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겸손했지만 안 겸손했던 日’…WTO 2차 양자협의 ‘취재 썰’

입력 2019.11.22 (07:00) 수정 2019.11.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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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준비 잘 됐습니다."

우리시간으로 지난 19일 오후, WTO 2차 양자협의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 협의 개시 10여 분을 앞두고 양국 대표단이 차례로 WTO에 도착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협상장으로 향한 일본 대표단. 반면 한국 대표단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였습니다.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협상은 어땠을까요?

언제나 그랬듯 일본 대표단은 이번에도 겸손해 보였습니다.

지난 7월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를 정부가 WTO에 제소하면서 한일 양자협의는 시작됐습니다. 지난달 1차 협의에 이어 지난 19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 WTO에서 2차 양자협의가 열렸습니다.

현지시각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돼 오후 6시 반까지 9시간 가까이 양측 협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협의를 마친 뒤 양국이 조율한 언론 발표문을 들고 브리핑 자리에 선 일본 대표단. 이번에도 '결론이 없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취재진이 향후 전망에 대해 질문을 쏟아내자 구로다 준이치로 일본 경제산업성 다자통상체제국장이 내놓은 답변이 바로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였습니다.

듣는 순간, 참 겸손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틀림없이 양국 입장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을 텐데, 정작 일본 측 대표단이 내놓은 향후 절차에 대한 공식 답변은 그저 '한국의 결정을 기다리겠다'였습니다.

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구로다 준이치로 일본 경제산업성 다자통상체제국장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구로다 준이치로 일본 경제산업성 다자통상체제국장

말은 겸손했지만 주장은 변하지 않았던 日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처럼 정말 일본은 협의에서도 겸손했을까요? 그런데, 협상 과정과 결과를 보면 말만 겸손하다는 게 제네바에서 직접 취재한 제 결론입니다.

한일 양국 대표단은 오후 1시 반쯤 오전 회의를 끝내고, 휴식시간 그러니까 점심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가장 궁금했던 건 협상장 초반 분위기. 그런데 협상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일 양국 대표단의 의견은 1차 협의 때처럼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일본 대표단의 주장은 수출규제를 시작할 때도, 1차 협의 때도, 그리고 이번 2차 협의까지 하나도 바뀐 게 없었습니다. 우리의 결정을 기다린다고 겸손하게 말할 뿐, 실제론 일방적인 수출 규제를 발표했던 지난 7월과 달라진 게 없었던 겁니다.

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

6시간씩 두 번 협의했지만 꿈쩍도 않는 일본

이런 분위기는 한국 대표단의 브리핑에서도 그대로 읽혔습니다.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에 나선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은 "양국 간에 2차례에 걸쳐서 6시간 씩 집중적인 협의를 했습니다. 서로의 조치와 입장에 대해서 서로 인식하는 폭이 많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평가하기에 양측의 기존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갑작스런 수출규제에 대한 부당성, 그리고 일본이 규제 근거로 든 '안보상 이유'에 대해 일본이 제시한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계속해 항의했지만 일본이 말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KBS와 인터뷰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KBS와 인터뷰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

공식 브리핑을 마치고 KBS 취재진과 따로 만난 대표단은 향후 전망에 대해선 장기전이 될 가능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해관 협력관은 "지금처럼 일본 측과 조기 해결 방안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 된다면 패널 절차로 가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옵션이라고 봐야 되는 건 분명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 양국 상황과 관련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통상 분쟁이 발생해 제소국이 WTO에 제소하면, 공식 양자협의 기간은 60일입니다. 양국이 협의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합의할 경우 양자협의 기간을 더 길게 가져갈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정해관 협력관의 설명처럼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3차 양자협의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제네바에서 만난 대표단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협의를 위한 협의를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양자협의를 종료하면 다음 순서는 WTO 본격 재판 절차입니다. 정부는 WTO에 패널 설치를 요청할 수 있는데 재판으로 치면 1심에 해당하는 절차가 시작되는 겁니다.

