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죽어야 하나” 과거사법의 운명은?

입력 2019.12.03 (07:00) 수정 2019.12.03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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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억울함 누가 풀어주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풀어야 합니다. 가해자를 찾고,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과거사법'은 '국가'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하는 법입니다. 1969년 이수근 간첩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북한 기자 출신으로 탈북해 화제가 됐던 이수근 씨가, 귀순 2년 만에 이중간첩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2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2007년 법원이 재심을 결정하고 지난해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중간첩 혐의는 중앙정보부 조작이었습니다. 49년만의 명예회복, 당시 과거사위원회가 진상조사 끝에 재심을 결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국회는 2005년 과거사법을 만들고, 1년 동안 피해 신청을 받았습니다. 11,175건이 접수됐습니다. 건당 피해자 수가 수백·수천 명인 경우가 있어 피해구제를 신청한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간첩조작사건 외에도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학살, 지역별 보도연맹사건, 부랑시설 감금 및 인권유린, 우리도 잘 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강기훈 유서 대필사건도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습니다.

※과거사위원회 사건별 조사보고서 열람

그런데, 피해 접수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생업을 꾸리느라 그런 법이 생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국회 앞에서 2년째 노숙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도 2007년에야 과거사법을 알았습니다. 김복영 한국전쟁유족회 회장도 "그 땐 '조사를 받으러 가 보자'고 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신청이 늦어 피해당한 사실 입증도, 배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과거사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19대 국회서 '폐기'…이번에는?

2013년, 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시작으로 과거사법 개정안 발의가 시작됩니다. "2005년 12월 1일부터 1년간 진상규명을 신청할 수 있다"는 조항만 고치면, 조사를 재개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협의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19대 국회에서 나온 개정안은 제대로 논의도 안 된 채 줄줄이 폐기됐습니다. 20대 국회 들어 개정안이 여러 건 다시 발의됐습니다. 3년째, 여야는 이런 내용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조사위 정원은 여야 영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주장은 이렇습니다. 2005년 법대로라면 대통령 4명·대법원장 3명·국회 8명 추천인데, 이 경우 대통령·대법원장·여당 추천은 사실상 친정부 성향 인사들일 테니 공정하지 않다는 겁니다. 대통령 1명에 여야(교섭단체만) 4명씩 추천하자는 주장입니다. 지난해 출범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가 9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사 범위가 전두환 정권까지냐, 노태우 정부까지냐도 갈등 요인입니다. 기존 법은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로 정했습니다. 논란 끝에 '전두환 정권까지'로 해석됐습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개정안에서 "1992년 2월 24일까지"로 조사 범위를 수정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기간을 넣었습니다. 한국당은 원래 법대로, 전두환 정권까지만 조사하자는 입장입니다.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판결 난 사건을, 위원회 의결만으로 재심하거나 국회 청문회 개최를 가능하도록 하는 조항을 두고도 여야가 여전히 대립 중입니다.


느릿느릿 심사…"자유한국당이 고의로 논의 지연"

이런 내용으로 여야가 싸우는 사이 법안심사는 한없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주목받는 법안이 아니다 보니, 애초에 심사 속도도 느렸습니다. '논의를 할까, 말까' 다투다가 끝나기도 했습니다. 2018년 이후, 행안위 법안소위 회의록에서 찾은 기록들입니다.

[2018.2.20.]
▷홍철호(자유한국당 의원) : 3월 초에 다시 소위를 열어 주시고…사실 우리 원내에서 정확한 팩트에 대해서 이해가 안 돼 있어요.
▷권은희(바른미래당 의원) : 추가로 논의를 계속하는 것으로 하고요.


[2019.4.1.]
▷홍문표(자유한국당 의원) : 기한 연장에는 수긍합니다. 그렇다고 그것 하나만 딱 떼서 결정할 수도 없고, 우리 당의 당론도 있고…오늘 (기한 연장만) 결정해 버리면 나머지 산재한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강창일(더불어민주당 의원) : 또 논의해야지요…먼저 (기한 연장) 해 놓고 다른 것을 계속 논의하면 되지 않습니까?


[2019.5.28.]
▷유민봉(자유한국당 의원) : 지금 당 지도부에서 국회 정상화에 대해 합의가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지도부와 의견을 나눠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재정(더불어민주당 의원) : 심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제(2일)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는 "3년 6개월 동안 심의를 거부하거나 의도적으로 심의를 연기해 온 한국당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상당히 분노해왔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한국당 지도부가 과거사법을 통과시킬 의지가 없다"며 나경원 원내대표 등을 겨냥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 날치기에 또 날치기…6개월이나 시간 있다"

한국당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반박했습니다. 이채익 의원은 어제(2일) 회견에서 "공권력에 희생된 무고한 국민에 대한 진실규명,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배·보상 조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법안소위부터 전체회의까지 일방적 '날치기'로 법안 통과를 강행해왔기에 법안 심사가 늦어지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이 의원은 또 "(여야가) 다 합의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한국당의 수정 요구사항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앞서 민주당 측은 위원회 정수 축소, 조사범위에 노태우 정부 제외, 청문회 규정 삭제 등 한국당 요구사항을 전부 받아들였는데도 한국당 의원들이 법안 표결에 불참했다고 밝혀왔습니다.

