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대통령’ 논란…정치 풍자의 품격

입력 2019.10.29 (08:07) 수정 2019.10.31 (09:0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1837년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봤음직한 이 동화 속 임금님이 어제는 자유한국당 유튜브 영상에 소환됐습니다.

제작발표회까지 열었는데, 잠시 보시겠습니다.

영상에는 문 대통령으로 보이는 임금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초반에는 양복을 입고 나왔다가, 이후 측근들이 건넨 투명한 옷을 하나 씩 걸칩니다.

'안보 자켓', '경제 바지', '인사 넥타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옷들을 착용하느라 마침내 속옷만 입은 상태로 백성들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안보, 경제, 외교, 인사 다 망치더니 결국 스스로 옷을 벗었구만."]

문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빗대 옷을 벗은 모습으로 희화화 한 것입니다.

특히 인사 넥타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풍자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경찰차 앞에서 수갑을 찬 모습입니다.

문 대통령 캐릭터는 그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이렇게요~

["멋진 조 장관이 은팔찌를 차니까 더 멋지구나..."]

해당 영상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것이 바로 끊이지 않는 재앙! 문재앙이란다”고 일화를 소개하며 끝이 납니다.

발표회 중 같은 내용의 인형극도 열렸는데요,

["연기자 분들 앞으로 나와주실까요?"]

황교안 대표가 직접 캐릭터 연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영상이 공개되자 청와대는 즉각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상대를 깎아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과연 국격을 높이는 것이냐"는 입장을 냈습니다.

민주당도 격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조롱과 비난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었다" "천인공노할 내용"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대로 한 풍자 사례도 언급했습니다.

바로,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선보인 연극 '환생 경제'입니다.

노 전 대통령을 풍자한 극중 인물 '노가리'를 두고 욕설을 하는 내용이 나와 논란이 됐습니다.

[이해식/더불어민주당 대변인 :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온갖 잡스러운 욕설을 퍼부어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이렇게 민주당이 이번 논란과 관련해 '환생 경제'를 언급했다면, 바른미래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더러운 잠' 패러디 그림을 상기시키며 양쪽을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더러운 잠'은 2017년 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주최한 시국비판 풍자 전시회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누드화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패러디 그림입니다.

당시 야당 대선주자였던 문 대통령은 SNS에 직접 이 그림을 언급하면서 "대단히 민망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례적으로 자당 의원을 비판했습니다.

정치 풍자가 활성화된 미국·유럽 등지에서는 정치 지도자에 대해 성별을 불문하고 나체나 속옷 차림으로 묘사하며 조롱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 5월 영국 <스펙테이터> 만평은 이번 한국당 동영상과 똑같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그렸습니다.

지난해 6월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이 제기됐을땐 뉴욕타임스가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이 알몸으로 입맞춤을 하는 만화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인 풍자의 소재가 된 역사는 그리 길진 않습니다.

1987년 대선 땝니다.

‘1노(盧)3김(金)’의 경쟁이 뜨거웠습니다.

개그맨 최병서가 이들 네 후보를 코미디 소재로 삼았습니다.

후보들의 성대모사를 했습니다.

[최병서/김종필 성대모사 : "이거 참 거물급은 거물급일세."]

[최병서/김영삼 성대모사 : "유행 정보를 '학실히' 보내드렸습니다 여러분."]

[최병서/김대중 성대모사 : "청문회 증인들이 뽑은 노래를 들어보시겄습니다."]

이후 성대모사는 노 후보에서 노 대통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전까지 TV 프로에서 대통령 풍자는 일종의 금기사항이었습니다.

2006년, 지금의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에선 이계진 대변인의 개각 논평이 화제였습니다.

대통령과 새 장관들에게 아호를 하나씩 붙였는데, 인사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독선과 오만으로 차 있다며 '독오 선생'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 편만 든다며 '향북 선생'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지옥(감옥)과 천당을 오갔다며 '천지 선생'으로 부르자 했습니다.

야당의 일방적 관점이라 전적으로 동감하긴 어렵지만 비교적 점잖은 표현인 '선생'을 붙여 놨으니 험악한 말과 영상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지금의 상황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이쯤에서 영화 ‘간첩 리철진’으로 유명한 장진 감독의 풍자론을 음미해 볼까요.

