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동독 마지막 총리 “신뢰·화해가 통일의 조건”

입력 2019.11.09 (07:01) 수정 2019.11.0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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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베를린장벽 붕괴의 산 증인을 만나 한반도 통일의 시사점을 모색해 보는 시간. 오늘은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독 공산당 정권의 마지막 총리를 맡아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통일방안을 논의했던 한스 모드로 전 총리의 이야기다. 1928년생인 모드로 전 총리는 올해 91세다. 현재 독일 좌파당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강연과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왕성한 정치·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독 총리도 몰랐던 '베를린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 동독 통일사회당 중앙위원회는 온종일 회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날부터 사흘 일정으로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회의가 진행됐다. 첫날 회의에서 후임 총리 후보로 임명된 한스 모드로도 역시 당일 저녁 9시까지 지속된 회의에 참석했다. 9시 반쯤 회의장에서 나와 숙소로 가던 모드로 전 총리에게 한 청년이 다가왔다.

"국경이 열렸습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죠?"
"분명히 들었습니다. 국경이 개방됐다고…"
"그래서 어디로 가죠?"
"저도 건너가고 싶습니다."

숙소에 도착해 TV로 확인하고서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에서 '지금 당장' 서독 방문이 가능하다는 발언을 한 이후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장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말실수가 부른 장벽 붕괴…"폭력 없어 다행"

"지금 당장 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다"라는 샤보브스키의 발언은 분명 실수였다. 모드로 전 총리는 여행 자유화 관련 조치는 다음날인 10일 오전 5시 발표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경찰서에서 출국 또는 서독 방문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밑에 '엠바고 11월 10일 05시'라고 써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발표가 났을 때 주민들이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도록 하는 절차였습니다. 에곤 크렌츠(당시 공산당 서기장)가 샤보브스키에게 그 문건을 전달했는데, 두 사람 다 그 메모를 읽지 않았습니다."

샤보브스키 대변인은 사실 전날까지 휴가를 갔다가 기자회견 당일 복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언제부터 조치가 시행되느냐?"는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에, 얼떨결에 "지금 당장"이라고 답한 것이다.

샤보브스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11월 9일 기자회견 당시 메모샤보브스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11월 9일 기자회견 당시 메모

동독 정부의 당초 구상은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해 주민 불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허용할 계획은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여권과 함께 출국비자가 있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기자회견은 끝났고 독일 국내외 언론이 샤보브스키의 발언을 보도하자 수많은 사람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세계적인 사건이 우연으로 시작된 경우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조치를 발표하고 국경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통보를 받지 않은 상황이고, 이로 인해 아주 즉흥적인 순간이 발생합니다. 수천 명이 이를 듣고 국경을 찾아갔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계속 회의 중일 때 국경 책임자들이, 특히 베를린 본홀머 슈트라세에서 밤 9시쯤 '국경을 열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모드로 전 총리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폭력사태가 나지 않은 건 국경 경비대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국경 경비대가 즉흥적으로 개방을 결정해서 혼돈을 막았습니다. 국경에서 그 사람들이 책임지고 국경을 실질적으로 개방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정치인 샤보브스키, 크렌츠, 모드로나 다른 사람이 개방한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행동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합니다."

'새로운 책임감'…콜 총리와 통일방안 협상

예상 못 한 국경 개방의 당혹감, 무력 충돌이 벌어지지 않은 데 대해 안도감, 그다음 동독 총리에게 엄습한 건 새로운 책임감이었다.

"동독의 총리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법, 새로운 규정이 생기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장 하나의 질문부터 풀어야 했습니다. 어떤 국경 통과지점을 더 열 것인가?"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나는 모드로-콜 총리(1989년 12월 22일)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나는 모드로-콜 총리(1989년 12월 22일)

모드로 총리는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나 굳게 손을 맞잡았다. 국경을 열어 더 큰 혼란을 막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콜 총리와 5차례 만나 동서독 통일방안을 협의했다.

