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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칼에 딸을 잃은 시골 선비의 임진왜란
입력 2019.11.11 (07:00) 취재K
왜적의 칼에 딸을 잃은 시골 선비의 임진왜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절개를 지켜서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감탄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송상현의 유골을 동문 밖에다 묻어 주고, 말뚝을 세워서 충신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적이 서문을 넘어오니 사졸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지만 송 부사께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꼿꼿이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남문에 돌입한 왜적 다섯이 송 부사의 목을 베어서 깃발 위에 내걸었습니다. 그러고는 깃발로 송 부사의 머리를 말아서 왜적 장수에게 달려가 바쳤습니다" 했다. 죽음에 임해서도 변하지 않은 그의 절개는 옛날 절의를 지킨 선비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다. 듣자마자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했다.

어느 시골 선비의 일기 내용입니다. 동래성이 함락된 건 1592년 4월 15일이었죠. 그런데 이 선비는 그로부터 2년 8월이나 지난 뒤에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송상현의 순국에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듬해 3월에 동래성 전투에 참가했던 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기에 또 쓰면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고 했을 정도이니까요.

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년, 비단에 수묵담채. 145×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년, 비단에 수묵담채. 145×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이 일기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경남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정경운(鄭慶雲, 1556~?)이란 분입니다. 평생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끝내 출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시골 선비였죠. 하지만 그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뜻하지 않은 전란이 일어나자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스승을 따라 의병 활동에 적잖은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업적은 이 분이 쓴 일기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부터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 10월까지 무려 18년간 일기를 씁니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 흔히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꼽는데요. 생생함과 현장감이란 측면에서 이 평범한 시골 선비가 써내려간 일기는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는 '비범한' 기록입니다.

평범한 선비가 쓴 비범한 기록 《고대일록》

일기의 제목 《고대일록 孤臺日錄》에서 고대(孤臺)는 정경운이 살던 마을 냇가의 큰 바위 이름을 따다 붙인 정경운의 호(號)입니다. 일록(日錄)은 일기(日記)와 같은 말이죠. 현재 남아 있는 정경운의 일기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4월 20일에 시작합니다. "왜적이 우리 땅에 쳐들어왔다." 당시 나이 서른일곱이었습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고, 정경운은 함양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아 동분서주합니다. 글 쓰는 선비였기에 편지부터 상소문까지 각종 문서 작성도 도맡아 하게 되죠. 그런 와중에도 일기 쓰는 일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니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그 도저한 기록정신은 지독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크고 작은 규모의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남북이 가로막히고 소식이 단절돼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듣고 본 대로 먼저 기록해 뒷날의 참고사항으로 대비해 두고자 한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으니 보고 들은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럼에도 당시의 전황이라든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소식, 각 지역 의병의 활약상 등을 들은 대로 자세하게, 빠짐없이 적어 나갔습니다. 심지어 마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피난길에 올라야 했는데도 일기만은 단 한 줄이라도 날마다 꾸준히 써나갔죠. 자신이 천생 선비였음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고까지도 묵묵히 기록했습니다.

집에 있는데 편전을 쏘고 싶어서 후원에서 활쏘기를 연습했다. 그런데 잘못해서 왼손을 맞혔다. 화살이 팔목에서부터 가운뎃손가락을 꿰뚫었다. 왼손이 말라 비틀어질까 봐 큰 걱정이다. 이게 모두 왜적한테서 온 피해다. 참으로 이 도둑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활쏘기를 익히겠는가.

평생 책 읽고 글 쓰며 살아온 선비가 오죽 답답하고 화가 났으면 활쏘기 연습을 하겠다고 나섰을까요. 아무튼, 정경운은 그 뒤로 전쟁 내내 의병 모집과 군수품 지원 등의 역할을 맡아 부단히 애를 씁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가뜩이나 피폐해진 백성들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횡포와 수탈로 벼랑 끝까지 내몰립니다.