“풍자는 대상과 타이밍은 물론, 수위까지 정확해야 한다.”면서 “대중이 느끼는 옳고 그름을 위배하면 풍자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찌르되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고급스러운 풍자는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친절한 뉴스였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벌거벗은 대통령’ 논란…정치 풍자의 품격
    • 입력 2019-10-29 08:09:02
    • 수정2019-10-31 09:02:48
    아침뉴스타임
'벌거벗은 임금님' 1837년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봤음직한 이 동화 속 임금님이 어제는 자유한국당 유튜브 영상에 소환됐습니다.

제작발표회까지 열었는데, 잠시 보시겠습니다.

영상에는 문 대통령으로 보이는 임금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초반에는 양복을 입고 나왔다가, 이후 측근들이 건넨 투명한 옷을 하나 씩 걸칩니다.

'안보 자켓', '경제 바지', '인사 넥타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옷들을 착용하느라 마침내 속옷만 입은 상태로 백성들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안보, 경제, 외교, 인사 다 망치더니 결국 스스로 옷을 벗었구만."]

문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빗대 옷을 벗은 모습으로 희화화 한 것입니다.

특히 인사 넥타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풍자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경찰차 앞에서 수갑을 찬 모습입니다.

문 대통령 캐릭터는 그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이렇게요~

["멋진 조 장관이 은팔찌를 차니까 더 멋지구나..."]

해당 영상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것이 바로 끊이지 않는 재앙! 문재앙이란다”고 일화를 소개하며 끝이 납니다.

발표회 중 같은 내용의 인형극도 열렸는데요,

["연기자 분들 앞으로 나와주실까요?"]

황교안 대표가 직접 캐릭터 연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영상이 공개되자 청와대는 즉각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상대를 깎아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과연 국격을 높이는 것이냐"는 입장을 냈습니다.

민주당도 격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조롱과 비난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었다" "천인공노할 내용"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대로 한 풍자 사례도 언급했습니다.

바로,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선보인 연극 '환생 경제'입니다.

노 전 대통령을 풍자한 극중 인물 '노가리'를 두고 욕설을 하는 내용이 나와 논란이 됐습니다.

[이해식/더불어민주당 대변인 :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온갖 잡스러운 욕설을 퍼부어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이렇게 민주당이 이번 논란과 관련해 '환생 경제'를 언급했다면, 바른미래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더러운 잠' 패러디 그림을 상기시키며 양쪽을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더러운 잠'은 2017년 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주최한 시국비판 풍자 전시회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누드화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패러디 그림입니다.

당시 야당 대선주자였던 문 대통령은 SNS에 직접 이 그림을 언급하면서 "대단히 민망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례적으로 자당 의원을 비판했습니다.

정치 풍자가 활성화된 미국·유럽 등지에서는 정치 지도자에 대해 성별을 불문하고 나체나 속옷 차림으로 묘사하며 조롱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 5월 영국 <스펙테이터> 만평은 이번 한국당 동영상과 똑같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그렸습니다.

지난해 6월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이 제기됐을땐 뉴욕타임스가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이 알몸으로 입맞춤을 하는 만화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인 풍자의 소재가 된 역사는 그리 길진 않습니다.

1987년 대선 땝니다.

‘1노(盧)3김(金)’의 경쟁이 뜨거웠습니다.

개그맨 최병서가 이들 네 후보를 코미디 소재로 삼았습니다.

후보들의 성대모사를 했습니다.

[최병서/김종필 성대모사 : "이거 참 거물급은 거물급일세."]

[최병서/김영삼 성대모사 : "유행 정보를 '학실히' 보내드렸습니다 여러분."]

[최병서/김대중 성대모사 : "청문회 증인들이 뽑은 노래를 들어보시겄습니다."]

이후 성대모사는 노 후보에서 노 대통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전까지 TV 프로에서 대통령 풍자는 일종의 금기사항이었습니다.

2006년, 지금의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에선 이계진 대변인의 개각 논평이 화제였습니다.

대통령과 새 장관들에게 아호를 하나씩 붙였는데, 인사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독선과 오만으로 차 있다며 '독오 선생'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 편만 든다며 '향북 선생'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지옥(감옥)과 천당을 오갔다며 '천지 선생'으로 부르자 했습니다.

야당의 일방적 관점이라 전적으로 동감하긴 어렵지만 비교적 점잖은 표현인 '선생'을 붙여 놨으니 험악한 말과 영상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지금의 상황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이쯤에서 영화 ‘간첩 리철진’으로 유명한 장진 감독의 풍자론을 음미해 볼까요.

“풍자는 대상과 타이밍은 물론, 수위까지 정확해야 한다.”면서 “대중이 느끼는 옳고 그름을 위배하면 풍자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찌르되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고급스러운 풍자는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친절한 뉴스였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