"1989년 1월 중순에 저는 이미 서독과의 통일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고, 정치적으로 전승국가와 독일이 협상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드로 총리의 구상은 3단계 통합이었다. 모드로는 이 과정을 '1단계 계약공동체, 2단계 외교정책의 공통점을 포함한 동맹, 3단계 연방제'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 3~4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저는 계획경제에서 사회적인 시장경제로 점진적으로 바뀌는 것을 원했습니다. 콜은 빠른 템포를 원했고, 다른 원칙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산업 재개발과 발전을 원했지만, 콜의 원칙은 즉각적인 민영화였습니다."

모드로 총리의 구상과 달리 동서독은 급속한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고, 불과 11개월 뒤 재통일을 달성했다. 모드로 총리는 통일과정에서 동독의 교육·보건제도 등이 해체되고, 주민들의 주택 소유권이 유지되지 않은 점, 학위나 연구논문 등이 인정되지 않은 점 등을 크게 아쉬워했다.

독일 베를린장벽과 한반도 DMZ독일 베를린장벽과 한반도 DMZ

통일의 전제조건 '신뢰'와 '화해'

"통일이 되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겨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는 화해가 있어야 하고, 대립상태가 몇 세대를 거쳐 계속 유지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던 통일의 기반이었습니다."

모드로 전 총리는 최근 옛 동독지역 지방선거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이 득세하는 현상의 원인을, 신뢰 부재와 대립 심화에서 찾았다. 통일은 됐지만, 동서독 간 신뢰의 기반이 약했고 대립이 계속 남은 탓에 동독시민의 박탈감을 활용해 대안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모드로 전 총리는 한반도 화합과 통일에 대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남북 간의 이해를 넓히고 동계올림픽, 독일에서 열린 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 단일팀과 같은 작은 걸음을 이어가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어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국, 즉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드로 전 총리는 독일은 한국과 북한 모두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라며, 독일 정부가 남북한 통일문제에도 외교적 기여를 더 하도록 국회를 통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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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9 07:01:02
    • 수정2019-11-09 09: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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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베를린장벽 붕괴의 산 증인을 만나 한반도 통일의 시사점을 모색해 보는 시간. 오늘은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독 공산당 정권의 마지막 총리를 맡아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통일방안을 논의했던 한스 모드로 전 총리의 이야기다. 1928년생인 모드로 전 총리는 올해 91세다. 현재 독일 좌파당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강연과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왕성한 정치·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독 총리도 몰랐던 '베를린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 동독 통일사회당 중앙위원회는 온종일 회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날부터 사흘 일정으로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회의가 진행됐다. 첫날 회의에서 후임 총리 후보로 임명된 한스 모드로도 역시 당일 저녁 9시까지 지속된 회의에 참석했다. 9시 반쯤 회의장에서 나와 숙소로 가던 모드로 전 총리에게 한 청년이 다가왔다.

"국경이 열렸습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죠?"
"분명히 들었습니다. 국경이 개방됐다고…"
"그래서 어디로 가죠?"
"저도 건너가고 싶습니다."

숙소에 도착해 TV로 확인하고서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에서 '지금 당장' 서독 방문이 가능하다는 발언을 한 이후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장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말실수가 부른 장벽 붕괴…"폭력 없어 다행"

"지금 당장 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다"라는 샤보브스키의 발언은 분명 실수였다. 모드로 전 총리는 여행 자유화 관련 조치는 다음날인 10일 오전 5시 발표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경찰서에서 출국 또는 서독 방문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밑에 '엠바고 11월 10일 05시'라고 써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발표가 났을 때 주민들이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도록 하는 절차였습니다. 에곤 크렌츠(당시 공산당 서기장)가 샤보브스키에게 그 문건을 전달했는데, 두 사람 다 그 메모를 읽지 않았습니다."

