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 증거인멸’ 재판서 등장한 ‘친족상도례’

입력 2019.10.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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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이 회사의 안정과 미래를 위해 설사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형법에서 말하는 '친족상도례' 규정을 준용해 평가하면 어떨까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어제(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소병석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삼성전자·삼성바이오 관계자들의 증거인멸·증거인멸교사 등 사건 결심 공판에선 뜬금없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 증거인멸 재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친족상도례'

삼성 임직원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가 예상되자, 지난해 삼성바이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 내부 문건 등을 은폐·조작하도록 지시(증거인멸 등)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요. 직원 수십 명의 휴대전화와 노트북에 '합병', '미전실' '부회장', '이재용' 등 검색어를 넣어 문제 소지가 있는 자료를 삭제하고, 회사 공용서버 등 분식회계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들을 공장 바닥 아래 등에 숨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변호인이 주장한 '친족상도례'란, 부부나 부모-자식 등 가까운 혈족 사이에선 절도 등 재산범죄의 형을 면제해주는 특수한 형법 규정입니다. 피가 이어지는 등 가까운 친족을 상대로 재산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그 형을 면제하거나,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기소할 수 있도록 '봐주는' 겁니다.

예컨대 아들·딸 등의 자녀나 배우자, 동거 친족이 본인에게 절도·사기·공갈·횡령·배임·권리행사방해죄나 장물죄를 저지른 경우 그 형을 면제하고, 그 외 조금 먼 친족이 이런 죄를 범한 경우, 본인(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이는 과거 혈족사회였을 당시 친족간의 화평을 위해 가정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일종의 배려가 들어있는 조항이었습니다. 애당초 친족간 범죄에만 등장하는 보기 드문 주장이기도 합니다.

다만 친족상도례는 '재산범죄'에만 적용되고, 증거인멸죄 등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녀나 배우자와 같은 '친족'에게만 적용되는 규정이라, 증거인멸죄 피의사실을 받고 있는 삼성 임직원들에겐 적용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인멸 혐의를 받는 임직원들의 변호인들은 친족상도례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임직원들에겐 삼성이 '친족'과도 같은 관계였단 이유에서였습니다.

■ 갑자기 열린 '천하제일 충성대회'…"삼성은 또 하나의 가족"

변호인들은 이들 임직원들이 하나같이 회사에 대해 남다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행위가 어떤 파급효과를 낳을 줄 몰랐으며, 회사를 향한 '충심'에서 나온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증거인멸의 사실관계는 인정하되, 그 동기가 '애사심'이었다는 걸 강조해 형량을 낮추는 데 집중한 겁니다.

"A 피고인은 경북 OO의 작은 시골 마을 농가에서 2남 1녀의 막내로…(중략)…미래전략실 경영 등 10년간 감사업무 담당하며 특유의 정의감과 열정을 발휘해 다수의 부정부실사고 적발에 기여, 입사 동기들보다 먼저 상무로 진급했고…(중략)…사회,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회사를 살린다는 생각이 과해서 이런 범행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B 피고인은 인생 절반 이상을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걸 경험했으며 성실성, 정직함을 인정받아 고위 임원까지 올라갔습니다. 피고인에게 삼성전자는 단순 직장이 아니라 인생 자체였습니다. 30년 넘는 재직 기간 동안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자녀 입학식 졸업식에 한 번도 참석 못 했고 기념일도 챙긴 적 없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휴가 한 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C 피고인에게 있어 회사는 살아온 인생에 있어 절반 이상을 함께한 존재입니다. 회사에 대한 애착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회사의 성장이 곧 피고인의 성장, 회사의 이익이 피고인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회사를 위한 마음에서 했다는 말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주의했던 일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습니다. 무엇이 회사를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고…"

변론은 "20년 내지 30년을 삼성에 근무해온 피고인들은 저마다 깊이 반성하며 뉘우치고 있다"며 "회사의 명예는 자신의 성취와 영광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이상 삼성은 자신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분신'이라"고 변호인들이 강조하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압수수색 1년 6개월간 15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회사를 위한다는 마음에서' 자료 삭제에 이르게 됐다'며, 이들에게 회사는 가족 못지않은 관계였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형사재판에서의 심판의 목표는, 처벌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본 변호인은 믿고 있다"라고도 주장하는 쪽도 있었습니다.

공판을 참관한 기자들은 갑자기 법정에서 누가 더 삼성에 헌신했는지 경쟁하는 '천하제일 충성대회'가 열린 것을 보며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검찰은 가차 없이 실형 구형

그러나 검찰은 변호인들의 절절한 변론에도 아랑곳없이 삼성 임직원들에게 각각 실형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자금담당 이모 부사장에겐 징역 4년을, 사업지원TF 보안 담당 박 모 부사장과 부품전략 담당 김모 부사장에게는 각각 징역 3년 6개월씩을 구형했습니다. 또 삼성그룹 임직원들과 삼성바이오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 임직원들, 삼성바이오 보안부서 대리에게는 각각 징역 1∼3년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이번 범행은 동원된 인력과 기간, 인멸된 자료 숫자에 비춰볼 때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증거 인멸 범행"이라며 "글로벌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 임직원들이 대규모 범행을 저질러 우리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또 "피고인들은 중한 죄를 범했음에도 반성하는 태도가 부족하고 배경에 있는 거대기업의 힘을 믿고 변명을 일삼고 있다"면서 "거듭된 허위 진술로 진실을 은폐하려 하고 각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친족상도례'까지 동원한 변호인들의 전략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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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바 증거인멸’ 재판서 등장한 ‘친족상도례’
    • 입력 2019-10-29 09:43:35
    취재K
"피고인들이 회사의 안정과 미래를 위해 설사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형법에서 말하는 '친족상도례' 규정을 준용해 평가하면 어떨까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어제(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소병석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삼성전자·삼성바이오 관계자들의 증거인멸·증거인멸교사 등 사건 결심 공판에선 뜬금없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 증거인멸 재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친족상도례'

