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넘어 화합한 제주...4.3 해결 원동력

입력 2019.10.15 (20:44) 수정 2019.10.1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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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 과정을 들여다보고
여순사건 해결의 방향을 찾는
기획보도 두 번째 순섭니다.
오늘은 갈등을 딛고
공동체가 힘을 합해
4.3 진상규명을 이끌어 낸
제주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양창희 기잡니다.


[리포트]
물고기 '자리돔'을 닮았다는
제주도의 산간 마을 '자리왓'.

백50여 명이 살던 마을의 흔적은
이제 야트막한 돌담에만 남았습니다.

1948년 11월, 4.3 토벌대가
산간 주민들이 무장대를 돕고 있다며
마을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의 95%가 없어졌습니다.

<강규방/자리왓 주민, 당시 9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는데 갑자기 4.3이라고 해서,
피눈물났지요. 고생이 이만저만이야?"

중산간 지역을
이른바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고
주민들을 쫓아낸 소개령은
제주도의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쫓겨난 중산간 주민들은
해안 마을에서 '폭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섬 사람들 사이엔 미움이 싹텄습니다.

<홍춘호/4.3 유족>
"우리 구경을 막 와. 폭도 구경을 와요.
우리 폭도라고. 폭도 구경을 와서,
저건 폭동을 (일으킨) 그런 사람이라고 막 돌멩이도 던지고..."

너무도 깊은 상처에 4.3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세월이 수십 년.

변화의 물결이 인 건
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였습니다.

5.18이 국회에서 다뤄지는 걸 보고
제주도민들은 용기를 냈고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찬식/4.3 연구가>
"유족회와 지역 내의 시민사회단체가 서로 힘을 합해서
위령제를 94년에 열게 되는데,
이러한 화합의 분위기가 진실 규명의
당한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주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먼저 특별법을 발의하는 등
정치권도 정당을 넘어 힘을 합했습니다.

<추미애/국회의원, 1999년 4.3 특별법 대표발의>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그 사실을 육지에서만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육지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던
제주 도민들의 하나된 마음, 집요함.
그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고요."


2013년, 오랜 반목을 겪던
경우회와 유족회가 화해를 선언한 건
4.3 화합의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송승문/4.3 유족회장>
"묻지 말자. 과거를 물으면 화해가 안 되니까
이거는 다 덮어두고, 우리 현 시대에 맞게끔
화해하자는 측면에서..."

제주 공동체가 똘똘 뭉쳐
상처 치유와 해결에 나선 4.3.

여순사건은
여전히 지역별로 위령제를 따로 지내고
'반란'과 '항쟁' 사이의
극심한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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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등 넘어 화합한 제주...4.3 해결 원동력
    • 입력 2019-10-15 20:44:41
    • 수정2019-10-15 23:12:39
    뉴스9(순천)
[앵커멘트]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 과정을 들여다보고 여순사건 해결의 방향을 찾는 기획보도 두 번째 순섭니다. 오늘은 갈등을 딛고 공동체가 힘을 합해 4.3 진상규명을 이끌어 낸 제주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양창희 기잡니다. [리포트] 물고기 '자리돔'을 닮았다는 제주도의 산간 마을 '자리왓'. 백50여 명이 살던 마을의 흔적은 이제 야트막한 돌담에만 남았습니다. 1948년 11월, 4.3 토벌대가 산간 주민들이 무장대를 돕고 있다며 마을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의 95%가 없어졌습니다. <강규방/자리왓 주민, 당시 9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는데 갑자기 4.3이라고 해서, 피눈물났지요. 고생이 이만저만이야?" 중산간 지역을 이른바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고 주민들을 쫓아낸 소개령은 제주도의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쫓겨난 중산간 주민들은 해안 마을에서 '폭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섬 사람들 사이엔 미움이 싹텄습니다. <홍춘호/4.3 유족> "우리 구경을 막 와. 폭도 구경을 와요. 우리 폭도라고. 폭도 구경을 와서, 저건 폭동을 (일으킨) 그런 사람이라고 막 돌멩이도 던지고..." 너무도 깊은 상처에 4.3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세월이 수십 년. 변화의 물결이 인 건 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였습니다. 5.18이 국회에서 다뤄지는 걸 보고 제주도민들은 용기를 냈고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찬식/4.3 연구가> "유족회와 지역 내의 시민사회단체가 서로 힘을 합해서 위령제를 94년에 열게 되는데, 이러한 화합의 분위기가 진실 규명의 당한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주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먼저 특별법을 발의하는 등 정치권도 정당을 넘어 힘을 합했습니다. <추미애/국회의원, 1999년 4.3 특별법 대표발의>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그 사실을 육지에서만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육지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던 제주 도민들의 하나된 마음, 집요함. 그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고요." 2013년, 오랜 반목을 겪던 경우회와 유족회가 화해를 선언한 건 4.3 화합의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송승문/4.3 유족회장> "묻지 말자. 과거를 물으면 화해가 안 되니까 이거는 다 덮어두고, 우리 현 시대에 맞게끔 화해하자는 측면에서..." 제주 공동체가 똘똘 뭉쳐 상처 치유와 해결에 나선 4.3. 여순사건은 여전히 지역별로 위령제를 따로 지내고 '반란'과 '항쟁' 사이의 극심한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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