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생일날 떠난 ‘철인’ 남편…“억울한 죽음 꼭 밝혀주세요”

입력 2019.10.02 (09:18) 수정 2019.10.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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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서른다섯에 키 186cm. 대학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했고, 1년 365일 중 360일은 운동을 거르지 않을 만큼 건장했습니다. 근력 운동과 마라톤, 자전거 타기를 즐기다 올해 초 철인 3종 경기에 입문한 노○○ 씨. 지난달 29일, 노 씨는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철인 3종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낮 12시면 끝날 거야. 돌아오면 맛있는 거 먹자." 다정한 약속을 남기고 집을 나섰던 노 씨는 어제(1일) 새벽 6시 45분, 서울 마포구 상암 선착장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수영 중 세찬 급류에 휩쓸려, 경찰과 소방서가 수색을 벌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연관기사] 철인 3종경기 중 한강에서 실종된 30대…“현장 생지옥”)

거센 물살에 수영 중단…"당시 현장은 아비규환"

그날, 한강의 물살은 베테랑 철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거셌습니다. 한 달 중 밀물이 가장 많이 차오르는 '사리'와 만조 때가 겹친 상황. 심상치 않은 유속에 주최 측도 20분가량 시합을 미뤘지만 대회는 강행됐습니다.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물살을 이기지 못한 참가자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살려 달라고 10번은 외쳐서 겨우 보트 탔었네요.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저도 그 아비규환 현장에 있었어요. 아무리 팔을 저어봐도 계속 그 위치고…." 대회 뒤 인터넷에서 올라온 후기에서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현장이 '생지옥'과 같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출전이라는 '철인' A 씨 역시 그런 물살은 처음 겪었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하지만 주최 측이 경기를 앞두고 급히 경로를 바꾼 게 더 큰 화를 불렀다는 게 A 씨의 생각입니다.

"코스를 아주 잘못 생각한 거죠. 물살이 (반대로) 오고 있는데 교각을 지나서 오게끔 코스를 만들어 놓았으니…. 사람들이 다 거기를 못 벗어난 거예요."

원래 공지한 수영 경로는 한강을 남북(↕) 방향으로 횡단하는 것. 하지만 대회 당일 참가자들은 동서(↔) 방향으로 최대 1.5km 구간을 왕복해야 했습니다. 반환점을 돌아 거센 물살을 마주친 참가자들은 제 속도를 못 내 뒤엉키기 시작했고, 결국 주최 측은 보트를 띄워 사람들을 구조하고 시합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중단된 건 수영 시합뿐이었고, 마라톤과 사이클 등 나머지 두 종목은 그대로 경기가 이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뭍에 올라온 참가자들도 앞다퉈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참가 번호 158번, 노 씨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아들 살릴 수 있었다, 인원 확인만 했어도…"

"하다못해 수련회를 가도 우리가 출발했을 때와 도착했을 때 각각 사람 수를 세잖아요. 그런데 살려달라는 사람들을 긴급 구조까지 해놓고 몇 명이 나왔는지 확인을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어제 오후, 아직 영정 사진조차 도착하지 않은 빈소에서 다시 만난 노 씨의 가족들은 그 점이 가장 많이 화가 난다고 호소했습니다. 사고 직후 구조 인원만 확인했어도 노 씨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실제로 노 씨의 시신은 출발 지점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주최 측에서 "맨눈으로 쓱 둘러보고" 구조 작업을 종료하지 않았더라면, 물에 들어간 사람과 나온 사람 수를 세어 봤더라면, 그래서 아직 실종자가 있다는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내 아들은, 내 남편은 아직 살아 있었을 거라고 가족들은 말합니다.

또 다른 '철인' 참가자 B 씨는 대회가 처음부터 취소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 전 유속 등을 확인하는 '워밍업'을 통해 경기를 미루거나 취소하자는 판단을 주최 측이 내려 줬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부 참가자들이 자원해서 시합 전 경로를 절반가량 헤엄쳐 보는 '워밍업'이라는 절차가 있어요. 경기 전에 으레 하는데, 그날은 빠트렸더라고요. 자전거 경주나 마라톤도 아니고, 수영은 안전이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출전 경험이 풍부한 B 씨는 이 대회가 '원래부터 유속 때문에 말이 많던 대회'라고 귀띔했습니다.


협회 "경찰 조사 성실히 응하겠다"…가족들 "철저한 수사로 처벌 이뤄지길"

해당 대회를 주최한 곳은 대한철인3종협회입니다. 국내 철인 3종 경기 대부분을 이 협회가 주최합니다. 취재하면서 가장 의아했던 건, 이렇게 크고 공신력 있는 협회가 이토록 허술하게 대회를 운영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복수의 대회 참가자들은 당일 대회 진행이 미숙했고, 안전 요원도 참가인원보다 턱없이 모자랐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수색 현장에서 만난 협회 관계자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여러 차례 한강에서 대회를 연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절차를 전문가들의 안전 판단 아래 진행했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또 대회 전날과 당일 두 차례에 걸쳐 '워밍업'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각종 의혹에 대한 질문에는 '경찰 조사에서 성실히 답변하겠다'며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화난 가족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말해 보라'며 불러세웠을 때도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협회 관계자. 하지만 가족들은 그 조사가 애초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사고 당일 협회 측 사람들이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들은 데다, 협회 회장이 대기업 부사장인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유가족'이 된다는 건, 하루아침에 '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가족들은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나 수색 작업에 차질이 생길까 봐, 시신을 찾기 전에는 최대한 협회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협회 측 대처에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경찰이 꼭 철저히 수사해서, 다시는 이러한 인명 사고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달엔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고, 내년에는 부모가 되자고 약속했던 남편. 그 꿈을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된 지금, 노 씨의 아내에게 남은 바람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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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2 09:18:08
    • 수정2019-10-02 09: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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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서른다섯에 키 186cm. 대학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했고, 1년 365일 중 360일은 운동을 거르지 않을 만큼 건장했습니다. 근력 운동과 마라톤, 자전거 타기를 즐기다 올해 초 철인 3종 경기에 입문한 노○○ 씨. 지난달 29일, 노 씨는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철인 3종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낮 12시면 끝날 거야. 돌아오면 맛있는 거 먹자." 다정한 약속을 남기고 집을 나섰던 노 씨는 어제(1일) 새벽 6시 45분, 서울 마포구 상암 선착장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수영 중 세찬 급류에 휩쓸려, 경찰과 소방서가 수색을 벌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연관기사] 철인 3종경기 중 한강에서 실종된 30대…“현장 생지옥”)

