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동일인의 것으로 사료됨”…2장짜리 국과수 감정서의 무게

입력 2019.11.07 (16:31) 수정 2019.11.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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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일인 체모로 사료된다" 결론
혈액형으로 이춘재 빠지고 윤 씨 남아
가능성에 불과한데도 '동일인' 단언

"제가 봤을 때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이놈의 감정서예요."

윤 모 씨는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재심을 준비 중이다. 이를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30년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를 '왜곡의 출발점'으로 봤다.

박 변호사는 "감정서가 동일인의 체모라고 단정 짓는 바람에 윤 씨의 범행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너무나 많음에도 다 무시되거나 감춰지거나 왜곡됐다. 이게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국과수 감정서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DNA 감정 결과도 아닌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강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박 변호사가 공개한 감정서는 뜻밖에도 달랑 2장이었다.


증1호: 현장 발견 체모, 증2호: 윤 씨 체모

국과수 감정서는 1989년 7월 18일 발급됐다. '증1호'와 '증2호'라고 이름 붙인 체모 2개를 비교한 결과다.

증1호는 8차 사건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다. 증2호는 윤 씨의 체모다. 감정서는 2개 체모를 분석한 결과 알루미늄, 티타늄, 망간 등 10개 원소의 성분이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국과수는 이 결과를 근거로 '증1호와 증2호는 동일인의 체모로 사료됨'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분석이 잘못일 확률은 3600만 분의 1이라고도 명시했다.

이 결과를 받아 본 경찰은 윤 씨를 체포해 자백을 받아냈다며 재판에 넘겼고, 윤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됐지만 20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고, 강압 수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며 재심을 준비 중이다.


왜 40% 편차인가

국과수 감정서에서 눈에 띄는 건 40% 편차이다. 원소 함량이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는 건 A 원소의 함량이 증1호에서 10이라면, 증2호에서 이 원소 함량이 14 미만으로만 나오면 일치한다고 본다는 의미다. 10과 14는 한눈에 봐도 상당한 큰 차이가 나는 숫자다.

실제로 8차 사건 체모 감정에서 알루미늄 함량이 현장 발견 체모에서는 190ppm, 윤 씨 체모에서는 211ppm이 검출됐다. 21ppm이나 차이가 나지만 동일인의 체모로 결론 났다.

40% 편차라는 기준은 국과수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국과수는 1980년대 중반 이 감정법을 집중 연구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같은 사람 몸에서 뽑은 체모라도 원소 성분이 40% 이내에서는 편차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40% 편차 이내'라는 기준이 커 보이지만, 사람의 체모를 연구해서 나온 보편적 기준이라는 의미다.

이 분야 전문가도 분석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낮게 봤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1개가 아니라 10개 원소가 모두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는 건 매우 드문 경우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10개 원소에서 이런 차이가 난다면, 동일인의 체모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게 틀린 건 아니란 얘기다.


왜 윤 씨 체모였나

이춘재는 8차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고, 윤 씨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이춘재 자백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고, 윤 씨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국과수는 왜 범행 현장의 체모가 윤 씨의 체모라고 결론 내렸을까. 이 결론을 낸 과정을 돌아보면 결정적 역할을 한 건 혈액형이었다.

국과수는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혈액형은 B형이라고 감정했다. 이후 O형인 이춘재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고, 'B형 남자'를 대상으로 체모 비교 작업이 이뤄졌다. 결국 B형인 윤 씨의 체모는 현장 발견 체모와 최종 비교 대상이 됐다. 당시 수사에서 B형에 대한 집착은 8차 사건뿐만 아니라 화성연쇄살인 전체 수사를 지배했다.

전문가는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걸 전제로, 혈액형 감정 결과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이춘재의 체모를 분석했다면, 역시 현장 발견 체모와 유사하다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며 "혈액형 판정에서 이춘재가 빠져나간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이 체모 분석법은 DNA 분석이 아니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서 이춘재의 체모도 얼마든지 현장 발견 체모와 성분이 유사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춘재의 체모가 윤 씨 체모보다 원소 성분 함량 편차가 더 적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왜 '단언'했나

8차 사건 감정서에서 눈에 띄는 건 감정 결과 표현이다. 증1호와 증2호가 '동일인의 체모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크다'가 아니라 '동일인의 체모로 사료됨'이다. 판단이 잘못될 확률도 3600만 분의 1이라고 적혀있다. 오류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

이러한 확률은 국과수가 연구 과정에서 만든 통계식에서 나왔다. 여러 가지 변수를 넣어 계산하는 수학식인데, 일부에서는 너무 가정에 가정을 더한 계산법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계산식을 따라가 보려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라고 말했다.

확률뿐만 아니라 동일인으로 사료된다는 표현도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DNA 감정만큼의 정확도가 아닌 만큼 동일인일 가능성 정도로 의견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성 사건 재수사 초기 국과수는 오래된 증거물에서 DNA를 발견해내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30년 전 발급한 2장짜리 감정서의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의혹의 당사자'가 됐다.

