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자살’이라더니…수십 년 만에 억울함 풀린 병사들

입력 2019.09.2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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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1주년을 맞은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1년 동안 진상규명 신청을 받은 703건 중에 13건에 대해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군 당국이 조사했던 결과가 길게는 50년 만에 뒤집어진 것으로 13건 중 6건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34년 만에 진상 드러난 김 일병 사건

34년 전인 1985년 7월, 김 모 일병이 경계 근무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의 M16 소총으로 자해 사망했다는 게 군 당국의 조사 결과였습니다. 당시 군은 "힘든 부대 훈련과 부상에 따른 처지를 비관해 김 일병이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달랐습니다. 위원회는 "선임병에 의한 지속적인 구타, 구타로 인한 상처 감염, 구타한 선임병과 격리해야 한다는 군의관의 조언 무시"가 김 일병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김 일병이 처지 비관으로 자살한 게 아니라 지속적인 구타와 가혹행위에 목숨을 끊었다는 겁니다.

위원회 조사에서 군의관이 핵심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당시 김 일병의 부상을 치료한 군의관은 김 일병이 구타를 당해 정강이에 다친 사실과 함께 김 일병을 근무에 투입하지 말고 구타한 황 모 상병과 격리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해당 중대장은 이 같은 보고를 무시했습니다. 게다가 김 일병을 구타한 황 상병과 함께 야간 경계근무를 하도록 해 결국 김 일병은 경계근무 중에 자해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위원회는 설명했습니다. 위원회 관계자는 "중대장이 구타와 가혹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징계를 피하기 위해 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헌병도 구타나 가혹행위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습니다. 김 일병은 구타를 당해 정강이를 다쳤지만 헌병은 족구시합 중에 부상한 것으로 꾸며냈습니다. 당시 헌병 수사관도 이번 위원회 조사에서 당시 구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자백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꾸며낸 군 헌병

김 일병 사건과 같은 해인 1985년 6월, 김 모 병장은 GP에서 순찰 근무를 하다가 수류탄을 폭발시켜 자폭해 숨졌습니다. 당시 군 조사는 김 병장이 불우한 가정환경과 장기간 GP 근무로 인한 염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배경에도 간부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34년 만에 드러났습니다.

당시 헌병은 이 사건을 단순 자살로 결론내기 위해 '불우한 가정환경'을 꾸며냈습니다. 김 병장의 어머니가 김 병장 4살 때 사망했는데 그런 점을 알고 가정환경이 불우했다고 지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위원회가 조사했더니 김 병장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가정환경이 불우했다는 점은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드러나면 부대 전체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불우한 가정환경'을 꾸며냈다는 게 위원회 설명입니다.

50년 만에 '가해자' 누명 벗은 정 일병

50년 전인 1969년 8월 정 모 일병은 선임병 2명이 있는 경계초소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사망했습니다. 선임병 2명은 다쳤지만 정 일병은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당시 군 수사 결과는 정 일병이 폭발 사고를 유발한 가해자라고 단정했지만 위원회는 가해자로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냈습니다. 당시 군 당국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정 일병이 자발적으로 초소에 들러 자의적으로 수류탄을 조작해 사고가 났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정 일병은 숨진 뒤 50년 동안 억울하게 입어온 누명을 벗게 됐습니다.


'순직' 재심사 요청 … 대상자 3만 9천여 명

군 부대에서 사망했더라도 단순 자살했거나 가해 혐의가 있으면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의 김 일병, 김 병장, 정 일병은 그동안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사망했지만 '순직'으로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는 것은 유가족들에게는 그나마 억울함이 풀리는 길입니다. 이에 따라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 등 관계기관에 이들을 포함한 진상이 규명된 12명에 대해 순직으로 재심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 위원회는 6.25 전투에서 강제소집이 해제된 직후 사망한 '박 모 소위'에 대해서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전사(戰死)'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국방부 등 관계기관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위원회의 재심사 요청을 수용해야 합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한은 2년 뒤인 2021년 9월까지입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국군이 창설된 1948년 11월부터 발생한 군 복무 중 원인 불명확한 사망사고를 진상규명 대상으로 다룹니다. 순직이 인정된 4만여 명을 제외하면 비순직 사망자인 진상규명 대상자는 3만 9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위원회는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신청한 건이 703건이니까 전체 대상자의 2%도 되지 않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억울한 군 사망사고의 진상규명을 적극적으로 신청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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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순 자살’이라더니…수십 년 만에 억울함 풀린 병사들
    • 입력 2019-09-25 18:35:35
    취재K
출범 1주년을 맞은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1년 동안 진상규명 신청을 받은 703건 중에 13건에 대해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군 당국이 조사했던 결과가 길게는 50년 만에 뒤집어진 것으로 13건 중 6건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34년 만에 진상 드러난 김 일병 사건