다만, 정해관 협력관은 향후 전망을 두고 일본 측 태도에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일본 대표의 말 '한국의 결정의 기다리겠습니다'를 의미있게 평가한 겁니다. 정 협력관은 "아직 협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브리핑에서 '우리는 재판에 대비하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닫아버린 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은 우리가 하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일 양자협의를 앞두고 WTO 협상장 앞에서 양국 대표단을 기다리는 일본 취재진한일 양자협의를 앞두고 WTO 협상장 앞에서 양국 대표단을 기다리는 일본 취재진

"기자 숫자 차이 무엇? 이게 국력 차이인가요?" 그래도 단단했던 대표단

스위스 제네바 현장 취재를 다녀온 진짜 '썰'입니다. 양국 협상 시작은 오전 10시. 양국 협상단의 입장을 촬영하기 위해 9시에 WTO 건물 앞 포토라인으로 갔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야외라면 한 시간 일찍 가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9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일본 기자들이 5-6명은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하나, 둘 몰려들더니 나중엔 일본 매체 기자만 20명은 돼 보였습니다.

브리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브리핑은 물론 한국 대표단의 브리핑 현장에서도 한국 기자보다는 일본 기자가 다섯 배는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방송매체는 KBS 저희 뿐이었습니다. '기자 숫자부터 국력 차이 실감하는 건가? 이거 실화인가?' 당장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현장 취재를 도움 받으려 연락한 특파원 기자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상 한국에서 나와 보면 말이야. 어디를 가든 일본은 많아. 취재기자도 많고 촬영기자도 많아. 좀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느끼지. 이번에 느꼈지? 그런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잘 취재하고 열심히 취재하고 돌아가면 된다."

다행인 건 한국 대표단의 표정이었습니다. 양자협의장을 들어갈 때도, 협의를 마치고 나와 브리핑을 할 때도 대표단은 일본 대표단 보다 시종일관 여유있고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WTO 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WTO 승소' 때 처럼 승리를 기대하게 되는 이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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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겸손했지만 안 겸손했던 日’…WTO 2차 양자협의 ‘취재 썰’
    • 입력 2019-11-22 07:00:54
    • 수정2019-11-22 11:28:16
    취재후·사건후
"협상 준비 잘 됐습니다."

우리시간으로 지난 19일 오후, WTO 2차 양자협의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 협의 개시 10여 분을 앞두고 양국 대표단이 차례로 WTO에 도착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협상장으로 향한 일본 대표단. 반면 한국 대표단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였습니다.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협상은 어땠을까요?

언제나 그랬듯 일본 대표단은 이번에도 겸손해 보였습니다.

지난 7월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를 정부가 WTO에 제소하면서 한일 양자협의는 시작됐습니다. 지난달 1차 협의에 이어 지난 19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 WTO에서 2차 양자협의가 열렸습니다.

현지시각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돼 오후 6시 반까지 9시간 가까이 양측 협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협의를 마친 뒤 양국이 조율한 언론 발표문을 들고 브리핑 자리에 선 일본 대표단. 이번에도 '결론이 없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취재진이 향후 전망에 대해 질문을 쏟아내자 구로다 준이치로 일본 경제산업성 다자통상체제국장이 내놓은 답변이 바로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였습니다.

듣는 순간, 참 겸손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틀림없이 양국 입장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을 텐데, 정작 일본 측 대표단이 내놓은 향후 절차에 대한 공식 답변은 그저 '한국의 결정을 기다리겠다'였습니다.

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구로다 준이치로 일본 경제산업성 다자통상체제국장
말은 겸손했지만 주장은 변하지 않았던 日

"한국 측 검토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처럼 정말 일본은 협의에서도 겸손했을까요? 그런데, 협상 과정과 결과를 보면 말만 겸손하다는 게 제네바에서 직접 취재한 제 결론입니다.

