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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K] “딴 선박 자리라서 안 됩니다”…갑판까지 파도치는데도 입항 거부한 해양청
입력 2019.10.24 (10:25) 취재K
[취재K] “딴 선박 자리라서 안 됩니다”…갑판까지 파도치는데도 입항 거부한 해양청
대형 해상 크레인선을 끌고 운항하던 선박이 악천후를 만났습니다. 파도가 크레인선 갑판까지 몰아치고 기관장이 넘어지는 등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칫 2차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빈자리가 많던 인근 항구에 잠시 긴급피항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항구를 관리하는 지역 해양수산청의 답변은 단호했습니다. "원래 자리가 지정된 다른 선박들이 대야 할지도 몰라서,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인근 바다 위에 머물던 선박, 결국 몰아치는 파도를 견디지 못해 일단 항구에 진입했다가 오히려 '무허가 입항'으로 고발될 처지가 됐습니다.

■악천후 피항 지시에 크레인선 끌고 가던 예인선

부산의 한 해운사 소속 131톤급 예인선인 A호는 지난 17일 오후 8시쯤, 인양 능력 600톤에 무게가 2,350톤인 크레인선을 끌고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경북 울진 죽변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픽: 정세라▲그래픽: 정세라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작업하던 중, "기상 악화가 예상되니 피항하라"는 시공사 지시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죽변항은 A호의 피항지로 지정된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죽변항까지 이동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됐습니다. A호 선장 이 모 씨는 해운사의 지시에 따라 동해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연락해 항로 인근의 묵호항 묘박지(배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해안 지역)에 닻을 내리는 방안을 문의했습니다.

동해항 VTS는 "묵호항으로 가려면 동해지방해양수산청 소속 묵호해양수산사무소에 선박 입출항 사전신고와 선석 사용을 신청해야 한다"고 안내했습니다. 또 묵호항의 선박 입출항 실무를 맡은 대행업체에도 연락해 "A호의 묵호항 입항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게 해달라"고 협조 요청도 했습니다.

■해양청, 선석 있는데도 "다른 배 자리"라며 입항 거부

선장은 곧바로 묵호항 입항 허가권을 가진 묵호해양사무소에 전화했습니다. 당시 묵호항은 바지선 한 대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박이 없어서 선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묵호해양사무소는 처음부터 "허가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동해항 3단계 공사 선박들이 쓰도록 지정된 선석들이어서 안 된다"면서 "지정 피항지인 죽변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A호 항해사 임 모 씨는 "기상이 안 좋으니 잠시만 대게 해 달라"고 사정해 봤지만, '입항 불허' 입장은 변함없었습니다. A호는 결국,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엔진 시동을 끈 채 밤새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튿날인 18일이 됐고, 오전 8시쯤 동해항 VTS는 "오후에 날씨가 많이 안 좋아질 거다. 묵호해양사무소에 다시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동해중부 먼바다에 풍랑예비특보가 발령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A호 선장이 다시 묵호해양사무소에 전화했지만, 답변은 역시나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A호은 본선과 해상 크레인이 기상의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보고, 동해항 VTS의 지시에 따라 일단 좀 더 해안가로 이동해 머물렀습니다.

■갑판까지 몰아친 파도…해운사 "무조건 묵호항 들어가라"

우려가 현실이 되면서 기상은 빠르게 나빠졌습니다. 이날 오전 10시쯤부터 파도가 심해지더니 닻이 끌릴 정도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닻줄을 감은 윈치(권양기)가 과도한 장력을 받으면서 줄을 멈추는 체인 스토퍼가 튕겨 나가고 클러치까지 고장 났습니다. 크레인선 갑판까지 거센 파도로 바닷물이 밀어닥쳤습니다. 배가 흔들려 넘어진 기관장은 다리와 손을 다쳤습니다.


A호 선장과 항해사, 크레인선 선장 등 승선한 관계자 모두 "더 있다간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장 상황을 파악한 해운사 역시 "과태료나 처벌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무조건 묵호항에 입항하라"고 지시했습니다. A호는 결국, 묵호해양사무소의 강력한 '입항 불허' 통보에도 불구하고 이날 낮 12시쯤 묵호항으로 들어가 정박했습니다.


선장 이 씨는 "빈자리도 많은데 왜 무조건 입항허가를 거부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위험한 상황에 놓인 선박은 일단 입항시켜놓고, 나중에 먼저 선석을 받아놓은 선박이 오면 옆으로 비키게 해도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항해사 임 씨는 "혹시나 해서 동해항 공사 현장에 있는 선박들의 선장들에게 물어보니, 묵호항에 올 계획도 없었다"고 합니다.