비록 2장이지만 한 사람의 20년 인생을 바꿔놓은 감정서의 무게는 오롯이 국과수가 감당해내야 할 몫이다.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진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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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동일인의 것으로 사료됨”…2장짜리 국과수 감정서의 무게
    • 입력 2019-11-07 16:31:14
    • 수정2019-11-07 16:31:21
    취재후·사건후
"동일인 체모로 사료된다" 결론<br />혈액형으로 이춘재 빠지고 윤 씨 남아 <br />가능성에 불과한데도 '동일인' 단언
"제가 봤을 때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이놈의 감정서예요."

윤 모 씨는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재심을 준비 중이다. 이를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30년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를 '왜곡의 출발점'으로 봤다.

박 변호사는 "감정서가 동일인의 체모라고 단정 짓는 바람에 윤 씨의 범행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너무나 많음에도 다 무시되거나 감춰지거나 왜곡됐다. 이게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국과수 감정서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DNA 감정 결과도 아닌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강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박 변호사가 공개한 감정서는 뜻밖에도 달랑 2장이었다.


증1호: 현장 발견 체모, 증2호: 윤 씨 체모

국과수 감정서는 1989년 7월 18일 발급됐다. '증1호'와 '증2호'라고 이름 붙인 체모 2개를 비교한 결과다.

증1호는 8차 사건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다. 증2호는 윤 씨의 체모다. 감정서는 2개 체모를 분석한 결과 알루미늄, 티타늄, 망간 등 10개 원소의 성분이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국과수는 이 결과를 근거로 '증1호와 증2호는 동일인의 체모로 사료됨'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분석이 잘못일 확률은 3600만 분의 1이라고도 명시했다.

이 결과를 받아 본 경찰은 윤 씨를 체포해 자백을 받아냈다며 재판에 넘겼고, 윤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됐지만 20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고, 강압 수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며 재심을 준비 중이다.


왜 40% 편차인가

국과수 감정서에서 눈에 띄는 건 40% 편차이다. 원소 함량이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는 건 A 원소의 함량이 증1호에서 10이라면, 증2호에서 이 원소 함량이 14 미만으로만 나오면 일치한다고 본다는 의미다. 10과 14는 한눈에 봐도 상당한 큰 차이가 나는 숫자다.

실제로 8차 사건 체모 감정에서 알루미늄 함량이 현장 발견 체모에서는 190ppm, 윤 씨 체모에서는 211ppm이 검출됐다. 21ppm이나 차이가 나지만 동일인의 체모로 결론 났다.

40% 편차라는 기준은 국과수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국과수는 1980년대 중반 이 감정법을 집중 연구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같은 사람 몸에서 뽑은 체모라도 원소 성분이 40% 이내에서는 편차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40% 편차 이내'라는 기준이 커 보이지만, 사람의 체모를 연구해서 나온 보편적 기준이라는 의미다.

이 분야 전문가도 분석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낮게 봤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1개가 아니라 10개 원소가 모두 40% 편차 이내에서 일치한다는 건 매우 드문 경우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10개 원소에서 이런 차이가 난다면, 동일인의 체모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게 틀린 건 아니란 얘기다.


왜 윤 씨 체모였나

이춘재는 8차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고, 윤 씨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이춘재 자백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고, 윤 씨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국과수는 왜 범행 현장의 체모가 윤 씨의 체모라고 결론 내렸을까. 이 결론을 낸 과정을 돌아보면 결정적 역할을 한 건 혈액형이었다.

국과수는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혈액형은 B형이라고 감정했다. 이후 O형인 이춘재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고, 'B형 남자'를 대상으로 체모 비교 작업이 이뤄졌다. 결국 B형인 윤 씨의 체모는 현장 발견 체모와 최종 비교 대상이 됐다. 당시 수사에서 B형에 대한 집착은 8차 사건뿐만 아니라 화성연쇄살인 전체 수사를 지배했다.

전문가는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걸 전제로, 혈액형 감정 결과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이춘재의 체모를 분석했다면, 역시 현장 발견 체모와 유사하다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며 "혈액형 판정에서 이춘재가 빠져나간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이 체모 분석법은 DNA 분석이 아니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서 이춘재의 체모도 얼마든지 현장 발견 체모와 성분이 유사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춘재의 체모가 윤 씨 체모보다 원소 성분 함량 편차가 더 적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왜 '단언'했나

8차 사건 감정서에서 눈에 띄는 건 감정 결과 표현이다. 증1호와 증2호가 '동일인의 체모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크다'가 아니라 '동일인의 체모로 사료됨'이다. 판단이 잘못될 확률도 3600만 분의 1이라고 적혀있다. 오류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

이러한 확률은 국과수가 연구 과정에서 만든 통계식에서 나왔다. 여러 가지 변수를 넣어 계산하는 수학식인데, 일부에서는 너무 가정에 가정을 더한 계산법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계산식을 따라가 보려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라고 말했다.

확률뿐만 아니라 동일인으로 사료된다는 표현도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DNA 감정만큼의 정확도가 아닌 만큼 동일인일 가능성 정도로 의견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성 사건 재수사 초기 국과수는 오래된 증거물에서 DNA를 발견해내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30년 전 발급한 2장짜리 감정서의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의혹의 당사자'가 됐다.

비록 2장이지만 한 사람의 20년 인생을 바꿔놓은 감정서의 무게는 오롯이 국과수가 감당해내야 할 몫이다.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진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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