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같은 판사에게 전화가 와 “왜 소송해요?”라니…

입력 2019.11.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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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이 전화해서 '너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한 통근 버스 기사의 임금 체불 사건을 변호하게 된 최정규 변호사. 최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6년 동안 일하고 퇴직한 버스 기사가 회사로부터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고 노동청에 진정한 사건인데요. 노동청의 시정 명령으로 임금 170만 원과 퇴직금 천2백만 원을 받게 됐지만, 받지 못한 임금이 더 있다고 주장하면서 2017년 11월, 민사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못 받은 임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면 임금 대장 등 회사로부터 자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천만 원을 청구하는 '소액 사건'으로 소송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려 자료를 받은 뒤, 이를 바탕으로 금액을 확정하려 한 것이지요.

최 변호사가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임금을 계산해보니, 받지 못한 돈은 약 3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초 '소액 사건'에서 청구 금액이 2천만 원을 초과하는 '중액 사건'이 되면서 사건은 수원지방법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그런 뒤 첫 재판 이틀 전, 담당 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겁니다.


지난 15일 '검사의 고소 취소 종용' 보도(아래 [연관기사] 참고)를 보고 제보를 결심했다는 최 변호사는 "판사가 왜 이런 전화를 했을까? 이 재판이 불공정하게 흐를 수 있겠다라는 어떤 걱정이 많이 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연관 기사] "검사가 고소 취소 종용”…현직 검사 부적절 처신 논란 KBS1TV '뉴스9' (2019.11.15.)

또 "법조인 생활을 한 2003년부터 올해까지 재판 절차에 대한 협조를 위해 전화를 받아본 적은 있지만, 이런 식의 전화를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판사가 이렇게 소송 관계인에게 전화하는 경우 자체는 자주 있는 일일까요?

다른 변호사들의 공통적인 반응도 '이례적'이라는 겁니다. 한 변호사는 "돈을 줬다는데 굳이 왜 귀찮게 하느냐, 악의적으로 소송을 건 것이 아니냐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 판사가 법정 밖에서 심증을 드러내면 공개 법정에서 변론 활동을 할 때 위축될 것"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습니다. 이충윤 대한변협 대변인은 "판사가 소송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 전화를 할 수는 있지만, 이번과 같이 소송의 취하를 종용하는 취지의 말씀을 계속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고 극히 드물다고 생각된다"며 "변호사의 정당한 변론권과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대변인은 취재팀과 헤어지기 전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판사님 입장에서 이해는 가요. 이게 정말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 최소한 해당 사안에서는 판사님이 '하느님'이거든요. 말 그대로 이 사안을 판단하는 하느님이 전화해서, '너 그거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당연히 부당하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취재팀과 함께 녹취록을 살펴본 수원지법 관계자는 "청구 금액을 높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하고, 같은 이야기를 공개 법정에서 한다면 오히려 원고에게 불이익이 될까 봐 원고를 생각해서 A 판사가 전화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안 그래도 억울한데'…임금체불 사건 편의주의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지난주 취재팀이 보도한 '고소 취소 종용한 검사'와 이 사건,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바로 둘 다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법조인들의 태도가 드러난 거였는데요.

지난주 고소 취소를 종용당했다는 제보자가 분통을 터트린 대목도 검사의 태도였습니다. 검사는 제보자의 거듭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피고소인 앞에서 '무고 판단을 해야 한다'며 여러 차례 고소를 취소하라고 했는데요. 제보자는 "당시 검사가 '금요일이라 끝나고 술 마시러 가야 하는데, 남아서 말씀드리는 건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라고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내용이 녹음돼 있었고요.

