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한글 실종사건…국어사전 하나 사드릴까요?

입력 2019.10.0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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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자주 찾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는 유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모든 상점의 간판이 한글로 표시된 '한글 간판 거리'입니다. 아리랑처럼 순 한글 간판도 보이고 머시 00인가 등 정겨운 사투리를 간판 이름으로 사용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영어로 된 스0벅스, 올리0영 등도 한글로 적혀있어 독특함을 더합니다. 케냐에서 한국을 방문한 33살 히람(Hiram Mashaa)씨는 "인사동에서 한글 간판을 볼 때 저는 한글이 예술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면서 "한글은 그림처럼 그리는 것 같아서 보는 게 즐겁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한국인의 눈에도 한글 간판 거리가 감탄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가게 간판이 외국어로 적혀있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길거리 간판 전체가 한글인 거리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글 간판이 점차 시민의 호응을 얻자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이나 서울 이태원, 서울 종로구 서촌 등에서도 한글 간판으로 시민의 눈길을 끄는 경우가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한글이 딱딱하고 고루하다는 생각은 옛말이 됐고, 한글은 외국어보다 더 멋지고 근사하게 시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민간 영역에서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공공 영역은 어떠한지 확인해봤습니다. 국어기본법 제4조에는 국가와 지방단체는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적혀있고, 제14조에서는 공문서를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공공 영역에서 한글 사용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서울특별시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

먼저 한국의 수도 서울시의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서울시에서 지난 8월부터 어제(8일)저녁까지 올린 '이달의 행사 및 축제' 홍보물 가운데 외국어가 안 들어간 홍보문은 단 한 건이었습니다. 버스나 로봇, 인터넷 등 한글로 대체하기 어려운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를 기준으로 말입니다. 외국어가 사용된 곳도 한글로 대체할 수가 있는데 굳이 외국어를 홍보문에 사용한 것입니다. 심지어 외국어를 지나치게 오남용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라인드로잉 작품'이나 '그린팝업카페', '로컬랩사업', '색터워킹그룹' 등 왜 외국어를 사용했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가 다수 있었습니다.

한글날 관련 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는 서울시 관계자에게 서울시 외국어 오남용이 큰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매년 정기적으로 국어 사용 실태 조사를 한다"며 "2014년부터 국어 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강제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권고할 수 있는 권한밖에 없어서 각 실무 부서의 문화를 바꾸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어 관련 업무를 하는 일은 한 명뿐"이라면서 "각 실국 별로 외국어 오남용 사례를 공개해서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광역 지자체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광역 지자체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

자치단체들의 인터넷 얼굴인 홈페이지는 어떨까도 확인해봤습니다. 17개 광역 자치단체 모두 차이만 있을 뿐 외국어 오남용이 심각했습니다. 채용을 뜻하는 리크루트(Recruit)나 선거 공약을 의미하는 매니페스토(Manifesto), 역동적이란 다이내믹(Dynamic)은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2019 서울사진 축제의 제목은 '오픈 유어 스토리지'입니다. 그리고 전라남도는 '미래형 운송기기 산업 중심'을 '전남 Blue 트랜스포트'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한글로 표현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단어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대전시의 경우 지역 예술가 축제를 '아티언스 대전'이라고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아티언스를 찾아도 당연히 안 나옵니다. 아티언스는 'Art'와 'Science'를 합한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국어기본법을 따라 국어를 발전하고 보전해야 할 지자체에서 외국어 오남용에 앞장서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공공기관 언어 주요 지적 사항국립국어원의 공공기관 언어 주요 지적 사항

