과 같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라며 이 실장이 먼저 전화로 연락해 왔다고 합니다. 이 실장은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헌법재판소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규진 실장은 조 수석판사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넵니다. "통진당 소송과 관련해 우리(법원행정처)가 검토한 자료다"라는 말과 함께 그가 건넨 서류의 제목,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까 살펴본 '작전'대로였습니다. 통진당 의원들이 헌재의 의원직 상실 결정에 불복해 낸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을 '각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각하 이외의 가능한 결론들을 사례별로 정리한 문건이었습니다.

당일 자신의 일정표에 '조한창 점심, 12:00, 스시○(식당 이름), 문건 교부"라고 적으며 단단히 계획을 세웠던 이규진 실장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밥을 먹으러 나갔었다는 조 수석판사. 그는 이 서류 봉투 한 장 때문에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싹 바뀌고 말았다고 검찰 조사에서 회고했습니다.

"당시 이규진 부장님이 뚜렷하게 말을 안했는데, 저는 재판부(사건을 맡고 있던 행정13부)에 말을 좀 해줬으면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서류를 어떻게 재판부에 주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규진 부장도 서류 자체가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는 동의를 하지 않았던 것 같고, 문건에 있는 내용을 좀 파악해서 알고 계시고, 법리는 재판부에 좀 전달해주면 어떻겠냐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찰 진술조서 중)

11월 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조 수석판사는, 이 서류와 관련한 대화가 "10분 이상" 이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 "'기껏 수석 보내놨더니' 소리 들을까 걱정했다"

조 수석판사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검찰에서 "당시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라고 여러 차례 진술했습니다. 개인 차원의 부탁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차원의 요구라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행정처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차게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윗선의 뜻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법원행정처 차장일 수도, 처장일 수도, 대법원장일 수도 있는데 저는 단지 그 세 분 중 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술조서)

'윗선의 뜻'을 거스르면 불이익이 있을까 봐 걱정도 컸다고 합니다.

"행정처라고 하면서 문건을 주면서 그 내용을 전달하라고까지 했는데, 그걸 제가 무시해버린 사실이 나중에라도 밝혀지면 질책을 받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저는) 고등부장으로 승진했고 그것으로 됐단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질책받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은 거 아니겠습니까." (진술조서)

"저한테 전달하라고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저의 업무능력에 대해 (위에서) 부정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껏 수석을 보내놨더니 일을 이렇게밖에 처리 못 하겠냐'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승진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평판의 문제 때문에" 이규진 실장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성격이 뭐 두루두루 잘 이렇게 좋은 소리 잘 듣고 이런 성격이라서, 그런 취지에서... 이걸 만약 제대로 안하면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마음의 소리

이렇게 압박이 컸음에도 조 수석판사가 끝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법원행정처의 요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도 엄청난 부담을 느꼈습니다. 재판부에 의견 전달하는 건 재판에 개입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진술조서)

"통상적으로 제가 그런 걸(재판부에 특정 사건에 대한 문건 전달하는 일) 해본 적도 없고. 저도 재판을 거의 20~30년 가까이 하면서 받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선 생소한 경험이기 때문에 다소 좀 주저하는 거는 있었습니다." (법정 증언)

"문서의 취지 자체가 보시면 알겠지만 각하, 기각, 인용 이렇게 해서 주문과 이유, 근거들이 다 나열돼 있는 건데, 이거는 뭐 그 자체로 판결문이 작성되는 거라서 이걸 재판부에 주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법정 증언)

개인적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재판부의 독립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마음의 소리 역시 쉽게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파쇄기와 거짓말

이렇게 지난한 고민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무실로 돌아와 그 문건 내용을 읽어봤습니다. 제 책상 서랍에 받은 봉투째로 넣어 놓았습니다. (재판부에) 전달할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문건을 파쇄기에 넣어 파쇄해 버렸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법정에 나와, 이규진 실장을 만난 뒤 2주 후쯤 문건을 파쇄한 것 같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파쇄기 사건' 이후, 조 수석판사는 이규진 실장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법원행정처의 문건 내용을 자신이 재판부에 전달했다고 '피드백'을 준 겁니다.

조 수석판사는 곧 거짓말을 했다는 "심적 부담감"에 시달렸고, 결국 회식 자리를 빌어 법원행정처의 요구를 재판부에 일부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 실장을 만난 지 1달 정도 지난 뒤 열린 회식 자리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전달 안 하고 그냥 끝내버릴지, 아님 문건을 줘야할지 여러가지를 고민하는 과정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아님 전달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마침 (반정우 부장판사를 포함한 행정법원 부장판사 4~5명과) 회식이 있어서, '아 그럼 그때 얘기해야겠다'라고 한 겁니다." (법정 증언)

"제가 그 자리에서 (행정13부 재판장인) 반정우 부장에게 '각하에 대해 법리적으로 한번 검토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 각하에 대해서는 법리적으로 문제 있을 수 있으니 검토를 좀 더 해서 결론을 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습니다. … 반 부장도 술자리에서 편하게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전달했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당시 자신은 "각하"만 특정해 말한 건 아니라면서, "각하 등의 법리적 문제가 있으니 신중하게 판단해서 결정해라"는 취지로 반 부장판사에게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반 부장판사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라고도 했습니다.

