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경제, 내구력 확보…제재로 굴복시키긴 어려워”

입력 2019.11.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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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비핵화협상이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북한은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를 요구한 데 이어 서해 창린도 해안포 사격으로 군사적 긴장마저 높이고 있습니다. 28일 오후에는 올 들어 13번째로 발사체까지 쐈습니다. 이대로 북미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면 북한은 도발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고, 유엔의 대북제재는 지속 내지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경제가 구조적인 변화를 거치며 상당한 내구력을 확보했고, 때문에 제재로 북한을 굴복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북한은 정말 개혁·개방을 할 생각이 있을까?"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28일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종석 전 장관은 북한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이자, 2003년부터 3년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을 거쳐 2006년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전직 고위 외교안보관료이기도 합니다. 수십 년간 북한을 연구하고 상대해 온 그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북한 국가전략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28일 오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28일 오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근 최은주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등과 함께 '제재 속의 북한경제, 밀어서 잠금해제'라는 보고서 형태의 책을 낸 그는 NSC 차장 시절이던 2005년 11월,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자문관이던 필립 젤리코와 나눴던 대화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젤리코 자문관은 "정말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북한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근과 채찍'에 있어 우리(미국)가 '당근'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즉, 북한에 당근을 줌으로써 핵 포기를 유도할 의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강압적 수단을 유지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북한의 진짜 의도가 궁금하다는 뜻이었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물론 우리 역시 여전히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정말 개혁·개방을 할 생각이 있을까? 또 그것을 위해 핵을 포기할 생각이 과연 있는 걸까?"

"북한과 협상하려면 북한의 '오늘'을 파악해야"

이 전 장관과 저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북한의 '오늘', 그간의 변화를 세밀하게 뜯어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북한이 지난해 4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가 3차 전원회의에서 기존의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 대신 '사회주의경제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채택한 데 주목합니다. 군사 중심 국가에서 경제건설중심 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했고, 그 결과 북한은 현재 최소한 하루 세끼를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내부 동력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특히 국방산업은 그동안 다른 분야에서 넘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지만, 지난해 이후로는 인민경제 발전에 종속되는 현상들이 관찰된다며 실증적인 자료들도 제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7년 4월 김정은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수백 문의 자주포와 방사포를 발사하는 등 중요 군사훈련장이었던 원산 갈마반도가 1년 만에 해안관광지구로 개발되고 있는 모습을 들었습니다. (아래 사진)


2017년 4월 북한이 원산갈마반도 해변에서 자주포 사격훈련을 하던 장면(위)과 2018년 5월 같은 곳을 해안관광지구로 개발하고 있는 모습(아래) [사진제공: 세종연구소]2017년 4월 북한이 원산갈마반도 해변에서 자주포 사격훈련을 하던 장면(위)과 2018년 5월 같은 곳을 해안관광지구로 개발하고 있는 모습(아래) [사진제공: 세종연구소]

북한 경제의 또 다른 변화의 모습은 '경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는 기업소들이 국가 계획에 맞춰 할당된 수량만큼 생산해 계약을 맺은 유통기관에 판매했던 것과 달리 김정은 시대 들어서는 각 기업이 생산할 제품의 수량과 품목을 결정하도록 하면서 동종제품 생산기업 사이 '경쟁'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 결과 소비재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부동산시장과 노동시장 등 생산요소 시장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인트라넷을 활용한 온라인쇼핑몰도 성행한다고 합니다.

이 전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처럼 과감한 경제적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도 평가했습니다. 그는 "김정일은 개방으로 나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체제가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삐걱대다가 주저앉았다"며 "그러나 김정은은 선대와 생각이 다르다"고 진단합니다. 이어 "북한이 지난해 4월 국가전략노선을 경제건설 우선으로 전환한 것은 1978년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개혁·개방을 선언했을 때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재가 北경제 타격 주는 건 맞지만, 굴복시키긴 어려워"