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doopedia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doopedia

낙방 또 낙방…번번이 좌절되는 출사의 꿈

전쟁통에도 시골 선비 정경운은 출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시험을 보는 족족 낙방하고 말죠. 1594년 11월에는 과거 보러 함께 가자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그 덕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수도 한양의 실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일기에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도성에 들어가 보니 도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인가는 불타서 100집 가운데 한 집도 남지 않았다. 쑥대만이 눈에 꽉 차서 비참한 마음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슬프다. 우리나라 200년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부서져서 남은 자취가 없었다. 한낱 벼슬 없는 선비가 이제 와서 보니 서리지탄(黍離之歎)을 금하기 어렵구나.

일기를 읽어보면 임금 앞에 나아가는 꿈을 꿨다는 내용도 꽤 많이 보입니다. 그만큼 과거 급제를 간절하게 바란 것이겠죠. 하지만 또다시 낙방. 고향으로 돌아온 정경운은 의병들을 먹이기 위한 군량미를 모으면서 향교와 서원을 돌보는 일에도 힘을 쏟습니다. 그러던 1597년 8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쳐부순 왜군이 함양에 들이닥칩니다.

조카가 산에서 큰딸 정아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반 넘게 잘려서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다. 차고 있던 장도칼과 손 놓인 것이 모두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완연했다. 슬프다, 내 딸이 여기서 이렇게 죽다니. (중략) 시종 함께 데리고 피란하다가 딸자식 하나 구하지 못해서 흉악한 칼날 아래 죽게 했으니, 뒷날 저승에서 만나면 내가 참으로 부끄러워 무슨 낯으로 너를 위로할까?

전쟁이 초래한 수많은 죽음에서 정경운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들과 막내딸을 병으로 잃고, 노비들도 하나둘 죽어 나가고, 급기야 맏딸을 왜적의 칼에 잃었으니 그 아픔,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 뒤로 하나 남은 아들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희망을 찾기 힘든 절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정경운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서원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고, 1617년에는 남계서원 원장에 올랐다.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정경운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서원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고, 1617년에는 남계서원 원장에 올랐다.

먹을거리를 구걸하고 소금과 생선 장사에 나서다

그런 숱한 죽음들 속에서도 산목숨은 부지해야 했으니, 양반이었음에도 먹을거리를 구걸하러 다녀야 할 만큼 지독한 가난은 계속됩니다. 급기야 1598년 7월, 시골 선비 정경운은 소금 장사에 나섭니다. 길에서 노숙해가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소금을 팔러 다니죠. 소금도 팔고 무명도 팔고 생선도 끊어다가 팝니다.

언제 끝나나 싶은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고, 딸이 죽고 머슴이 죽고 과거에 낙방하는 시골 선비의 일상은 예전처럼 이어집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했던 선비는 더 큰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활짝 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죠. 정경운의 일기는 광해군이 즉위한 해인 1609년 10월 27일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고대일록》이 발견됐음을 알린 〈동아일보〉 1986년 4월 15일 기사《고대일록》이 발견됐음을 알린 〈동아일보〉 1986년 4월 15일 기사

《고대일록》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1900년대 초에 정경운의 8대손이 원본을 필사했고, 9대손 시절에 함양에 큰불이 나서 원본이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남아 있는 필사본을 정경운의 스승이었던 정인홍의 자손이 6부를 복사했고, 1980년대 중반에야 이 복사본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출판사 서해문집에서 2016년에 펴낸 겁니다. 흥미롭게도 옮긴이가 두 사람이더군요.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우연히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5년 넘게 번역에 매달리다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채 완성되지 않은 번역 원고를 발견하게 되죠. 아들은 그 원고를 다시 읽고 매만지고 다듬어 아버지의 유산을 완성합니다. 앞서 간 분들의 뜻을 이어가는 글쓰기의 소중함을 깨달은 독서였습니다.

