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나루히토 즉위와 아베의 야망…‘레이와’의 운명은?

입력 2019.10.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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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 일왕 거처인 도쿄 고쿄(皇居)에서 제126대 나루히토(德仁ㆍ59) 일왕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1대 1로 마주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새로운 일왕에게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는 '내주'(內奏·임금에게 은밀히 아룀)를 처음 진행한 겁니다. 일왕들은 각료회의 결정 전에 현직 총리를 따로 불러 내주(內奏)와 하문(下問)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통치방식을 써 왔습니다. 물론 과거 일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궁내청이 5월 14일 공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나루히토 일왕 내주(內奏) 모습일본 궁내청이 5월 14일 공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나루히토 일왕 내주(內奏) 모습

이례적이었던 건 왕실 업무 담당부처인 궁내청이 두 사람의 만남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당일 언론에 배포한 일이었습니다. 궁내청이건, 총리관저이건 '내주'의 내용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그간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이는 일왕을 '정치적 권한이 없는 존재'로 규정한 '헌법 4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궁내청 관계자는 이후 국회에 나와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내각 발족 이전에는 (공개가) 전례 없던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왜 공개됐을까요? 다카미 가쓰토시(高見勝利·헌법학) 일본 조치대(上智大) 명예교수는 22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주'는 천황(일왕)에게 주권이 있었던 전전(戰前) 시대의 잔재"라면서 "천황이 국정에 실질적인 영향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했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코다 고이치(橫田耕一·헌법학) 규슈대(九州大) 명예교수 역시 "총리와 천황 모두에게 권위를 부여해 보수파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총리관저와 궁내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10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아베 총리가 10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아베, 새 일왕과 관계 개선 도모

나루히토에 대한 아베 총리의 유별난 구애는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월 22일, 아베 총리는 당시 왕세자이던 나루히토의 거처 '도구고쇼'(東宮御所·동궁거소)를 찾아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총리가 일왕도 아닌 왕세자를, 그것도 1대 1로 만나는 것 역시 종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이 주목한 건 만남 '그 자체'였습니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부친 아키히토 일왕(明仁) 때문이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유년기에 전쟁을 겪은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 중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표명한 바 있습니다. '과거 책임'을 강조하는 아키히토 일왕과 '미래 지향'이라는 명목 아래 반성을 거부하는 아베 총리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런 아베 총리 입장에선 전쟁을 겪지 않은 왕세자, 나루히토의 일왕 즉위는 왕실과의 관계를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습니다. 반가운 건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지만요.

아베 총리가 10월 18일, 일본 와카야마시에서 헌법 개정을 목표로 열린 실내 집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아베 총리가 10월 18일, 일본 와카야마시에서 헌법 개정을 목표로 열린 실내 집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레이와(令和·일본의 현재 연호) 시대에 일본은 어떤 나라로 나아갈 것인가. 이상을 논의할 자리가 (국회의) 헌법심사회입니다."

전후 최장 기간 재임 중인 아베 총리는 지난 4일 가을 정기국회 소신표명연설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앞서 7월 참의원 선거 때도, 9월 '내각 개조'(개각) 때도 반복했던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임 중 '전쟁 가능국'으로 가는 헌법 개정을 이뤄내는 걸 '레거시'(legacy·정치적 유산)로 남기려 합니다. 이를 위해 동원하는 단골 표현이 바로,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입니다. '헤이세이'(平成) 연호 발표 때와는 달리 4월 1일 기자회견까지 열어 '레이와'를 직접 공개한 사람도 아베, 그 자신이었습니다.

◇ "일왕제 정치 악용한 최악의 사례"

아베 총리는 '레이와', '새 일왕 즉위'라는 지형 변화를 틈타 개헌 논의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상황을 돌파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번 임시국회를 개헌 논의의 장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상황이죠. 다만 야당 측은 아직까진 아베 총리의 이런 프레임에 휘말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일본 공산당 위원장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천황(일왕)이 바뀌어 연호가 바뀐 것과 헌법 개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아베 총리의 주장은) 천황제를 정치에 이용한 최악의 사례"라고 비판했습니다. "(연호 발표를) 사유화하는 건 잘못이다"(사민당 당수)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나루히토 일왕은 22일 즉위를 알리는 의식(即位禮正殿の儀)에서 "헌법에 따라 일본국과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습니다. 30년 전, 즉위 의식을 한 아키히토 상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현행 헌법에 대한 수호 의지를 부각시킨데 대해선 다소 미온적 표현이라는 지적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루히토 일왕(왼쪽)과 마사코 왕비가 10월 22일, 즉위 예식에 참석한 모습(출처 : 마이니치신문 대표 촬영)나루히토 일왕(왼쪽)과 마사코 왕비가 10월 22일, 즉위 예식에 참석한 모습(출처 : 마이니치신문 대표 촬영)