행정처의 요구를 전달 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것도 아닌, 간접적인 화법을 써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 나름 애썼던 걸로 보입니다. 한창 판결문을 작성 중인 재판부에 구술본 '첨삭' 이메일까지 보냈던 임성근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의 행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재판부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 행정처의 최후

같은 해 11월, 통진당 의원들의 소송을 심리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는 결국 법원행정처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후 행정처는 해당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부 문건을 생산하기도 했는데요. 조 수석판사는 당시 판결에 대해 "행정처의 직접적 질책은 없었다"면서도 "이규진 실장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전달이 제대로 된 것이냐는 식으로 행정처에서 질책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라고 검찰 조사에서 회고했습니다. 작전 수행에 실패한 '요원'을 질책했다는 법원행정처는, 이제 대한민국 법원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로부터 가장 큰 질책을 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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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행정처 ‘재판개입’ 의혹 문건 받은 수석판사…“고민 끝에 파쇄”
    • 입력 2019-09-19 20:29:15
    • 수정2019-11-07 12:22:45
    취재K
※ 본 기사는 조한창 전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한 내용을 일부 보강해, 11월 7일자로 수정됐음을 알립니다.

“존경하는 이 부장님! 어제 보낸 파일을 다시 보니, 추가로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파란색으로 표시하여 다시 보내 드립니다. 재수정 의견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이 사건 기사가 사실과 달리 허위라는 점을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설시하고 …(중략)… "비방할 목적", 즉 "훼손한 것"은 입증됐지만,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서 무죄라는 취지를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2015.11.18. 이메일 '카토 말미 재수정판 송부')

'재판 개입'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 그는 2015년 11월, 가토 타쓰야(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1심 재판장이던 이동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에게 이 같은 판결 구술본(법관이 선고기일에 읽을 판결문 요약본) '첨삭'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이메일은 3년여 뒤 재판 개입의 증거가 돼 돌아왔습니다.

검찰은 임 전 수석판사가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으로부터 이메일 내용과 같은 구체적인 '재판 개입' 요구를 받고, 이를 일선 재판장에게 그대로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수석판사는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성 요구를 재판부에 그대로 전달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임 전 수석판사는 후배 법관에게 사건에 대한 의견을 말한 것일 뿐, 재판 개입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⑩ 조언인가 재판 개입인가…수석판사실 불려간 ‘베테랑’ 재판장


■ '각하'가 싫었던 법원행정처

비슷한 시기, 임성근 판사처럼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 관련 요구를 받은 또 다른 수석부장판사가 있었습니다. 2015년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였던 조한창 판사(사법연수원 18기·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야기입니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관심을 가졌던 행정법원 사건은, 헌법재판소의 의원직 상실 결정에 반발한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이었습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결정과 함께, 통진당 소속 의원들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결정했습니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이 결정 이후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대법원보다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대응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통진당 의원들이 헌재 결정이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헌재의 결정이 옳았는지 법원이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이른바 '사법 심사'의 기회가 마련되는 셈이니 이를 활용하자는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의 성공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다수 언론이나 학자들은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이 법원에서 '각하'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각하(却下)란 해당 소송이 애초에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고, 법원이 재판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의원직 상실은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결론을 내린 문제였기 때문에, 법원 입장에서도 이 문제를 다시 판단하는 것은 권력분립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이유 등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소를 각하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우세했던 거죠. 기각이든 인용이든 결론을 내려서, 법원이 헌재 결정을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봤던 법원행정처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던 셈입니다.

결국, 법원행정처는 통진당 소송에 대한 '각하' 판결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하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작전의 목표물이 된 사람 중 한 명이 조한창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였습니다.


■ '동상이몽' 동기 법관과의 식사

2015년 5월 26일 화요일 낮 12시, 서울 강남역 근처의 한 일식집. 조 수석판사는 자신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일하던 이규진 양형실장과 같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라며 이 실장이 먼저 전화로 연락해 왔다고 합니다. 이 실장은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헌법재판소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규진 실장은 조 수석판사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넵니다. "통진당 소송과 관련해 우리(법원행정처)가 검토한 자료다"라는 말과 함께 그가 건넨 서류의 제목,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까 살펴본 '작전'대로였습니다. 통진당 의원들이 헌재의 의원직 상실 결정에 불복해 낸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을 '각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각하 이외의 가능한 결론들을 사례별로 정리한 문건이었습니다.

당일 자신의 일정표에 '조한창 점심, 12:00, 스시○(식당 이름), 문건 교부"라고 적으며 단단히 계획을 세웠던 이규진 실장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밥을 먹으러 나갔었다는 조 수석판사. 그는 이 서류 봉투 한 장 때문에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싹 바뀌고 말았다고 검찰 조사에서 회고했습니다.