최정규 변호사는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이 임금체불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최정규 변호사는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이 임금체불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이나 검찰, 법원이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과연 내가 만약 근로자라면 얼마나 억울할까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사건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시민단체 참여연대가 지난달 발표한 '임금체불 보고서'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타났습니다. 보고서는 "임금 체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근로감독관의 '합의 종용'으로 체불 노동자가 임금 체불액의 일부만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과도한 합의 종용 문제를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임금을 받지 못했다며 사법기관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대부분 억울한 노동자들일 겁니다. 그리고 법리를 잘 모를 수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잘잘못을 판단하고 피해를 구제받을 정당한 권리도 포기하라고 말하거나, 편의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노동자들은 어디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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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느님 같은 판사에게 전화가 와 “왜 소송해요?”라니…
    • 입력 2019-11-26 08:00:49
    취재K
■ "하느님이 전화해서 '너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한 통근 버스 기사의 임금 체불 사건을 변호하게 된 최정규 변호사. 최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6년 동안 일하고 퇴직한 버스 기사가 회사로부터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고 노동청에 진정한 사건인데요. 노동청의 시정 명령으로 임금 170만 원과 퇴직금 천2백만 원을 받게 됐지만, 받지 못한 임금이 더 있다고 주장하면서 2017년 11월, 민사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못 받은 임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면 임금 대장 등 회사로부터 자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천만 원을 청구하는 '소액 사건'으로 소송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려 자료를 받은 뒤, 이를 바탕으로 금액을 확정하려 한 것이지요.

최 변호사가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임금을 계산해보니, 받지 못한 돈은 약 3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초 '소액 사건'에서 청구 금액이 2천만 원을 초과하는 '중액 사건'이 되면서 사건은 수원지방법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그런 뒤 첫 재판 이틀 전, 담당 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겁니다.


지난 15일 '검사의 고소 취소 종용' 보도(아래 [연관기사] 참고)를 보고 제보를 결심했다는 최 변호사는 "판사가 왜 이런 전화를 했을까? 이 재판이 불공정하게 흐를 수 있겠다라는 어떤 걱정이 많이 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연관 기사] "검사가 고소 취소 종용”…현직 검사 부적절 처신 논란 KBS1TV '뉴스9' (2019.11.15.)

또 "법조인 생활을 한 2003년부터 올해까지 재판 절차에 대한 협조를 위해 전화를 받아본 적은 있지만, 이런 식의 전화를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판사가 이렇게 소송 관계인에게 전화하는 경우 자체는 자주 있는 일일까요?

다른 변호사들의 공통적인 반응도 '이례적'이라는 겁니다. 한 변호사는 "돈을 줬다는데 굳이 왜 귀찮게 하느냐, 악의적으로 소송을 건 것이 아니냐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 판사가 법정 밖에서 심증을 드러내면 공개 법정에서 변론 활동을 할 때 위축될 것"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습니다. 이충윤 대한변협 대변인은 "판사가 소송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 전화를 할 수는 있지만, 이번과 같이 소송의 취하를 종용하는 취지의 말씀을 계속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고 극히 드물다고 생각된다"며 "변호사의 정당한 변론권과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대변인은 취재팀과 헤어지기 전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판사님 입장에서 이해는 가요. 이게 정말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 최소한 해당 사안에서는 판사님이 '하느님'이거든요. 말 그대로 이 사안을 판단하는 하느님이 전화해서, '너 그거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당연히 부당하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취재팀과 함께 녹취록을 살펴본 수원지법 관계자는 "청구 금액을 높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하고, 같은 이야기를 공개 법정에서 한다면 오히려 원고에게 불이익이 될까 봐 원고를 생각해서 A 판사가 전화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안 그래도 억울한데'…임금체불 사건 편의주의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지난주 취재팀이 보도한 '고소 취소 종용한 검사'와 이 사건,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바로 둘 다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법조인들의 태도가 드러난 거였는데요.

지난주 고소 취소를 종용당했다는 제보자가 분통을 터트린 대목도 검사의 태도였습니다. 검사는 제보자의 거듭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피고소인 앞에서 '무고 판단을 해야 한다'며 여러 차례 고소를 취소하라고 했는데요. 제보자는 "당시 검사가 '금요일이라 끝나고 술 마시러 가야 하는데, 남아서 말씀드리는 건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라고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내용이 녹음돼 있었고요.

최정규 변호사는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이 임금체불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임금체불 사건을 다루는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이나 검찰, 법원이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과연 내가 만약 근로자라면 얼마나 억울할까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사건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시민단체 참여연대가 지난달 발표한 '임금체불 보고서'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타났습니다. 보고서는 "임금 체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근로감독관의 '합의 종용'으로 체불 노동자가 임금 체불액의 일부만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과도한 합의 종용 문제를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임금을 받지 못했다며 사법기관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대부분 억울한 노동자들일 겁니다. 그리고 법리를 잘 모를 수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잘잘못을 판단하고 피해를 구제받을 정당한 권리도 포기하라고 말하거나, 편의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노동자들은 어디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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