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원산지 둔갑’이 ‘기업 경쟁력’?

입력 2019.10.08 (16:58) 수정 2019.10.0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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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쯤, KBS는 '한국전력에 전봇대 부품인 '애자'를 납품하는 A 업체가 값싼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 공급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애자는 전봇대에 설치하는 나선형 부품으로, 고장 나거나 깨지면 인근에 정전 피해를 줄 수 있어서 안정성이 중요한 제품입니다.

수상한 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방송에서도 소개해 드렸다시피 A 업체는 애자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3월, 애자 '완제품' 2만여 개를 중국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당시엔 A 업체와 한전간 애자 납품 계약이 체결돼 진행 중이었습니다.

[연관 기사] [현장K] '국산 아닌 중국산'…한전에 전봇대 부품 사기 납품

하지만 더 눈에 띈 건 A 업체가 한전과의 계약을 따내기까지 제시한 가격 추이였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이 업체는 3년 만에 단가를 6천 원가량이나 낮췄습니다. 그 결과, 업체는 애자 31만 개를 한 개당 만 7천 원에 팔겠다는 54억 원짜리 계약을 따냈고 2017년 9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한전에 애자를 공급했습니다.

중국산 애자를 수입한 시기와 계약 시기가 겹치니, 중국산을 한전에 납품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단가를 줄일 수 있었는지, 혹시 중국산 완제품을 납품한 건 아닌지 물었더니 A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가를 줄이는 건 사실 기업 경쟁력 아닙니까? 노동자 같은 경우에도 국내 인력을 쓰다가 외국인 노동자를 늘리는 등 복합적인 건데 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사실."

■ '해외에 판다더니' 수출 실적 '0'…문건 속 업체, 알고보니 前 대표 설립

A 업체는 지난해 KBS에 '중국에서 완제품을 수입한 건 맞지만 한전에 납품한 건 아니고, 국내 다른 업체나 해외로 수출한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서를 하나 제시했습니다. 지난해 9월 애자 4천여 개를 인도네시아에 수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밖에도 낙후된 국가에 값싼 중국산 애자를 재수출한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문서와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취재가 더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A 업체가 제시한 인도네시아 수출 문건. 지난해 9월, 한 인도네시아 업체에 LP 애자를 4천여 개 수출했다고 쓰여 있다.A 업체가 제시한 인도네시아 수출 문건. 지난해 9월, 한 인도네시아 업체에 LP 애자를 4천여 개 수출했다고 쓰여 있다.

최근 KBS는 국회의 협조를 얻어 이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A 업체가 수입한 중국산 애자는 공교롭게도 한전 납품 물량과 비슷한 31만여 개였습니다. 또 한전과 계약한 기간 동안 중국산 전신주 애자를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해외 어디로도 재수출한 실적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업체가 수입한 애자 31만 개는 어디로 갔을까요? 무려 31만 개나 되는 전봇대 부품을 국내 업체에 모두 팔거나 재고로 쌓아 놓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뿐만 아니라, A 업체가 KBS에 제시한 인도네시아 수출 문건 속 수출처는 현 대표의 아버지이자 전 대표가 설립한 인도네시아 법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관세청은 해당 문건이 허위 자료일 개연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지난해 "한전에 납품할래도 검수관들이 검사해서 (중국산을) 납품할 수 없다"며 문건을 보내준 A 업체 측은, 최근 다시 해당 문건의 진위 여부를 묻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 한전, 지난해엔 "이상 없다" 올해엔 "인지 못 했다"

앞서 A 업체가 애자 하나를 만 7천 원에 한전에 납품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A 업체가 중국에서 사 온 애자는 하나에 얼마일까요? 10달러에서 11달러입니다. 현재 환율로 최소 만 천원에서 만 3천원쯤 됩니다. 하나당 만 3천 원이라 쳐도, 한전은 애자 한 개당 최소 4천 원가량을 손해 입은 겁니다.

애자 31만 개를 4천 원을 더 주고 샀다고 친다면, 어림잡아 12억 4천만 원 정도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세관은 이를 국가 기관에 대한 사기 사건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전에 납품한 애자 모두가 중국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관은 중국산 애자가 적어도 일부, 실제로 한전에 납품됐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A 업체가 한전에 납품한 애자 실물. 세관은 중국산 애자가 실제로 한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A 업체가 한전에 납품한 애자 실물. 세관은 중국산 애자가 실제로 한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한전을 마냥 피해자로만 볼 수 있을까요?

지난해 11월, KBS는 A업체의 해명을 취재한 이후 한전에도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한전 측은 "자재처에서 물품을 검사하고, 검수 내역을 확인, A 업체에도 확인 요청한 결과 이상 사항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답변했습니다.

최근 한전의 답변은 "검찰 수사 전까지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전이 업체를 강제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난해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실 확인에 나섰더라면 어땠을까요?

이에 검찰은 최근 한전 관계자들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습니다.

수사로 확인해야 할 의혹은 또 있습니다.