  • 왜적의 칼에 딸을 잃은 시골 선비의 임진왜란
    • 입력 2019.11.11 (07:00)
    취재K
왜적의 칼에 딸을 잃은 시골 선비의 임진왜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절개를 지켜서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감탄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송상현의 유골을 동문 밖에다 묻어 주고, 말뚝을 세워서 충신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적이 서문을 넘어오니 사졸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지만 송 부사께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꼿꼿이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남문에 돌입한 왜적 다섯이 송 부사의 목을 베어서 깃발 위에 내걸었습니다. 그러고는 깃발로 송 부사의 머리를 말아서 왜적 장수에게 달려가 바쳤습니다" 했다. 죽음에 임해서도 변하지 않은 그의 절개는 옛날 절의를 지킨 선비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다. 듣자마자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했다.

어느 시골 선비의 일기 내용입니다. 동래성이 함락된 건 1592년 4월 15일이었죠. 그런데 이 선비는 그로부터 2년 8월이나 지난 뒤에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송상현의 순국에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듬해 3월에 동래성 전투에 참가했던 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기에 또 쓰면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고 했을 정도이니까요.

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년, 비단에 수묵담채. 145×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년, 비단에 수묵담채. 145×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이 일기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경남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정경운(鄭慶雲, 1556~?)이란 분입니다. 평생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끝내 출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시골 선비였죠. 하지만 그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뜻하지 않은 전란이 일어나자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스승을 따라 의병 활동에 적잖은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업적은 이 분이 쓴 일기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부터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 10월까지 무려 18년간 일기를 씁니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 흔히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꼽는데요. 생생함과 현장감이란 측면에서 이 평범한 시골 선비가 써내려간 일기는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는 '비범한' 기록입니다.

평범한 선비가 쓴 비범한 기록 《고대일록》

일기의 제목 《고대일록 孤臺日錄》에서 고대(孤臺)는 정경운이 살던 마을 냇가의 큰 바위 이름을 따다 붙인 정경운의 호(號)입니다. 일록(日錄)은 일기(日記)와 같은 말이죠. 현재 남아 있는 정경운의 일기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4월 20일에 시작합니다. "왜적이 우리 땅에 쳐들어왔다." 당시 나이 서른일곱이었습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고, 정경운은 함양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아 동분서주합니다. 글 쓰는 선비였기에 편지부터 상소문까지 각종 문서 작성도 도맡아 하게 되죠. 그런 와중에도 일기 쓰는 일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니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그 도저한 기록정신은 지독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크고 작은 규모의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남북이 가로막히고 소식이 단절돼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듣고 본 대로 먼저 기록해 뒷날의 참고사항으로 대비해 두고자 한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으니 보고 들은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럼에도 당시의 전황이라든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소식, 각 지역 의병의 활약상 등을 들은 대로 자세하게, 빠짐없이 적어 나갔습니다. 심지어 마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피난길에 올라야 했는데도 일기만은 단 한 줄이라도 날마다 꾸준히 써나갔죠. 자신이 천생 선비였음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고까지도 묵묵히 기록했습니다.

집에 있는데 편전을 쏘고 싶어서 후원에서 활쏘기를 연습했다. 그런데 잘못해서 왼손을 맞혔다. 화살이 팔목에서부터 가운뎃손가락을 꿰뚫었다. 왼손이 말라 비틀어질까 봐 큰 걱정이다. 이게 모두 왜적한테서 온 피해다. 참으로 이 도둑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활쏘기를 익히겠는가.

평생 책 읽고 글 쓰며 살아온 선비가 오죽 답답하고 화가 났으면 활쏘기 연습을 하겠다고 나섰을까요. 아무튼, 정경운은 그 뒤로 전쟁 내내 의병 모집과 군수품 지원 등의 역할을 맡아 부단히 애를 씁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가뜩이나 피폐해진 백성들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횡포와 수탈로 벼랑 끝까지 내몰립니다.