해운사 관계자도 "심지어 빈 선석이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항구 안에 넣어주기만 해도 일단 위험은 피할 수 있는데, 무작정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한 조치 아니냐"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해양청의 입장은 변함없었습니다. A호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무단 입항'을 했다며, 해양경찰에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A호는 이후 선석을 비우라는 해양청의 명령에 따라 훨씬 남쪽에 있는 죽변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묵호항 북쪽 안인 해안으로 이동해 화력발전소 공사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해양청 "선석은 지정된 선박만 댈 수 있다"

취재진은 이번 일과 관련해, '다른 선박용 지정석이라도 잠깐 긴급피항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냐'고 묵호해양사무소에 물어봤습니다. 사무소 관계자의 답변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선석은 아무 배나 왔다고 댈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정된 선박만 댈 수 있다. 지정되지 않은 배는 12시간 전에 사전 신고해서 심의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악천후로 배가 위험한데도 절차부터 따라야 하느냐'고 물음에는 "당시 기상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만약 위험했다면 이미 신고가 접수돼서 해양경찰 등 관계기관들이 지원에 나서지 않았겠냐"고 했습니다. 또 "규정상 사전 신고 없이 긴급피항을 하려면 선박 고장이나 인명 문제, 해양오염과 이에 따른 확산 방지 등의 요건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동해항 VTS도 배가 위험하다고 봐서 묵호항 입항을 안내한 것 아닌지, 영상만 봐도 크레인선 갑판까지 물이 차는 등 당시 기상이 많이 안 좋았던 것 아닌지를 묻자, "영상은 못 봤다. 당시 상황의 위험성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A호가 입항하지 않아서 사고가 났을 수도 있지 않으냐'고 하자, "가정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사람 죽고 배가 뒤집혀야 긴급피항 됩니까?"

해양청의 이런 설명에, A호 측은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반응입니다. 항해사 임 씨는 "다른 선박 자리라고 해도 위험에 놓인 선박까지 입항허가를 해주지 않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동해항 VTS도 오후에 날씨가 많이 안 좋으니 빨리 묵호항으로 가라고 했겠느냐"면서 "우리나라 법은 사람이 죽고 배가 전복되고 해야 긴급 입항허가를 내주게 돼 있느냐"고 합니다.

A호의 해운사 사장은 "세월호 사태 이후 안전관리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현실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 선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선박이 겪는 일"이라면서 "제도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맞게 유연한 적용도 해 줬으면 한다"고 촉구합니다.
  • [취재K] “딴 선박 자리라서 안 됩니다”…갑판까지 파도치는데도 입항 거부한 해양청
    • 입력 2019.10.24 (10:25)
    취재K
[취재K] “딴 선박 자리라서 안 됩니다”…갑판까지 파도치는데도 입항 거부한 해양청
대형 해상 크레인선을 끌고 운항하던 선박이 악천후를 만났습니다. 파도가 크레인선 갑판까지 몰아치고 기관장이 넘어지는 등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칫 2차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빈자리가 많던 인근 항구에 잠시 긴급피항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항구를 관리하는 지역 해양수산청의 답변은 단호했습니다. "원래 자리가 지정된 다른 선박들이 대야 할지도 몰라서,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인근 바다 위에 머물던 선박, 결국 몰아치는 파도를 견디지 못해 일단 항구에 진입했다가 오히려 '무허가 입항'으로 고발될 처지가 됐습니다.

■악천후 피항 지시에 크레인선 끌고 가던 예인선

부산의 한 해운사 소속 131톤급 예인선인 A호는 지난 17일 오후 8시쯤, 인양 능력 600톤에 무게가 2,350톤인 크레인선을 끌고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경북 울진 죽변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픽: 정세라▲그래픽: 정세라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작업하던 중, "기상 악화가 예상되니 피항하라"는 시공사 지시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죽변항은 A호의 피항지로 지정된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죽변항까지 이동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됐습니다. A호 선장 이 모 씨는 해운사의 지시에 따라 동해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연락해 항로 인근의 묵호항 묘박지(배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해안 지역)에 닻을 내리는 방안을 문의했습니다.

동해항 VTS는 "묵호항으로 가려면 동해지방해양수산청 소속 묵호해양수산사무소에 선박 입출항 사전신고와 선석 사용을 신청해야 한다"고 안내했습니다. 또 묵호항의 선박 입출항 실무를 맡은 대행업체에도 연락해 "A호의 묵호항 입항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게 해달라"고 협조 요청도 했습니다.