34년 전인 1985년 7월, 김 모 일병이 경계 근무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의 M16 소총으로 자해 사망했다는 게 군 당국의 조사 결과였습니다. 당시 군은 "힘든 부대 훈련과 부상에 따른 처지를 비관해 김 일병이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달랐습니다. 위원회는 "선임병에 의한 지속적인 구타, 구타로 인한 상처 감염, 구타한 선임병과 격리해야 한다는 군의관의 조언 무시"가 김 일병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김 일병이 처지 비관으로 자살한 게 아니라 지속적인 구타와 가혹행위에 목숨을 끊었다는 겁니다.

위원회 조사에서 군의관이 핵심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당시 김 일병의 부상을 치료한 군의관은 김 일병이 구타를 당해 정강이에 다친 사실과 함께 김 일병을 근무에 투입하지 말고 구타한 황 모 상병과 격리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해당 중대장은 이 같은 보고를 무시했습니다. 게다가 김 일병을 구타한 황 상병과 함께 야간 경계근무를 하도록 해 결국 김 일병은 경계근무 중에 자해 사망하게 된 것이라고 위원회는 설명했습니다. 위원회 관계자는 "중대장이 구타와 가혹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징계를 피하기 위해 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헌병도 구타나 가혹행위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습니다. 김 일병은 구타를 당해 정강이를 다쳤지만 헌병은 족구시합 중에 부상한 것으로 꾸며냈습니다. 당시 헌병 수사관도 이번 위원회 조사에서 당시 구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자백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꾸며낸 군 헌병

김 일병 사건과 같은 해인 1985년 6월, 김 모 병장은 GP에서 순찰 근무를 하다가 수류탄을 폭발시켜 자폭해 숨졌습니다. 당시 군 조사는 김 병장이 불우한 가정환경과 장기간 GP 근무로 인한 염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배경에도 간부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34년 만에 드러났습니다.

당시 헌병은 이 사건을 단순 자살로 결론내기 위해 '불우한 가정환경'을 꾸며냈습니다. 김 병장의 어머니가 김 병장 4살 때 사망했는데 그런 점을 알고 가정환경이 불우했다고 지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위원회가 조사했더니 김 병장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가정환경이 불우했다는 점은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드러나면 부대 전체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불우한 가정환경'을 꾸며냈다는 게 위원회 설명입니다.

50년 만에 '가해자' 누명 벗은 정 일병

50년 전인 1969년 8월 정 모 일병은 선임병 2명이 있는 경계초소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사망했습니다. 선임병 2명은 다쳤지만 정 일병은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당시 군 수사 결과는 정 일병이 폭발 사고를 유발한 가해자라고 단정했지만 위원회는 가해자로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냈습니다. 당시 군 당국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정 일병이 자발적으로 초소에 들러 자의적으로 수류탄을 조작해 사고가 났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정 일병은 숨진 뒤 50년 동안 억울하게 입어온 누명을 벗게 됐습니다.


'순직' 재심사 요청 … 대상자 3만 9천여 명

군 부대에서 사망했더라도 단순 자살했거나 가해 혐의가 있으면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의 김 일병, 김 병장, 정 일병은 그동안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사망했지만 '순직'으로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는 것은 유가족들에게는 그나마 억울함이 풀리는 길입니다. 이에 따라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 등 관계기관에 이들을 포함한 진상이 규명된 12명에 대해 순직으로 재심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 위원회는 6.25 전투에서 강제소집이 해제된 직후 사망한 '박 모 소위'에 대해서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전사(戰死)'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국방부 등 관계기관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위원회의 재심사 요청을 수용해야 합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한은 2년 뒤인 2021년 9월까지입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국군이 창설된 1948년 11월부터 발생한 군 복무 중 원인 불명확한 사망사고를 진상규명 대상으로 다룹니다. 순직이 인정된 4만여 명을 제외하면 비순직 사망자인 진상규명 대상자는 3만 9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위원회는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신청한 건이 703건이니까 전체 대상자의 2%도 되지 않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억울한 군 사망사고의 진상규명을 적극적으로 신청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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