거센 물살에 수영 중단…"당시 현장은 아비규환"

그날, 한강의 물살은 베테랑 철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거셌습니다. 한 달 중 밀물이 가장 많이 차오르는 '사리'와 만조 때가 겹친 상황. 심상치 않은 유속에 주최 측도 20분가량 시합을 미뤘지만 대회는 강행됐습니다.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물살을 이기지 못한 참가자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살려 달라고 10번은 외쳐서 겨우 보트 탔었네요.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저도 그 아비규환 현장에 있었어요. 아무리 팔을 저어봐도 계속 그 위치고…." 대회 뒤 인터넷에서 올라온 후기에서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현장이 '생지옥'과 같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출전이라는 '철인' A 씨 역시 그런 물살은 처음 겪었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하지만 주최 측이 경기를 앞두고 급히 경로를 바꾼 게 더 큰 화를 불렀다는 게 A 씨의 생각입니다.

"코스를 아주 잘못 생각한 거죠. 물살이 (반대로) 오고 있는데 교각을 지나서 오게끔 코스를 만들어 놓았으니…. 사람들이 다 거기를 못 벗어난 거예요."

원래 공지한 수영 경로는 한강을 남북(↕) 방향으로 횡단하는 것. 하지만 대회 당일 참가자들은 동서(↔) 방향으로 최대 1.5km 구간을 왕복해야 했습니다. 반환점을 돌아 거센 물살을 마주친 참가자들은 제 속도를 못 내 뒤엉키기 시작했고, 결국 주최 측은 보트를 띄워 사람들을 구조하고 시합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중단된 건 수영 시합뿐이었고, 마라톤과 사이클 등 나머지 두 종목은 그대로 경기가 이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뭍에 올라온 참가자들도 앞다퉈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참가 번호 158번, 노 씨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아들 살릴 수 있었다, 인원 확인만 했어도…"

"하다못해 수련회를 가도 우리가 출발했을 때와 도착했을 때 각각 사람 수를 세잖아요. 그런데 살려달라는 사람들을 긴급 구조까지 해놓고 몇 명이 나왔는지 확인을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어제 오후, 아직 영정 사진조차 도착하지 않은 빈소에서 다시 만난 노 씨의 가족들은 그 점이 가장 많이 화가 난다고 호소했습니다. 사고 직후 구조 인원만 확인했어도 노 씨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실제로 노 씨의 시신은 출발 지점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주최 측에서 "맨눈으로 쓱 둘러보고" 구조 작업을 종료하지 않았더라면, 물에 들어간 사람과 나온 사람 수를 세어 봤더라면, 그래서 아직 실종자가 있다는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내 아들은, 내 남편은 아직 살아 있었을 거라고 가족들은 말합니다.

또 다른 '철인' 참가자 B 씨는 대회가 처음부터 취소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 전 유속 등을 확인하는 '워밍업'을 통해 경기를 미루거나 취소하자는 판단을 주최 측이 내려 줬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부 참가자들이 자원해서 시합 전 경로를 절반가량 헤엄쳐 보는 '워밍업'이라는 절차가 있어요. 경기 전에 으레 하는데, 그날은 빠트렸더라고요. 자전거 경주나 마라톤도 아니고, 수영은 안전이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출전 경험이 풍부한 B 씨는 이 대회가 '원래부터 유속 때문에 말이 많던 대회'라고 귀띔했습니다.


협회 "경찰 조사 성실히 응하겠다"…가족들 "철저한 수사로 처벌 이뤄지길"

해당 대회를 주최한 곳은 대한철인3종협회입니다. 국내 철인 3종 경기 대부분을 이 협회가 주최합니다. 취재하면서 가장 의아했던 건, 이렇게 크고 공신력 있는 협회가 이토록 허술하게 대회를 운영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복수의 대회 참가자들은 당일 대회 진행이 미숙했고, 안전 요원도 참가인원보다 턱없이 모자랐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수색 현장에서 만난 협회 관계자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여러 차례 한강에서 대회를 연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절차를 전문가들의 안전 판단 아래 진행했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또 대회 전날과 당일 두 차례에 걸쳐 '워밍업'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각종 의혹에 대한 질문에는 '경찰 조사에서 성실히 답변하겠다'며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화난 가족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말해 보라'며 불러세웠을 때도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협회 관계자. 하지만 가족들은 그 조사가 애초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사고 당일 협회 측 사람들이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들은 데다, 협회 회장이 대기업 부사장인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유가족'이 된다는 건, 하루아침에 '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가족들은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나 수색 작업에 차질이 생길까 봐, 시신을 찾기 전에는 최대한 협회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협회 측 대처에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경찰이 꼭 철저히 수사해서, 다시는 이러한 인명 사고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달엔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고, 내년에는 부모가 되자고 약속했던 남편. 그 꿈을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된 지금, 노 씨의 아내에게 남은 바람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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