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베를린 장벽의 추억…경비대원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입력 2019.11.0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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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분단국가 대한민국에겐 통일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도시다. 베를린이 오는 9일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다. 1989년 11월 9일, 28년 동안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장벽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누구도 예상 못 한 방법으로 무너져 내렸다. 독일은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마침내 통일까지 이뤄냈다.

KBS 베를린지국은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당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상징적인 위치에서 장벽 붕괴를 체험했고,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청취했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였고, 70년 이상 분단상태인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베를린장벽 경비대원, 슈타지 감옥 수감자, 동독 공산당 정권 마지막 총리가 경험한 장벽 붕괴 이야기를 차례로 게재한다.


20살 청년 장벽 경비대원으로 차출되다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마이크 카렝케 씨(50세)가 지난 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섰다.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은 며칠 뒤 있을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주말이라 관광객들로 더욱 북적이는 광장에서 카렝케 씨는 깊은 감회에 젖었다. 30년 전 카렝케 씨는 브란덴부르크문 초소를 지키는 경비대원이었다. 당시 튀링엔주의 로자 룩셈부르크 국경 장교학교 2학년생이었던 카렝케 씨는 동독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면서 10월 말 베를린 경비대로 차출됐다. 같은 학교 학생 100여 명이 기존 경비대 지원병력으로 동행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카렝케 씨는 숙소에서 당시 동독 정부의 TV 기자회견을 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이었는데, 회견 말미에 동독 주민의 여행자유화 조치에 대한 기자의 질문이 나왔다. "조치가 언제 시행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쪽지를 뒤적이던 샤보브스키 대변인이 "지금 당장, 지체 없이"라고 대답했다.

여행자유화 조치가 당장 시행된다면 국경 경비대가 사전에 통보를 받았어야 했는데, 자신들은 아무런 지침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고 카렝케 씨는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렝케 씨와 경비대원들은 밤중에 잠을 자다 말고 비상 출동했다. "밤에 갑자기 경보가 내려졌고 트럭에 탑승해야 했습니다. 총은 두고 갔습니다." 카렝케 씨의 회상이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동독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일행이 도착한 곳은 브란덴부르크문 앞.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에 전혀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장벽을 넘고 있었고,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장벽을 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벽 위에서 환호하는 인파, 일부 주민들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이 '철갑 장벽'이라 부르던 바로 그 장벽이었다.

사진 출처: Chronik der Mauer사진 출처: Chronik der Mauer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봉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젠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동독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고, 국경보호시설 또한 영원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사전 훈련도 없었다고 카렝케 씨는 말했다. 당연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건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기에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고 기뻐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에 서보고 싶다는 많은 이들의 꿈이 이뤄지고, 개방된 국경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예상 못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 순간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웃기도 하고 생기발랄했습니다."

어느 쪽도 폭력이 없었다…그래서 평화가 유지됐다

당시 동독 입장에서 보면 장벽이 뚫릴 경우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 상황. 무력진압 조치가 논의됐을 법하다. 실제로 불과 다섯 달 전인 같은 해 6월 4일, 중국 공산당 정부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주화 시위를 탱크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다.

만약 동독 정부가 무력진압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상황은 끔찍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장벽 현장에서 무력 진압은 없었다. 원래 경비대는 무기를 소지했지만, 그날 밤 출동 당시에는 총기 없이 곤봉만 가지고 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상황 원상 복귀'라는 임무가 있었지만,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비대원들이 한 건 장벽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뛰어내리지 않게 하거나, 그냥 서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부 대원은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평화로운 상황이 유지되고 어떤 쪽에서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광장에서 평화롭게 행동한 사람들도 기여를 했지만, 저희의 행동 때문에도 무사하게 진행됐습니다."

사진 출처: Revolution89.de사진 출처: Revolution89.de

마침내 이뤄낸 통일…'폭력 없이 만들어진 역사'

11월 9일 이후, 개방되는 국경 초소는 점차 늘어났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독 공산당의 마지막 총리를 맡은 한스 모드로 당시 총리는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장벽 개방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장벽 개방은 동서독 주민들의 왕래를 더욱 활성화시켰고, 마침내 11개월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달성했다.