국립국어원 이대성 연구관은 "공공기관이 잘못된 우리 말을 사용할 경우 '공공언어 통합 지원'으로 국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며 "기관마다 국어책임관을 임명하도록 해놓고 대내외적 공문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으나 전문 지식이 있는 공무원이 맡는 상황이 아니라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공공단체 외국어 오남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미약해 문제가 있는 부분에 개선 권고 공문을 보내는 수준"이라며 "올해까지 39건의 개선 권고 공문을 보냈고 앞으로도 공공기관의 올바른 국어 사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오늘(9일)은 573돌 한글날입니다. 세계적 과학 전문지인 디스커버리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또 지난 2009년에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 표기 방안으로 채택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현재는 한류가 퍼지면서 한글을 배우기 위한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는 등 한글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한글이 소외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외래어를 국어로 편입시켜 국어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외국어를 사용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까지 외국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년 한글날에는 공공영역에서 불필요한 외국어를 줄이고 있다는 기사를 쓰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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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자체 한글 실종사건…국어사전 하나 사드릴까요?
    • 입력 2019-10-09 07:02:54
    취재K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자주 찾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는 유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모든 상점의 간판이 한글로 표시된 '한글 간판 거리'입니다. 아리랑처럼 순 한글 간판도 보이고 머시 00인가 등 정겨운 사투리를 간판 이름으로 사용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영어로 된 스0벅스, 올리0영 등도 한글로 적혀있어 독특함을 더합니다. 케냐에서 한국을 방문한 33살 히람(Hiram Mashaa)씨는 "인사동에서 한글 간판을 볼 때 저는 한글이 예술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면서 "한글은 그림처럼 그리는 것 같아서 보는 게 즐겁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한국인의 눈에도 한글 간판 거리가 감탄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가게 간판이 외국어로 적혀있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길거리 간판 전체가 한글인 거리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글 간판이 점차 시민의 호응을 얻자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이나 서울 이태원, 서울 종로구 서촌 등에서도 한글 간판으로 시민의 눈길을 끄는 경우가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한글이 딱딱하고 고루하다는 생각은 옛말이 됐고, 한글은 외국어보다 더 멋지고 근사하게 시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민간 영역에서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공공 영역은 어떠한지 확인해봤습니다. 국어기본법 제4조에는 국가와 지방단체는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적혀있고, 제14조에서는 공문서를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공공 영역에서 한글 사용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
먼저 한국의 수도 서울시의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서울시에서 지난 8월부터 어제(8일)저녁까지 올린 '이달의 행사 및 축제' 홍보물 가운데 외국어가 안 들어간 홍보문은 단 한 건이었습니다. 버스나 로봇, 인터넷 등 한글로 대체하기 어려운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를 기준으로 말입니다. 외국어가 사용된 곳도 한글로 대체할 수가 있는데 굳이 외국어를 홍보문에 사용한 것입니다. 심지어 외국어를 지나치게 오남용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라인드로잉 작품'이나 '그린팝업카페', '로컬랩사업', '색터워킹그룹' 등 왜 외국어를 사용했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가 다수 있었습니다.

한글날 관련 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는 서울시 관계자에게 서울시 외국어 오남용이 큰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매년 정기적으로 국어 사용 실태 조사를 한다"며 "2014년부터 국어 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강제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권고할 수 있는 권한밖에 없어서 각 실무 부서의 문화를 바꾸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어 관련 업무를 하는 일은 한 명뿐"이라면서 "각 실국 별로 외국어 오남용 사례를 공개해서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광역 지자체 홈페이지 외국어 오남용 사례
자치단체들의 인터넷 얼굴인 홈페이지는 어떨까도 확인해봤습니다. 17개 광역 자치단체 모두 차이만 있을 뿐 외국어 오남용이 심각했습니다. 채용을 뜻하는 리크루트(Recruit)나 선거 공약을 의미하는 매니페스토(Manifesto), 역동적이란 다이내믹(Dynamic)은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2019 서울사진 축제의 제목은 '오픈 유어 스토리지'입니다. 그리고 전라남도는 '미래형 운송기기 산업 중심'을 '전남 Blue 트랜스포트'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한글로 표현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단어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대전시의 경우 지역 예술가 축제를 '아티언스 대전'이라고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아티언스를 찾아도 당연히 안 나옵니다. 아티언스는 'Art'와 'Science'를 합한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국어기본법을 따라 국어를 발전하고 보전해야 할 지자체에서 외국어 오남용에 앞장서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공공기관 언어 주요 지적 사항
국립국어원 이대성 연구관은 "공공기관이 잘못된 우리 말을 사용할 경우 '공공언어 통합 지원'으로 국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며 "기관마다 국어책임관을 임명하도록 해놓고 대내외적 공문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으나 전문 지식이 있는 공무원이 맡는 상황이 아니라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공공단체 외국어 오남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미약해 문제가 있는 부분에 개선 권고 공문을 보내는 수준"이라며 "올해까지 39건의 개선 권고 공문을 보냈고 앞으로도 공공기관의 올바른 국어 사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오늘(9일)은 573돌 한글날입니다. 세계적 과학 전문지인 디스커버리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또 지난 2009년에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 표기 방안으로 채택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현재는 한류가 퍼지면서 한글을 배우기 위한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는 등 한글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한글이 소외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외래어를 국어로 편입시켜 국어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외국어를 사용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까지 외국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년 한글날에는 공공영역에서 불필요한 외국어를 줄이고 있다는 기사를 쓰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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