그럼에도 유엔의 대북제재가 북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은 이 전 장관과 저자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실제 북한은 제재로 인해 외자 유치를 전제로 하는 특수경제지대 개발은 사실상 시작도 하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먹고사는 정도의 경제발전이 아닌 '고도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이대로 제재를 계속한다면 북한을 굴복시키고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 전 장관은 "미국이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해제' 입장을 고수한다면, 제재는 북한의 경제개방 의지 자체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습니다. 북한이 제재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과도한 자력갱생을 주장하게 되고, 이는 결국 북한이 '자폐경제'로 회귀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국내외 정책결정자들에게 "유엔의 고강도 대북제재는 북한 경제에 강력한 타격을 주고 있지만, 북한은 이에 대응해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체제 내구력을 확보했다"며 "대북제재만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또 "북한의 구조적·전략적 변화를 관찰하면서 김정은이 제재 때문에 굶주린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 협상에 나온 게 아니라 고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면 외부에서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야 하니 협상에 나온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며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 우리 기존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이 대남 비난을 이어가고 군사적 긴장마저 높이면서 강경 여론이 커지는 요즘, 저명한 학자이자 전직 고위 관료가 자칫 비난받기 쉬운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먼저 "북한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하는 학문적 호기심과 학자로서의 의무"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미국의 정책이 여전히 북한의 구조적·본질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4년 전 젤리코처럼 '북한이 과연 개혁 그런 걸 하겠어?' 하는 인식이 여전하다.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정책 수립에서 혹시 조정할 부분이 없나 되돌아보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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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경제, 내구력 확보…제재로 굴복시키긴 어려워”
    • 입력 2019-11-29 07:00:13
    취재K
북미 비핵화협상이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북한은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를 요구한 데 이어 서해 창린도 해안포 사격으로 군사적 긴장마저 높이고 있습니다. 28일 오후에는 올 들어 13번째로 발사체까지 쐈습니다. 이대로 북미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면 북한은 도발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고, 유엔의 대북제재는 지속 내지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경제가 구조적인 변화를 거치며 상당한 내구력을 확보했고, 때문에 제재로 북한을 굴복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북한은 정말 개혁·개방을 할 생각이 있을까?"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28일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종석 전 장관은 북한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이자, 2003년부터 3년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을 거쳐 2006년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전직 고위 외교안보관료이기도 합니다. 수십 년간 북한을 연구하고 상대해 온 그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북한 국가전략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28일 오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근 최은주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등과 함께 '제재 속의 북한경제, 밀어서 잠금해제'라는 보고서 형태의 책을 낸 그는 NSC 차장 시절이던 2005년 11월,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자문관이던 필립 젤리코와 나눴던 대화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젤리코 자문관은 "정말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북한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근과 채찍'에 있어 우리(미국)가 '당근'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즉, 북한에 당근을 줌으로써 핵 포기를 유도할 의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강압적 수단을 유지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북한의 진짜 의도가 궁금하다는 뜻이었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물론 우리 역시 여전히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정말 개혁·개방을 할 생각이 있을까? 또 그것을 위해 핵을 포기할 생각이 과연 있는 걸까?"

"북한과 협상하려면 북한의 '오늘'을 파악해야"

이 전 장관과 저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북한의 '오늘', 그간의 변화를 세밀하게 뜯어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북한이 지난해 4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가 3차 전원회의에서 기존의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 대신 '사회주의경제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채택한 데 주목합니다. 군사 중심 국가에서 경제건설중심 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했고, 그 결과 북한은 현재 최소한 하루 세끼를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내부 동력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특히 국방산업은 그동안 다른 분야에서 넘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지만, 지난해 이후로는 인민경제 발전에 종속되는 현상들이 관찰된다며 실증적인 자료들도 제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7년 4월 김정은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수백 문의 자주포와 방사포를 발사하는 등 중요 군사훈련장이었던 원산 갈마반도가 1년 만에 해안관광지구로 개발되고 있는 모습을 들었습니다. (아래 사진)


2017년 4월 북한이 원산갈마반도 해변에서 자주포 사격훈련을 하던 장면(위)과 2018년 5월 같은 곳을 해안관광지구로 개발하고 있는 모습(아래) [사진제공: 세종연구소]
북한 경제의 또 다른 변화의 모습은 '경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는 기업소들이 국가 계획에 맞춰 할당된 수량만큼 생산해 계약을 맺은 유통기관에 판매했던 것과 달리 김정은 시대 들어서는 각 기업이 생산할 제품의 수량과 품목을 결정하도록 하면서 동종제품 생산기업 사이 '경쟁'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 결과 소비재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부동산시장과 노동시장 등 생산요소 시장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인트라넷을 활용한 온라인쇼핑몰도 성행한다고 합니다.

이 전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처럼 과감한 경제적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도 평가했습니다. 그는 "김정일은 개방으로 나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체제가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삐걱대다가 주저앉았다"며 "그러나 김정은은 선대와 생각이 다르다"고 진단합니다. 이어 "북한이 지난해 4월 국가전략노선을 경제건설 우선으로 전환한 것은 1978년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개혁·개방을 선언했을 때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재가 北경제 타격 주는 건 맞지만, 굴복시키긴 어려워"

그럼에도 유엔의 대북제재가 북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은 이 전 장관과 저자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실제 북한은 제재로 인해 외자 유치를 전제로 하는 특수경제지대 개발은 사실상 시작도 하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먹고사는 정도의 경제발전이 아닌 '고도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이대로 제재를 계속한다면 북한을 굴복시키고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 전 장관은 "미국이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해제' 입장을 고수한다면, 제재는 북한의 경제개방 의지 자체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습니다. 북한이 제재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과도한 자력갱생을 주장하게 되고, 이는 결국 북한이 '자폐경제'로 회귀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국내외 정책결정자들에게 "유엔의 고강도 대북제재는 북한 경제에 강력한 타격을 주고 있지만, 북한은 이에 대응해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체제 내구력을 확보했다"며 "대북제재만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또 "북한의 구조적·전략적 변화를 관찰하면서 김정은이 제재 때문에 굶주린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 협상에 나온 게 아니라 고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면 외부에서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야 하니 협상에 나온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며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 우리 기존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이 대남 비난을 이어가고 군사적 긴장마저 높이면서 강경 여론이 커지는 요즘, 저명한 학자이자 전직 고위 관료가 자칫 비난받기 쉬운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먼저 "북한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하는 학문적 호기심과 학자로서의 의무"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미국의 정책이 여전히 북한의 구조적·본질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4년 전 젤리코처럼 '북한이 과연 개혁 그런 걸 하겠어?' 하는 인식이 여전하다.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정책 수립에서 혹시 조정할 부분이 없나 되돌아보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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