"그때의 기억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장벽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독일이 통일되어서 좋습니다. 30년이 지났지만 저는 이곳에 오는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폭력 없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카렝케 씨가 다니던 동독의 장교학교는 해체됐다. 학교를 떠난 카렝케 씨는 이후 공무원 양성 전문대학에 도전했다. 세무 공무원이 된 카렝케 씨는 지금까지 20여 년간 공직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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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베를린 장벽의 추억…경비대원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 입력 2019-11-07 07:01:03
    특파원 리포트
독일 베를린. 분단국가 대한민국에겐 통일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도시다. 베를린이 오는 9일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다. 1989년 11월 9일, 28년 동안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장벽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누구도 예상 못 한 방법으로 무너져 내렸다. 독일은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마침내 통일까지 이뤄냈다.

KBS 베를린지국은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당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상징적인 위치에서 장벽 붕괴를 체험했고,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청취했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였고, 70년 이상 분단상태인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베를린장벽 경비대원, 슈타지 감옥 수감자, 동독 공산당 정권 마지막 총리가 경험한 장벽 붕괴 이야기를 차례로 게재한다.


20살 청년 장벽 경비대원으로 차출되다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마이크 카렝케 씨(50세)가 지난 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섰다.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은 며칠 뒤 있을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주말이라 관광객들로 더욱 북적이는 광장에서 카렝케 씨는 깊은 감회에 젖었다. 30년 전 카렝케 씨는 브란덴부르크문 초소를 지키는 경비대원이었다. 당시 튀링엔주의 로자 룩셈부르크 국경 장교학교 2학년생이었던 카렝케 씨는 동독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면서 10월 말 베를린 경비대로 차출됐다. 같은 학교 학생 100여 명이 기존 경비대 지원병력으로 동행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카렝케 씨는 숙소에서 당시 동독 정부의 TV 기자회견을 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이었는데, 회견 말미에 동독 주민의 여행자유화 조치에 대한 기자의 질문이 나왔다. "조치가 언제 시행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쪽지를 뒤적이던 샤보브스키 대변인이 "지금 당장, 지체 없이"라고 대답했다.

여행자유화 조치가 당장 시행된다면 국경 경비대가 사전에 통보를 받았어야 했는데, 자신들은 아무런 지침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고 카렝케 씨는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렝케 씨와 경비대원들은 밤중에 잠을 자다 말고 비상 출동했다. "밤에 갑자기 경보가 내려졌고 트럭에 탑승해야 했습니다. 총은 두고 갔습니다." 카렝케 씨의 회상이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동독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일행이 도착한 곳은 브란덴부르크문 앞.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에 전혀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장벽을 넘고 있었고,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장벽을 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벽 위에서 환호하는 인파, 일부 주민들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이 '철갑 장벽'이라 부르던 바로 그 장벽이었다.

사진 출처: Chronik der Mauer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봉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젠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동독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고, 국경보호시설 또한 영원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사전 훈련도 없었다고 카렝케 씨는 말했다. 당연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건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기에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고 기뻐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에 서보고 싶다는 많은 이들의 꿈이 이뤄지고, 개방된 국경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예상 못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 순간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웃기도 하고 생기발랄했습니다."

어느 쪽도 폭력이 없었다…그래서 평화가 유지됐다

당시 동독 입장에서 보면 장벽이 뚫릴 경우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 상황. 무력진압 조치가 논의됐을 법하다. 실제로 불과 다섯 달 전인 같은 해 6월 4일, 중국 공산당 정부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주화 시위를 탱크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다.

만약 동독 정부가 무력진압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상황은 끔찍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장벽 현장에서 무력 진압은 없었다. 원래 경비대는 무기를 소지했지만, 그날 밤 출동 당시에는 총기 없이 곤봉만 가지고 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상황 원상 복귀'라는 임무가 있었지만,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비대원들이 한 건 장벽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뛰어내리지 않게 하거나, 그냥 서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부 대원은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평화로운 상황이 유지되고 어떤 쪽에서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광장에서 평화롭게 행동한 사람들도 기여를 했지만, 저희의 행동 때문에도 무사하게 진행됐습니다."

사진 출처: Revolution89.de
마침내 이뤄낸 통일…'폭력 없이 만들어진 역사'

11월 9일 이후, 개방되는 국경 초소는 점차 늘어났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독 공산당의 마지막 총리를 맡은 한스 모드로 당시 총리는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장벽 개방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장벽 개방은 동서독 주민들의 왕래를 더욱 활성화시켰고, 마침내 11개월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달성했다.

"그때의 기억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장벽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독일이 통일되어서 좋습니다. 30년이 지났지만 저는 이곳에 오는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폭력 없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카렝케 씨가 다니던 동독의 장교학교는 해체됐다. 학교를 떠난 카렝케 씨는 이후 공무원 양성 전문대학에 도전했다. 세무 공무원이 된 카렝케 씨는 지금까지 20여 년간 공직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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