삼성 임직원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가 예상되자, 지난해 삼성바이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 내부 문건 등을 은폐·조작하도록 지시(증거인멸 등)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요. 직원 수십 명의 휴대전화와 노트북에 '합병', '미전실' '부회장', '이재용' 등 검색어를 넣어 문제 소지가 있는 자료를 삭제하고, 회사 공용서버 등 분식회계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들을 공장 바닥 아래 등에 숨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변호인이 주장한 '친족상도례'란, 부부나 부모-자식 등 가까운 혈족 사이에선 절도 등 재산범죄의 형을 면제해주는 특수한 형법 규정입니다. 피가 이어지는 등 가까운 친족을 상대로 재산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그 형을 면제하거나,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기소할 수 있도록 '봐주는' 겁니다.

예컨대 아들·딸 등의 자녀나 배우자, 동거 친족이 본인에게 절도·사기·공갈·횡령·배임·권리행사방해죄나 장물죄를 저지른 경우 그 형을 면제하고, 그 외 조금 먼 친족이 이런 죄를 범한 경우, 본인(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이는 과거 혈족사회였을 당시 친족간의 화평을 위해 가정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일종의 배려가 들어있는 조항이었습니다. 애당초 친족간 범죄에만 등장하는 보기 드문 주장이기도 합니다.

다만 친족상도례는 '재산범죄'에만 적용되고, 증거인멸죄 등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녀나 배우자와 같은 '친족'에게만 적용되는 규정이라, 증거인멸죄 피의사실을 받고 있는 삼성 임직원들에겐 적용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인멸 혐의를 받는 임직원들의 변호인들은 친족상도례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임직원들에겐 삼성이 '친족'과도 같은 관계였단 이유에서였습니다.

■ 갑자기 열린 '천하제일 충성대회'…"삼성은 또 하나의 가족"

변호인들은 이들 임직원들이 하나같이 회사에 대해 남다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행위가 어떤 파급효과를 낳을 줄 몰랐으며, 회사를 향한 '충심'에서 나온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증거인멸의 사실관계는 인정하되, 그 동기가 '애사심'이었다는 걸 강조해 형량을 낮추는 데 집중한 겁니다.

"A 피고인은 경북 OO의 작은 시골 마을 농가에서 2남 1녀의 막내로…(중략)…미래전략실 경영 등 10년간 감사업무 담당하며 특유의 정의감과 열정을 발휘해 다수의 부정부실사고 적발에 기여, 입사 동기들보다 먼저 상무로 진급했고…(중략)…사회,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회사를 살린다는 생각이 과해서 이런 범행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B 피고인은 인생 절반 이상을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걸 경험했으며 성실성, 정직함을 인정받아 고위 임원까지 올라갔습니다. 피고인에게 삼성전자는 단순 직장이 아니라 인생 자체였습니다. 30년 넘는 재직 기간 동안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자녀 입학식 졸업식에 한 번도 참석 못 했고 기념일도 챙긴 적 없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휴가 한 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C 피고인에게 있어 회사는 살아온 인생에 있어 절반 이상을 함께한 존재입니다. 회사에 대한 애착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회사의 성장이 곧 피고인의 성장, 회사의 이익이 피고인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회사를 위한 마음에서 했다는 말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주의했던 일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습니다. 무엇이 회사를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고…"

변론은 "20년 내지 30년을 삼성에 근무해온 피고인들은 저마다 깊이 반성하며 뉘우치고 있다"며 "회사의 명예는 자신의 성취와 영광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이상 삼성은 자신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분신'이라"고 변호인들이 강조하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압수수색 1년 6개월간 15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회사를 위한다는 마음에서' 자료 삭제에 이르게 됐다'며, 이들에게 회사는 가족 못지않은 관계였단 점을 강조했습니다. "형사재판에서의 심판의 목표는, 처벌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본 변호인은 믿고 있다"라고도 주장하는 쪽도 있었습니다.

공판을 참관한 기자들은 갑자기 법정에서 누가 더 삼성에 헌신했는지 경쟁하는 '천하제일 충성대회'가 열린 것을 보며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검찰은 가차 없이 실형 구형

그러나 검찰은 변호인들의 절절한 변론에도 아랑곳없이 삼성 임직원들에게 각각 실형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자금담당 이모 부사장에겐 징역 4년을, 사업지원TF 보안 담당 박 모 부사장과 부품전략 담당 김모 부사장에게는 각각 징역 3년 6개월씩을 구형했습니다. 또 삼성그룹 임직원들과 삼성바이오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 임직원들, 삼성바이오 보안부서 대리에게는 각각 징역 1∼3년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이번 범행은 동원된 인력과 기간, 인멸된 자료 숫자에 비춰볼 때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증거 인멸 범행"이라며 "글로벌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 임직원들이 대규모 범행을 저질러 우리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또 "피고인들은 중한 죄를 범했음에도 반성하는 태도가 부족하고 배경에 있는 거대기업의 힘을 믿고 변명을 일삼고 있다"면서 "거듭된 허위 진술로 진실을 은폐하려 하고 각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친족상도례'까지 동원한 변호인들의 전략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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