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차라리 기대를 말걸”…‘치매가족휴가제’는 ‘휴가 중’?

입력 2019.10.30 (07:07) 수정 2019.10.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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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X~~"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 욕을 합니다. 뭘 훔쳐갔다고 몰아세웁니다. 알고 보면, 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물건을 다른 데 두고도, 그걸 기억하지 못해 누군가 훔쳐갔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치매는 그래서 더 힘든 병입니다. 돌보는 몸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지치는 병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치매가족휴가제'를 발표했을 때, 많은 가족이 희망을 품었습니다. '잠시 환자를 맡기고, 단 며칠이라도 쉬고 오라'는 배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치매 가족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 210번 통화에서 181번 거절..."다른 데 알아보세요"

건강보험공단에 '치매가족휴가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 명단을 요청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시설에서 노인을 돌봐주는 '단기 보호'와 요양보호사가 가정으로 찾아오는 '종일 방문요양' 서비스 두 가지로 운영됩니다. 1년에 최대 6일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현재 전국 2,434개 시설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료: 건강보험공단)‘치매가족휴가제’는 현재 전국 2,434개 시설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료: 건강보험공단)

'단기 보호' 160곳, '종일 방문요양' 2천274곳이 등록돼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자료로는 전국에서 2천 434곳이 운영 중입니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시설이 정말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규모는 얼마나 될까? 어디에서도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면 무조건 들이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설마' 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기관마다 '현재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160곳 가운데 44%, 70곳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머지 90곳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실제론 이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병상이 다 차서 여유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62곳, 39%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치매 환자를 잠시 맡기고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기관은 160곳 가운데 28곳, 17%에 불과했습니다.

가정으로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치매 환자를 돌보는 '종일 방문요양' 서비스는 또 어떨까. 무작위로 50곳을 선정해 전화를 걸었는데 49곳에서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방문 요양기관은 하루 2~4시간, 길어야 6시간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나 평소 친분도 없는 치매 환자의 집에서 보호자 없이 밤낮으로 함께 있는 건 요양보호사들이 선뜻 나서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하루 최소 12시간 이상, 1년에 12번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씩, 연달아 6일간 이용해도 됩니다. 최소 24시간은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휴가'를 갈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방문요양 시스템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저는 210번 전화를 걸어 181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던 치매 환자 가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 생색은 정부가, 부담은 민간이?..."성과 위주 정책의 한계"

사정을 듣다 보니 무턱대고 시설만 탓할 순 없었습니다. 불과 며칠 머무르는, 들쭉날쭉한 이용자들을 위해 민간시설이 인력과 장비, 시설을 확충할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해가 갔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조용형 한국노인장기요양기관협회장은 "운영의 연속성이 떨어지는 제도를 민간에게 하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가시적으로 무언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성과 위주 정책의 한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책임을 선언한 만큼, 무조건 민간에 맡기기보다는, 일정 부분 공공영역에서 이 서비스를 감당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는 어제(29일) 국가치매관리위원회를 열고 치매 환자 주·야간 돌봄기능 강화를 선언했습니다.정부는 어제(29일) 국가치매관리위원회를 열고 치매 환자 주·야간 돌봄기능 강화를 선언했습니다.

■ 치매 돌봄 정책 확대..."촘촘한 점검 있어야"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나누겠다"며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치매 정책은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어제(29일) 환자와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돌봄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치매안심센터 내 치매쉼터의 이용시간을 하루 3시간에서 7시간으로 연장하고, 주·야간보호기관에서 밤에도 잠을 잘 수 있는 단기보호서비스를 확대합니다. 내년부터 오는 2028년까지 1,987억 원을 투입해 치매 조기진단과 예방, 치료, 부작용 개선 등의 연구 개발에도 착수합니다.


성과를 위해 내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양적 확대 보다는 단 하나라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제도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실망도 안 했을 텐데, 기대를 품었더니 서운함만 더 커지더라고요."