샤보브스키 대변인은 사실 전날까지 휴가를 갔다가 기자회견 당일 복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언제부터 조치가 시행되느냐?"는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에, 얼떨결에 "지금 당장"이라고 답한 것이다.

샤보브스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11월 9일 기자회견 당시 메모
동독 정부의 당초 구상은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해 주민 불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허용할 계획은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여권과 함께 출국비자가 있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기자회견은 끝났고 독일 국내외 언론이 샤보브스키의 발언을 보도하자 수많은 사람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세계적인 사건이 우연으로 시작된 경우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조치를 발표하고 국경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통보를 받지 않은 상황이고, 이로 인해 아주 즉흥적인 순간이 발생합니다. 수천 명이 이를 듣고 국경을 찾아갔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계속 회의 중일 때 국경 책임자들이, 특히 베를린 본홀머 슈트라세에서 밤 9시쯤 '국경을 열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모드로 전 총리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폭력사태가 나지 않은 건 국경 경비대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국경 경비대가 즉흥적으로 개방을 결정해서 혼돈을 막았습니다. 국경에서 그 사람들이 책임지고 국경을 실질적으로 개방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정치인 샤보브스키, 크렌츠, 모드로나 다른 사람이 개방한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행동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합니다."

'새로운 책임감'…콜 총리와 통일방안 협상

예상 못 한 국경 개방의 당혹감, 무력 충돌이 벌어지지 않은 데 대해 안도감, 그다음 동독 총리에게 엄습한 건 새로운 책임감이었다.

"동독의 총리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법, 새로운 규정이 생기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장 하나의 질문부터 풀어야 했습니다. 어떤 국경 통과지점을 더 열 것인가?"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나는 모드로-콜 총리(1989년 12월 22일)
모드로 총리는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나 굳게 손을 맞잡았다. 국경을 열어 더 큰 혼란을 막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콜 총리와 5차례 만나 동서독 통일방안을 협의했다.

"1989년 1월 중순에 저는 이미 서독과의 통일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고, 정치적으로 전승국가와 독일이 협상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드로 총리의 구상은 3단계 통합이었다. 모드로는 이 과정을 '1단계 계약공동체, 2단계 외교정책의 공통점을 포함한 동맹, 3단계 연방제'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 3~4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저는 계획경제에서 사회적인 시장경제로 점진적으로 바뀌는 것을 원했습니다. 콜은 빠른 템포를 원했고, 다른 원칙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산업 재개발과 발전을 원했지만, 콜의 원칙은 즉각적인 민영화였습니다."

모드로 총리의 구상과 달리 동서독은 급속한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고, 불과 11개월 뒤 재통일을 달성했다. 모드로 총리는 통일과정에서 동독의 교육·보건제도 등이 해체되고, 주민들의 주택 소유권이 유지되지 않은 점, 학위나 연구논문 등이 인정되지 않은 점 등을 크게 아쉬워했다.

독일 베를린장벽과 한반도 DMZ
통일의 전제조건 '신뢰'와 '화해'

"통일이 되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겨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는 화해가 있어야 하고, 대립상태가 몇 세대를 거쳐 계속 유지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던 통일의 기반이었습니다."

모드로 전 총리는 최근 옛 동독지역 지방선거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이 득세하는 현상의 원인을, 신뢰 부재와 대립 심화에서 찾았다. 통일은 됐지만, 동서독 간 신뢰의 기반이 약했고 대립이 계속 남은 탓에 동독시민의 박탈감을 활용해 대안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모드로 전 총리는 한반도 화합과 통일에 대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남북 간의 이해를 넓히고 동계올림픽, 독일에서 열린 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 단일팀과 같은 작은 걸음을 이어가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어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국, 즉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드로 전 총리는 독일은 한국과 북한 모두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라며, 독일 정부가 남북한 통일문제에도 외교적 기여를 더 하도록 국회를 통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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