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누명]② “그런 일 없어요. 정말이에요” 용의자 가족의 절규

입력 2019.10.1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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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 모 씨는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30년 전 자백이 강요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이유에서다.

윤 씨의 주장으로 당시 경찰 수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윤 씨 주장은 좀 더 따져봐야 하지만, 30년 전 누명을 썼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용의자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9차 사건 용의자였던 윤 모 군(당시 19살)과 2·7차 사건 용의자였던 박 모 씨(당시 29살)도 억울한 용의자 가운데 하나다. 이들의 억울함을 당시 KBS 취재자료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살펴봤다.



박 씨, 화성 아닌 안양서 검거

경찰은 1991년 1월 4일 화성연쇄살인 2·7차 사건의 용의자로 박 모 씨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윤 모 군을 붙잡아 윤 군이 9차 사건을 자백했다고 발표한 뒤 윤 군이 범행을 부인해 경찰이 뒤숭숭할 시기였다.

박 씨를 잡은 건 화성경찰서가 아니라 안양경찰서였다. 박 씨는 1989년 10월 화성시에 있는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20대 여성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붙잡혔다.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박 씨를 고소하면서 3달 만에 뒤늦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2차 사건은 1986년 10월, 7차 사건은 1988년 9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짧게는 2년 4개월, 길게는 4년 3개월 만에 용의자를 잡은 셈이었다. 경찰은 강제추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법이 2·7차 사건과 유사하다고 판단해 추궁 끝에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고무된 경찰, 목사 앞에서 자백한 것 공개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던 2건을 동시에 해결하게 된 안양경찰서는 크게 고무됐다. 윤 군 수사가 논란에 휩싸인 상황이라 조심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자백이 나오자마자 박 씨를 언론에 공개한 걸 보면 신중함보다는 성과 공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경찰은 교회 목사가 있는 상황에서 박 씨에게 자백을 시켰다. 이는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4년 경력의 화성수사본부와의 공조수사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수사해 관련 자료를 배포하고 용의자를 공개했다'며 '기발한 착상으로 수사 성과를 과시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KBS 뉴스 영상에서 박 씨는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 위해서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안양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우리가 슬슬 물어봤는데 어떤 방식으로 죽였다고 다 (진술이) 나왔다"며 "제1 장소에서 제2 장소로 옮긴 장소까지도 박 씨가 먼저 얘길 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진술을 강요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 형사들의 끈질긴 노력과 팀의 단결력, 그런 게 오늘의 경찰의 명예를 과시하게 됐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그런 일 없다" 가족들 원통

박 씨와 경찰 관계자를 취재하기 위해 안양경찰서에 모인 취재진에게 박 씨 가족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가족들은 박 씨가 집에 늦게 들어온 적이 없다며, 박 씨가 범행을 했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분명히 누명 쓴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그런 일 전혀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라고 울먹이며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박 씨 역시 진술을 사흘 만에 뒤집었다. 박 씨가 외운 내용을 얘기하듯이 진술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변호인이 박 씨에게 진술 과정을 묻자 박 씨는 강압은 없었지만, 경찰의 위압적인 태도에 겁이 나서 범행을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계속 보여준 사건 사진첩을 통해 범행 장소 등을 본 걸 자백한 것이었다.

박 씨가 용의자라고 발표할 때만 해도 경찰은 혐의 입증을 자신했다. 당시 KBS 취재진이 "증거가 박 씨의 자백밖에 없어서 기소하기가 좀 어렵지 않겠느냐"고 묻자, 경찰 관계자는 단번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박 씨가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도주 경로 같은 걸 얘기해서 증거를 보강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박 씨가 범행을 부인하자 경찰은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화성 사건은 무혐의 처분하고 강제추행 혐의만 검찰에 넘겼다.


강압 따랐던 조급한 수사

윤 군과 박 씨의 수사 과정을 보면 당시 경찰은 화성과 그 주변 도시에서 성범죄 혐의로 붙잡은 용의자들은 무조건 화성 사건과의 연관성을 조사한 걸로 보인다.

유사 범죄 용의자를 조사하는 건 기본적인 수사 방법이고, 범인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연쇄살인이 계속 벌어졌기 때문에 경찰이 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현재 시점에서 당시 수사를 평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해서 유사 범죄 용의자를 화성 사건 용의자로 몰아가는 식의 강압 수사를 한 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탄탄한 증거를 확보한 뒤 용의자를 추궁해야 하는데, 용의자를 강하게 추궁해 우선 자백을 받고, 그 후 증거를 찾은 게 당시 경찰의 수사 방식이었다. 강한 추궁에는 강압이 따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30여 년 만에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경찰은 과거 선배들이 저질렀다고 잘못까지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점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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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9 07:02:56
    취재K
[편집자 주]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 모 씨는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30년 전 자백이 강요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이유에서다.