◇ 나루히토, 아버지 역사관 이어받아

반면에 즉위한 새 일왕으로서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견해를 밝혔을 뿐, 그가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의 역사관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는 견해가 대세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전후 헌법을 기초로 삼아 쌓아 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2014년·54세 생일 기자회견), "자신은 전후 세대로서 전쟁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전쟁의 비참함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2015년·55세 생일 기자회견),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올해 8월 15일·일본 패전일)는 견해를 밝혀 왔습니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새 연호 '레이와'는 '혹독한 추위 뒤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알리며 피어나는 매화'를 뜻합니다. 나루히토 일왕이 한·일 관계를 한 겨울로 몰아넣은 아베 정부의 역사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역사로 기록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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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2 18:18:09
    특파원 리포트
지난 5월 14일, 일왕 거처인 도쿄 고쿄(皇居)에서 제126대 나루히토(德仁ㆍ59) 일왕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1대 1로 마주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새로운 일왕에게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는 '내주'(內奏·임금에게 은밀히 아룀)를 처음 진행한 겁니다. 일왕들은 각료회의 결정 전에 현직 총리를 따로 불러 내주(內奏)와 하문(下問)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통치방식을 써 왔습니다. 물론 과거 일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궁내청이 5월 14일 공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나루히토 일왕 내주(內奏) 모습
이례적이었던 건 왕실 업무 담당부처인 궁내청이 두 사람의 만남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당일 언론에 배포한 일이었습니다. 궁내청이건, 총리관저이건 '내주'의 내용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그간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이는 일왕을 '정치적 권한이 없는 존재'로 규정한 '헌법 4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궁내청 관계자는 이후 국회에 나와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내각 발족 이전에는 (공개가) 전례 없던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왜 공개됐을까요? 다카미 가쓰토시(高見勝利·헌법학) 일본 조치대(上智大) 명예교수는 22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주'는 천황(일왕)에게 주권이 있었던 전전(戰前) 시대의 잔재"라면서 "천황이 국정에 실질적인 영향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했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코다 고이치(橫田耕一·헌법학) 규슈대(九州大) 명예교수 역시 "총리와 천황 모두에게 권위를 부여해 보수파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총리관저와 궁내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10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아베, 새 일왕과 관계 개선 도모

나루히토에 대한 아베 총리의 유별난 구애는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월 22일, 아베 총리는 당시 왕세자이던 나루히토의 거처 '도구고쇼'(東宮御所·동궁거소)를 찾아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총리가 일왕도 아닌 왕세자를, 그것도 1대 1로 만나는 것 역시 종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이 주목한 건 만남 '그 자체'였습니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부친 아키히토 일왕(明仁) 때문이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유년기에 전쟁을 겪은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 중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표명한 바 있습니다. '과거 책임'을 강조하는 아키히토 일왕과 '미래 지향'이라는 명목 아래 반성을 거부하는 아베 총리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런 아베 총리 입장에선 전쟁을 겪지 않은 왕세자, 나루히토의 일왕 즉위는 왕실과의 관계를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습니다. 반가운 건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지만요.

아베 총리가 10월 18일, 일본 와카야마시에서 헌법 개정을 목표로 열린 실내 집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레이와(令和·일본의 현재 연호) 시대에 일본은 어떤 나라로 나아갈 것인가. 이상을 논의할 자리가 (국회의) 헌법심사회입니다."

전후 최장 기간 재임 중인 아베 총리는 지난 4일 가을 정기국회 소신표명연설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앞서 7월 참의원 선거 때도, 9월 '내각 개조'(개각) 때도 반복했던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임 중 '전쟁 가능국'으로 가는 헌법 개정을 이뤄내는 걸 '레거시'(legacy·정치적 유산)로 남기려 합니다. 이를 위해 동원하는 단골 표현이 바로,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입니다. '헤이세이'(平成) 연호 발표 때와는 달리 4월 1일 기자회견까지 열어 '레이와'를 직접 공개한 사람도 아베, 그 자신이었습니다.

◇ "일왕제 정치 악용한 최악의 사례"

아베 총리는 '레이와', '새 일왕 즉위'라는 지형 변화를 틈타 개헌 논의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상황을 돌파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번 임시국회를 개헌 논의의 장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상황이죠. 다만 야당 측은 아직까진 아베 총리의 이런 프레임에 휘말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일본 공산당 위원장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천황(일왕)이 바뀌어 연호가 바뀐 것과 헌법 개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아베 총리의 주장은) 천황제를 정치에 이용한 최악의 사례"라고 비판했습니다. "(연호 발표를) 사유화하는 건 잘못이다"(사민당 당수)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나루히토 일왕은 22일 즉위를 알리는 의식(即位禮正殿の儀)에서 "헌법에 따라 일본국과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습니다. 30년 전, 즉위 의식을 한 아키히토 상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현행 헌법에 대한 수호 의지를 부각시킨데 대해선 다소 미온적 표현이라는 지적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루히토 일왕(왼쪽)과 마사코 왕비가 10월 22일, 즉위 예식에 참석한 모습(출처 : 마이니치신문 대표 촬영)
◇ 나루히토, 아버지 역사관 이어받아

반면에 즉위한 새 일왕으로서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견해를 밝혔을 뿐, 그가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의 역사관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는 견해가 대세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전후 헌법을 기초로 삼아 쌓아 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2014년·54세 생일 기자회견), "자신은 전후 세대로서 전쟁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전쟁의 비참함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2015년·55세 생일 기자회견),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올해 8월 15일·일본 패전일)는 견해를 밝혀 왔습니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새 연호 '레이와'는 '혹독한 추위 뒤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알리며 피어나는 매화'를 뜻합니다. 나루히토 일왕이 한·일 관계를 한 겨울로 몰아넣은 아베 정부의 역사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역사로 기록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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