■해양청, 선석 있는데도 "다른 배 자리"라며 입항 거부

선장은 곧바로 묵호항 입항 허가권을 가진 묵호해양사무소에 전화했습니다. 당시 묵호항은 바지선 한 대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박이 없어서 선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묵호해양사무소는 처음부터 "허가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동해항 3단계 공사 선박들이 쓰도록 지정된 선석들이어서 안 된다"면서 "지정 피항지인 죽변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A호 항해사 임 모 씨는 "기상이 안 좋으니 잠시만 대게 해 달라"고 사정해 봤지만, '입항 불허' 입장은 변함없었습니다. A호는 결국,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엔진 시동을 끈 채 밤새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튿날인 18일이 됐고, 오전 8시쯤 동해항 VTS는 "오후에 날씨가 많이 안 좋아질 거다. 묵호해양사무소에 다시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동해중부 먼바다에 풍랑예비특보가 발령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A호 선장이 다시 묵호해양사무소에 전화했지만, 답변은 역시나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A호은 본선과 해상 크레인이 기상의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보고, 동해항 VTS의 지시에 따라 일단 좀 더 해안가로 이동해 머물렀습니다.

■갑판까지 몰아친 파도…해운사 "무조건 묵호항 들어가라"

우려가 현실이 되면서 기상은 빠르게 나빠졌습니다. 이날 오전 10시쯤부터 파도가 심해지더니 닻이 끌릴 정도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닻줄을 감은 윈치(권양기)가 과도한 장력을 받으면서 줄을 멈추는 체인 스토퍼가 튕겨 나가고 클러치까지 고장 났습니다. 크레인선 갑판까지 거센 파도로 바닷물이 밀어닥쳤습니다. 배가 흔들려 넘어진 기관장은 다리와 손을 다쳤습니다.


A호 선장과 항해사, 크레인선 선장 등 승선한 관계자 모두 "더 있다간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장 상황을 파악한 해운사 역시 "과태료나 처벌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무조건 묵호항에 입항하라"고 지시했습니다. A호는 결국, 묵호해양사무소의 강력한 '입항 불허' 통보에도 불구하고 이날 낮 12시쯤 묵호항으로 들어가 정박했습니다.


선장 이 씨는 "빈자리도 많은데 왜 무조건 입항허가를 거부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위험한 상황에 놓인 선박은 일단 입항시켜놓고, 나중에 먼저 선석을 받아놓은 선박이 오면 옆으로 비키게 해도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항해사 임 씨는 "혹시나 해서 동해항 공사 현장에 있는 선박들의 선장들에게 물어보니, 묵호항에 올 계획도 없었다"고 합니다.

해운사 관계자도 "심지어 빈 선석이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항구 안에 넣어주기만 해도 일단 위험은 피할 수 있는데, 무작정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한 조치 아니냐"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해양청의 입장은 변함없었습니다. A호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무단 입항'을 했다며, 해양경찰에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A호는 이후 선석을 비우라는 해양청의 명령에 따라 훨씬 남쪽에 있는 죽변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묵호항 북쪽 안인 해안으로 이동해 화력발전소 공사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해양청 "선석은 지정된 선박만 댈 수 있다"

취재진은 이번 일과 관련해, '다른 선박용 지정석이라도 잠깐 긴급피항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냐'고 묵호해양사무소에 물어봤습니다. 사무소 관계자의 답변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선석은 아무 배나 왔다고 댈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정된 선박만 댈 수 있다. 지정되지 않은 배는 12시간 전에 사전 신고해서 심의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악천후로 배가 위험한데도 절차부터 따라야 하느냐'고 물음에는 "당시 기상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만약 위험했다면 이미 신고가 접수돼서 해양경찰 등 관계기관들이 지원에 나서지 않았겠냐"고 했습니다. 또 "규정상 사전 신고 없이 긴급피항을 하려면 선박 고장이나 인명 문제, 해양오염과 이에 따른 확산 방지 등의 요건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동해항 VTS도 배가 위험하다고 봐서 묵호항 입항을 안내한 것 아닌지, 영상만 봐도 크레인선 갑판까지 물이 차는 등 당시 기상이 많이 안 좋았던 것 아닌지를 묻자, "영상은 못 봤다. 당시 상황의 위험성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A호가 입항하지 않아서 사고가 났을 수도 있지 않으냐'고 하자, "가정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사람 죽고 배가 뒤집혀야 긴급피항 됩니까?"

해양청의 이런 설명에, A호 측은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반응입니다. 항해사 임 씨는 "다른 선박 자리라고 해도 위험에 놓인 선박까지 입항허가를 해주지 않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동해항 VTS도 오후에 날씨가 많이 안 좋으니 빨리 묵호항으로 가라고 했겠느냐"면서 "우리나라 법은 사람이 죽고 배가 전복되고 해야 긴급 입항허가를 내주게 돼 있느냐"고 합니다.

A호의 해운사 사장은 "세월호 사태 이후 안전관리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현실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 선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선박이 겪는 일"이라면서 "제도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맞게 유연한 적용도 해 줬으면 한다"고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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