윤 씨의 주장으로 당시 경찰 수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윤 씨 주장은 좀 더 따져봐야 하지만, 30년 전 누명을 썼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용의자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9차 사건 용의자였던 윤 모 군(당시 19살)과 2·7차 사건 용의자였던 박 모 씨(당시 29살)도 억울한 용의자 가운데 하나다. 이들의 억울함을 당시 KBS 취재자료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살펴봤다.



박 씨, 화성 아닌 안양서 검거

경찰은 1991년 1월 4일 화성연쇄살인 2·7차 사건의 용의자로 박 모 씨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윤 모 군을 붙잡아 윤 군이 9차 사건을 자백했다고 발표한 뒤 윤 군이 범행을 부인해 경찰이 뒤숭숭할 시기였다.

박 씨를 잡은 건 화성경찰서가 아니라 안양경찰서였다. 박 씨는 1989년 10월 화성시에 있는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20대 여성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붙잡혔다.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박 씨를 고소하면서 3달 만에 뒤늦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2차 사건은 1986년 10월, 7차 사건은 1988년 9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짧게는 2년 4개월, 길게는 4년 3개월 만에 용의자를 잡은 셈이었다. 경찰은 강제추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법이 2·7차 사건과 유사하다고 판단해 추궁 끝에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고무된 경찰, 목사 앞에서 자백한 것 공개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던 2건을 동시에 해결하게 된 안양경찰서는 크게 고무됐다. 윤 군 수사가 논란에 휩싸인 상황이라 조심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자백이 나오자마자 박 씨를 언론에 공개한 걸 보면 신중함보다는 성과 공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경찰은 교회 목사가 있는 상황에서 박 씨에게 자백을 시켰다. 이는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4년 경력의 화성수사본부와의 공조수사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수사해 관련 자료를 배포하고 용의자를 공개했다'며 '기발한 착상으로 수사 성과를 과시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KBS 뉴스 영상에서 박 씨는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 위해서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안양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우리가 슬슬 물어봤는데 어떤 방식으로 죽였다고 다 (진술이) 나왔다"며 "제1 장소에서 제2 장소로 옮긴 장소까지도 박 씨가 먼저 얘길 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진술을 강요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 형사들의 끈질긴 노력과 팀의 단결력, 그런 게 오늘의 경찰의 명예를 과시하게 됐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그런 일 없다" 가족들 원통

박 씨와 경찰 관계자를 취재하기 위해 안양경찰서에 모인 취재진에게 박 씨 가족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가족들은 박 씨가 집에 늦게 들어온 적이 없다며, 박 씨가 범행을 했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분명히 누명 쓴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그런 일 전혀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라고 울먹이며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박 씨 역시 진술을 사흘 만에 뒤집었다. 박 씨가 외운 내용을 얘기하듯이 진술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변호인이 박 씨에게 진술 과정을 묻자 박 씨는 강압은 없었지만, 경찰의 위압적인 태도에 겁이 나서 범행을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계속 보여준 사건 사진첩을 통해 범행 장소 등을 본 걸 자백한 것이었다.

박 씨가 용의자라고 발표할 때만 해도 경찰은 혐의 입증을 자신했다. 당시 KBS 취재진이 "증거가 박 씨의 자백밖에 없어서 기소하기가 좀 어렵지 않겠느냐"고 묻자, 경찰 관계자는 단번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박 씨가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도주 경로 같은 걸 얘기해서 증거를 보강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박 씨가 범행을 부인하자 경찰은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화성 사건은 무혐의 처분하고 강제추행 혐의만 검찰에 넘겼다.


강압 따랐던 조급한 수사

윤 군과 박 씨의 수사 과정을 보면 당시 경찰은 화성과 그 주변 도시에서 성범죄 혐의로 붙잡은 용의자들은 무조건 화성 사건과의 연관성을 조사한 걸로 보인다.

유사 범죄 용의자를 조사하는 건 기본적인 수사 방법이고, 범인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연쇄살인이 계속 벌어졌기 때문에 경찰이 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현재 시점에서 당시 수사를 평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해서 유사 범죄 용의자를 화성 사건 용의자로 몰아가는 식의 강압 수사를 한 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탄탄한 증거를 확보한 뒤 용의자를 추궁해야 하는데, 용의자를 강하게 추궁해 우선 자백을 받고, 그 후 증거를 찾은 게 당시 경찰의 수사 방식이었다. 강한 추궁에는 강압이 따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30여 년 만에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경찰은 과거 선배들이 저질렀다고 잘못까지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점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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