"당시 이규진 부장님이 뚜렷하게 말을 안했는데, 저는 재판부(사건을 맡고 있던 행정13부)에 말을 좀 해줬으면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서류를 어떻게 재판부에 주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규진 부장도 서류 자체가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는 동의를 하지 않았던 것 같고, 문건에 있는 내용을 좀 파악해서 알고 계시고, 법리는 재판부에 좀 전달해주면 어떻겠냐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검찰 진술조서 중)

11월 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조 수석판사는, 이 서류와 관련한 대화가 "10분 이상" 이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 "'기껏 수석 보내놨더니' 소리 들을까 걱정했다"

조 수석판사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검찰에서 "당시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라고 여러 차례 진술했습니다. 개인 차원의 부탁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차원의 요구라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행정처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차게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윗선의 뜻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법원행정처 차장일 수도, 처장일 수도, 대법원장일 수도 있는데 저는 단지 그 세 분 중 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술조서)

'윗선의 뜻'을 거스르면 불이익이 있을까 봐 걱정도 컸다고 합니다.

"행정처라고 하면서 문건을 주면서 그 내용을 전달하라고까지 했는데, 그걸 제가 무시해버린 사실이 나중에라도 밝혀지면 질책을 받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저는) 고등부장으로 승진했고 그것으로 됐단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질책받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은 거 아니겠습니까." (진술조서)

"저한테 전달하라고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저의 업무능력에 대해 (위에서) 부정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껏 수석을 보내놨더니 일을 이렇게밖에 처리 못 하겠냐'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승진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평판의 문제 때문에" 이규진 실장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성격이 뭐 두루두루 잘 이렇게 좋은 소리 잘 듣고 이런 성격이라서, 그런 취지에서... 이걸 만약 제대로 안하면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마음의 소리

이렇게 압박이 컸음에도 조 수석판사가 끝까지 고민했던 이유는, 법원행정처의 요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도 엄청난 부담을 느꼈습니다. 재판부에 의견 전달하는 건 재판에 개입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진술조서)

"통상적으로 제가 그런 걸(재판부에 특정 사건에 대한 문건 전달하는 일) 해본 적도 없고. 저도 재판을 거의 20~30년 가까이 하면서 받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선 생소한 경험이기 때문에 다소 좀 주저하는 거는 있었습니다." (법정 증언)

"문서의 취지 자체가 보시면 알겠지만 각하, 기각, 인용 이렇게 해서 주문과 이유, 근거들이 다 나열돼 있는 건데, 이거는 뭐 그 자체로 판결문이 작성되는 거라서 이걸 재판부에 주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법정 증언)

개인적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재판부의 독립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마음의 소리 역시 쉽게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파쇄기와 거짓말

이렇게 지난한 고민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무실로 돌아와 그 문건 내용을 읽어봤습니다. 제 책상 서랍에 받은 봉투째로 넣어 놓았습니다. (재판부에) 전달할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문건을 파쇄기에 넣어 파쇄해 버렸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법정에 나와, 이규진 실장을 만난 뒤 2주 후쯤 문건을 파쇄한 것 같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파쇄기 사건' 이후, 조 수석판사는 이규진 실장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법원행정처의 문건 내용을 자신이 재판부에 전달했다고 '피드백'을 준 겁니다.

조 수석판사는 곧 거짓말을 했다는 "심적 부담감"에 시달렸고, 결국 회식 자리를 빌어 법원행정처의 요구를 재판부에 일부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 실장을 만난 지 1달 정도 지난 뒤 열린 회식 자리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전달 안 하고 그냥 끝내버릴지, 아님 문건을 줘야할지 여러가지를 고민하는 과정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아님 전달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마침 (반정우 부장판사를 포함한 행정법원 부장판사 4~5명과) 회식이 있어서, '아 그럼 그때 얘기해야겠다'라고 한 겁니다." (법정 증언)

"제가 그 자리에서 (행정13부 재판장인) 반정우 부장에게 '각하에 대해 법리적으로 한번 검토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 각하에 대해서는 법리적으로 문제 있을 수 있으니 검토를 좀 더 해서 결론을 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습니다. … 반 부장도 술자리에서 편하게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전달했습니다." (진술조서)

조 수석판사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당시 자신은 "각하"만 특정해 말한 건 아니라면서, "각하 등의 법리적 문제가 있으니 신중하게 판단해서 결정해라"는 취지로 반 부장판사에게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반 부장판사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라고도 했습니다.

행정처의 요구를 전달 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것도 아닌, 간접적인 화법을 써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 나름 애썼던 걸로 보입니다. 한창 판결문을 작성 중인 재판부에 구술본 '첨삭' 이메일까지 보냈던 임성근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수석부장판사의 행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재판부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 행정처의 최후

같은 해 11월, 통진당 의원들의 소송을 심리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는 결국 법원행정처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후 행정처는 해당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부 문건을 생산하기도 했는데요. 조 수석판사는 당시 판결에 대해 "행정처의 직접적 질책은 없었다"면서도 "이규진 실장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전달이 제대로 된 것이냐는 식으로 행정처에서 질책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라고 검찰 조사에서 회고했습니다. 작전 수행에 실패한 '요원'을 질책했다는 법원행정처는, 이제 대한민국 법원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로부터 가장 큰 질책을 받는 신세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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