50대 아들은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다며 머쓱해 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정말 치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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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차라리 기대를 말걸”…‘치매가족휴가제’는 ‘휴가 중’?
    • 입력 2019-10-30 07:07:55
    • 수정2019-10-30 17:57:13
    취재후·사건후
"나쁜 X~~"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 욕을 합니다. 뭘 훔쳐갔다고 몰아세웁니다. 알고 보면, 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물건을 다른 데 두고도, 그걸 기억하지 못해 누군가 훔쳐갔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치매는 그래서 더 힘든 병입니다. 돌보는 몸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지치는 병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치매가족휴가제'를 발표했을 때, 많은 가족이 희망을 품었습니다. '잠시 환자를 맡기고, 단 며칠이라도 쉬고 오라'는 배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치매 가족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 210번 통화에서 181번 거절..."다른 데 알아보세요" 건강보험공단에 '치매가족휴가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 명단을 요청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시설에서 노인을 돌봐주는 '단기 보호'와 요양보호사가 가정으로 찾아오는 '종일 방문요양' 서비스 두 가지로 운영됩니다. 1년에 최대 6일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현재 전국 2,434개 시설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료: 건강보험공단) '단기 보호' 160곳, '종일 방문요양' 2천274곳이 등록돼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자료로는 전국에서 2천 434곳이 운영 중입니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시설이 정말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규모는 얼마나 될까? 어디에서도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면 무조건 들이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설마' 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기관마다 '현재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160곳 가운데 44%, 70곳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머지 90곳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실제론 이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병상이 다 차서 여유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62곳, 39%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치매 환자를 잠시 맡기고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기관은 160곳 가운데 28곳, 17%에 불과했습니다. 가정으로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치매 환자를 돌보는 '종일 방문요양' 서비스는 또 어떨까. 무작위로 50곳을 선정해 전화를 걸었는데 49곳에서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방문 요양기관은 하루 2~4시간, 길어야 6시간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나 평소 친분도 없는 치매 환자의 집에서 보호자 없이 밤낮으로 함께 있는 건 요양보호사들이 선뜻 나서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하루 최소 12시간 이상, 1년에 12번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씩, 연달아 6일간 이용해도 됩니다. 최소 24시간은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휴가'를 갈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방문요양 시스템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저는 210번 전화를 걸어 181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던 치매 환자 가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 생색은 정부가, 부담은 민간이?..."성과 위주 정책의 한계" 사정을 듣다 보니 무턱대고 시설만 탓할 순 없었습니다. 불과 며칠 머무르는, 들쭉날쭉한 이용자들을 위해 민간시설이 인력과 장비, 시설을 확충할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해가 갔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조용형 한국노인장기요양기관협회장은 "운영의 연속성이 떨어지는 제도를 민간에게 하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가시적으로 무언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성과 위주 정책의 한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책임을 선언한 만큼, 무조건 민간에 맡기기보다는, 일정 부분 공공영역에서 이 서비스를 감당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는 어제(29일) 국가치매관리위원회를 열고 치매 환자 주·야간 돌봄기능 강화를 선언했습니다. ■ 치매 돌봄 정책 확대..."촘촘한 점검 있어야"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나누겠다"며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치매 정책은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어제(29일) 환자와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돌봄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치매안심센터 내 치매쉼터의 이용시간을 하루 3시간에서 7시간으로 연장하고, 주·야간보호기관에서 밤에도 잠을 잘 수 있는 단기보호서비스를 확대합니다. 내년부터 오는 2028년까지 1,987억 원을 투입해 치매 조기진단과 예방, 치료, 부작용 개선 등의 연구 개발에도 착수합니다. 성과를 위해 내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양적 확대 보다는 단 하나라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제도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실망도 안 했을 텐데, 기대를 품었더니 서운함만 더 커지더라고요." 50대 아들은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다며 머쓱해 했습니다. '치매가족휴가제'는 정말 치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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