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doopedia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doopedia

낙방 또 낙방…번번이 좌절되는 출사의 꿈

전쟁통에도 시골 선비 정경운은 출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시험을 보는 족족 낙방하고 말죠. 1594년 11월에는 과거 보러 함께 가자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그 덕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수도 한양의 실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일기에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도성에 들어가 보니 도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인가는 불타서 100집 가운데 한 집도 남지 않았다. 쑥대만이 눈에 꽉 차서 비참한 마음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슬프다. 우리나라 200년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부서져서 남은 자취가 없었다. 한낱 벼슬 없는 선비가 이제 와서 보니 서리지탄(黍離之歎)을 금하기 어렵구나.

일기를 읽어보면 임금 앞에 나아가는 꿈을 꿨다는 내용도 꽤 많이 보입니다. 그만큼 과거 급제를 간절하게 바란 것이겠죠. 하지만 또다시 낙방. 고향으로 돌아온 정경운은 의병들을 먹이기 위한 군량미를 모으면서 향교와 서원을 돌보는 일에도 힘을 쏟습니다. 그러던 1597년 8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쳐부순 왜군이 함양에 들이닥칩니다.

조카가 산에서 큰딸 정아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반 넘게 잘려서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다. 차고 있던 장도칼과 손 놓인 것이 모두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완연했다. 슬프다, 내 딸이 여기서 이렇게 죽다니. (중략) 시종 함께 데리고 피란하다가 딸자식 하나 구하지 못해서 흉악한 칼날 아래 죽게 했으니, 뒷날 저승에서 만나면 내가 참으로 부끄러워 무슨 낯으로 너를 위로할까?

전쟁이 초래한 수많은 죽음에서 정경운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들과 막내딸을 병으로 잃고, 노비들도 하나둘 죽어 나가고, 급기야 맏딸을 왜적의 칼에 잃었으니 그 아픔,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 뒤로 하나 남은 아들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희망을 찾기 힘든 절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정경운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서원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고, 1617년에는 남계서원 원장에 올랐다.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정경운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서원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고, 1617년에는 남계서원 원장에 올랐다.

먹을거리를 구걸하고 소금과 생선 장사에 나서다

그런 숱한 죽음들 속에서도 산목숨은 부지해야 했으니, 양반이었음에도 먹을거리를 구걸하러 다녀야 할 만큼 지독한 가난은 계속됩니다. 급기야 1598년 7월, 시골 선비 정경운은 소금 장사에 나섭니다. 길에서 노숙해가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소금을 팔러 다니죠. 소금도 팔고 무명도 팔고 생선도 끊어다가 팝니다.

언제 끝나나 싶은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고, 딸이 죽고 머슴이 죽고 과거에 낙방하는 시골 선비의 일상은 예전처럼 이어집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했던 선비는 더 큰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활짝 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죠. 정경운의 일기는 광해군이 즉위한 해인 1609년 10월 27일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고대일록》이 발견됐음을 알린 〈동아일보〉 1986년 4월 15일 기사《고대일록》이 발견됐음을 알린 〈동아일보〉 1986년 4월 15일 기사

《고대일록》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1900년대 초에 정경운의 8대손이 원본을 필사했고, 9대손 시절에 함양에 큰불이 나서 원본이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남아 있는 필사본을 정경운의 스승이었던 정인홍의 자손이 6부를 복사했고, 1980년대 중반에야 이 복사본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출판사 서해문집에서 2016년에 펴낸 겁니다. 흥미롭게도 옮긴이가 두 사람이더군요.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우연히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5년 넘게 번역에 매달리다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채 완성되지 않은 번역 원고를 발견하게 되죠. 아들은 그 원고를 다시 읽고 매만지고 다듬어 아버지의 유산을 완성합니다. 앞서 간 분들의 뜻을 이어가는 글쓰기의 소중함을 깨달은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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