한일 양국 대표단은 오후 1시 반쯤 오전 회의를 끝내고, 휴식시간 그러니까 점심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가장 궁금했던 건 협상장 초반 분위기. 그런데 협상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일 양국 대표단의 의견은 1차 협의 때처럼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일본 대표단의 주장은 수출규제를 시작할 때도, 1차 협의 때도, 그리고 이번 2차 협의까지 하나도 바뀐 게 없었습니다. 우리의 결정을 기다린다고 겸손하게 말할 뿐, 실제론 일방적인 수출 규제를 발표했던 지난 7월과 달라진 게 없었던 겁니다.

지난 19일, 한일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
6시간씩 두 번 협의했지만 꿈쩍도 않는 일본

이런 분위기는 한국 대표단의 브리핑에서도 그대로 읽혔습니다. 2차 양자협의 결과 브리핑에 나선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은 "양국 간에 2차례에 걸쳐서 6시간 씩 집중적인 협의를 했습니다. 서로의 조치와 입장에 대해서 서로 인식하는 폭이 많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평가하기에 양측의 기존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갑작스런 수출규제에 대한 부당성, 그리고 일본이 규제 근거로 든 '안보상 이유'에 대해 일본이 제시한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계속해 항의했지만 일본이 말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KBS와 인터뷰 중인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
공식 브리핑을 마치고 KBS 취재진과 따로 만난 대표단은 향후 전망에 대해선 장기전이 될 가능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해관 협력관은 "지금처럼 일본 측과 조기 해결 방안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 된다면 패널 절차로 가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옵션이라고 봐야 되는 건 분명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 양국 상황과 관련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통상 분쟁이 발생해 제소국이 WTO에 제소하면, 공식 양자협의 기간은 60일입니다. 양국이 협의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합의할 경우 양자협의 기간을 더 길게 가져갈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정해관 협력관의 설명처럼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3차 양자협의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제네바에서 만난 대표단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협의를 위한 협의를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양자협의를 종료하면 다음 순서는 WTO 본격 재판 절차입니다. 정부는 WTO에 패널 설치를 요청할 수 있는데 재판으로 치면 1심에 해당하는 절차가 시작되는 겁니다.

다만, 정해관 협력관은 향후 전망을 두고 일본 측 태도에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일본 대표의 말 '한국의 결정의 기다리겠습니다'를 의미있게 평가한 겁니다. 정 협력관은 "아직 협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브리핑에서 '우리는 재판에 대비하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닫아버린 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은 우리가 하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일 양자협의를 앞두고 WTO 협상장 앞에서 양국 대표단을 기다리는 일본 취재진
"기자 숫자 차이 무엇? 이게 국력 차이인가요?" 그래도 단단했던 대표단

스위스 제네바 현장 취재를 다녀온 진짜 '썰'입니다. 양국 협상 시작은 오전 10시. 양국 협상단의 입장을 촬영하기 위해 9시에 WTO 건물 앞 포토라인으로 갔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야외라면 한 시간 일찍 가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9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일본 기자들이 5-6명은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하나, 둘 몰려들더니 나중엔 일본 매체 기자만 20명은 돼 보였습니다.

브리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브리핑은 물론 한국 대표단의 브리핑 현장에서도 한국 기자보다는 일본 기자가 다섯 배는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방송매체는 KBS 저희 뿐이었습니다. '기자 숫자부터 국력 차이 실감하는 건가? 이거 실화인가?' 당장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현장 취재를 도움 받으려 연락한 특파원 기자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상 한국에서 나와 보면 말이야. 어디를 가든 일본은 많아. 취재기자도 많고 촬영기자도 많아. 좀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느끼지. 이번에 느꼈지? 그런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잘 취재하고 열심히 취재하고 돌아가면 된다."

다행인 건 한국 대표단의 표정이었습니다. 양자협의장을 들어갈 때도, 협의를 마치고 나와 브리핑을 할 때도 대표단은 일본 대표단 보다 시종일관 여유있고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WTO 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WTO 승소' 때 처럼 승리를 기대하게 되는 이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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