A 업체의 전 대표는 한전의 자회사에서 11년 넘게 근무했고, 다른 직원도 같은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또 한국수력원자력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관계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력이 한전과 계약에서 유리하게 작용한 건 아닐지, 아니면 검수 과정에 영향을 끼친 건 아닐지, 이 또한 검찰이 확인해야 할 중요 지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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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원산지 둔갑’이 ‘기업 경쟁력’?
    • 입력 2019-10-08 16:58:44
    • 수정2019-10-08 16:59:44
    취재후
지난해 이맘때쯤, KBS는 '한국전력에 전봇대 부품인 '애자'를 납품하는 A 업체가 값싼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 공급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애자는 전봇대에 설치하는 나선형 부품으로, 고장 나거나 깨지면 인근에 정전 피해를 줄 수 있어서 안정성이 중요한 제품입니다.

수상한 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방송에서도 소개해 드렸다시피 A 업체는 애자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3월, 애자 '완제품' 2만여 개를 중국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당시엔 A 업체와 한전간 애자 납품 계약이 체결돼 진행 중이었습니다.

[연관 기사] [현장K] '국산 아닌 중국산'…한전에 전봇대 부품 사기 납품

하지만 더 눈에 띈 건 A 업체가 한전과의 계약을 따내기까지 제시한 가격 추이였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이 업체는 3년 만에 단가를 6천 원가량이나 낮췄습니다. 그 결과, 업체는 애자 31만 개를 한 개당 만 7천 원에 팔겠다는 54억 원짜리 계약을 따냈고 2017년 9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한전에 애자를 공급했습니다.

중국산 애자를 수입한 시기와 계약 시기가 겹치니, 중국산을 한전에 납품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단가를 줄일 수 있었는지, 혹시 중국산 완제품을 납품한 건 아닌지 물었더니 A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가를 줄이는 건 사실 기업 경쟁력 아닙니까? 노동자 같은 경우에도 국내 인력을 쓰다가 외국인 노동자를 늘리는 등 복합적인 건데 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사실."

■ '해외에 판다더니' 수출 실적 '0'…문건 속 업체, 알고보니 前 대표 설립

A 업체는 지난해 KBS에 '중국에서 완제품을 수입한 건 맞지만 한전에 납품한 건 아니고, 국내 다른 업체나 해외로 수출한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서를 하나 제시했습니다. 지난해 9월 애자 4천여 개를 인도네시아에 수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밖에도 낙후된 국가에 값싼 중국산 애자를 재수출한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문서와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취재가 더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A 업체가 제시한 인도네시아 수출 문건. 지난해 9월, 한 인도네시아 업체에 LP 애자를 4천여 개 수출했다고 쓰여 있다.
최근 KBS는 국회의 협조를 얻어 이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A 업체가 수입한 중국산 애자는 공교롭게도 한전 납품 물량과 비슷한 31만여 개였습니다. 또 한전과 계약한 기간 동안 중국산 전신주 애자를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해외 어디로도 재수출한 실적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업체가 수입한 애자 31만 개는 어디로 갔을까요? 무려 31만 개나 되는 전봇대 부품을 국내 업체에 모두 팔거나 재고로 쌓아 놓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뿐만 아니라, A 업체가 KBS에 제시한 인도네시아 수출 문건 속 수출처는 현 대표의 아버지이자 전 대표가 설립한 인도네시아 법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관세청은 해당 문건이 허위 자료일 개연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지난해 "한전에 납품할래도 검수관들이 검사해서 (중국산을) 납품할 수 없다"며 문건을 보내준 A 업체 측은, 최근 다시 해당 문건의 진위 여부를 묻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 한전, 지난해엔 "이상 없다" 올해엔 "인지 못 했다"

앞서 A 업체가 애자 하나를 만 7천 원에 한전에 납품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A 업체가 중국에서 사 온 애자는 하나에 얼마일까요? 10달러에서 11달러입니다. 현재 환율로 최소 만 천원에서 만 3천원쯤 됩니다. 하나당 만 3천 원이라 쳐도, 한전은 애자 한 개당 최소 4천 원가량을 손해 입은 겁니다.

애자 31만 개를 4천 원을 더 주고 샀다고 친다면, 어림잡아 12억 4천만 원 정도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세관은 이를 국가 기관에 대한 사기 사건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전에 납품한 애자 모두가 중국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관은 중국산 애자가 적어도 일부, 실제로 한전에 납품됐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A 업체가 한전에 납품한 애자 실물. 세관은 중국산 애자가 실제로 한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한전을 마냥 피해자로만 볼 수 있을까요?

지난해 11월, KBS는 A업체의 해명을 취재한 이후 한전에도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한전 측은 "자재처에서 물품을 검사하고, 검수 내역을 확인, A 업체에도 확인 요청한 결과 이상 사항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답변했습니다.

최근 한전의 답변은 "검찰 수사 전까지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전이 업체를 강제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난해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실 확인에 나섰더라면 어땠을까요?

이에 검찰은 최근 한전 관계자들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습니다.

수사로 확인해야 할 의혹은 또 있습니다.

A 업체의 전 대표는 한전의 자회사에서 11년 넘게 근무했고, 다른 직원도 같은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또 한국수력원자력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관계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력이 한전과 계약에서 유리하게 작용한 건 아닐지, 아니면 검수 과정에 영향을 끼친 건 아닐지, 이 또한 검찰이 확인해야 할 중요 지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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