과거사법 재심사도 요구했습니다. 날치기로 통과해 법사위로 보내진 법안을, 행안위로 되가져와 심사하자는 겁니다. '시간 끌기 아닐까' 의문이 들 대목인데, 이 의원은 회견에서 "20대 국회 임기가 내년 5월 30일로 6개월이나 남아 있다"며, "임시회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의원은, 어제(2일) 보도 이후 KBS와의 통화에서도 "행안위에서 책임지고 심사할 것"이라며 민주당이 빨리 재심사에 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05년 과거사법 제정 당시, 여야 의원 159명이 찬성했습니다.2005년 과거사법 제정 당시, 여야 의원 159명이 찬성했습니다.

14년 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힘을 합쳐 만들었던 과거사법은 8,400건의 억울함을 해소해줬습니다. 2013년 개정안 발의 7년, 과거사법은 여전히 국회를 표류 중입니다.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법안 사망을 지켜봤던 피해자들은, 20대 국회에선 다른 결론이 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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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 죽어야 하나” 과거사법의 운명은?
    • 입력 2019-12-03 07:00:46
    • 수정2019-12-03 07:46:59
    취재K
"내 억울함 누가 풀어주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풀어야 합니다. 가해자를 찾고,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과거사법'은 '국가'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하는 법입니다. 1969년 이수근 간첩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북한 기자 출신으로 탈북해 화제가 됐던 이수근 씨가, 귀순 2년 만에 이중간첩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2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2007년 법원이 재심을 결정하고 지난해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중간첩 혐의는 중앙정보부 조작이었습니다. 49년만의 명예회복, 당시 과거사위원회가 진상조사 끝에 재심을 결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국회는 2005년 과거사법을 만들고, 1년 동안 피해 신청을 받았습니다. 11,175건이 접수됐습니다. 건당 피해자 수가 수백·수천 명인 경우가 있어 피해구제를 신청한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간첩조작사건 외에도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학살, 지역별 보도연맹사건, 부랑시설 감금 및 인권유린, 우리도 잘 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강기훈 유서 대필사건도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습니다.

※과거사위원회 사건별 조사보고서 열람

그런데, 피해 접수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생업을 꾸리느라 그런 법이 생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국회 앞에서 2년째 노숙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도 2007년에야 과거사법을 알았습니다. 김복영 한국전쟁유족회 회장도 "그 땐 '조사를 받으러 가 보자'고 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신청이 늦어 피해당한 사실 입증도, 배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과거사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19대 국회서 '폐기'…이번에는?

2013년, 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시작으로 과거사법 개정안 발의가 시작됩니다. "2005년 12월 1일부터 1년간 진상규명을 신청할 수 있다"는 조항만 고치면, 조사를 재개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협의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19대 국회에서 나온 개정안은 제대로 논의도 안 된 채 줄줄이 폐기됐습니다. 20대 국회 들어 개정안이 여러 건 다시 발의됐습니다. 3년째, 여야는 이런 내용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조사위 정원은 여야 영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주장은 이렇습니다. 2005년 법대로라면 대통령 4명·대법원장 3명·국회 8명 추천인데, 이 경우 대통령·대법원장·여당 추천은 사실상 친정부 성향 인사들일 테니 공정하지 않다는 겁니다. 대통령 1명에 여야(교섭단체만) 4명씩 추천하자는 주장입니다. 지난해 출범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가 9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사 범위가 전두환 정권까지냐, 노태우 정부까지냐도 갈등 요인입니다. 기존 법은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로 정했습니다. 논란 끝에 '전두환 정권까지'로 해석됐습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개정안에서 "1992년 2월 24일까지"로 조사 범위를 수정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기간을 넣었습니다. 한국당은 원래 법대로, 전두환 정권까지만 조사하자는 입장입니다.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판결 난 사건을, 위원회 의결만으로 재심하거나 국회 청문회 개최를 가능하도록 하는 조항을 두고도 여야가 여전히 대립 중입니다.


느릿느릿 심사…"자유한국당이 고의로 논의 지연"

이런 내용으로 여야가 싸우는 사이 법안심사는 한없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주목받는 법안이 아니다 보니, 애초에 심사 속도도 느렸습니다. '논의를 할까, 말까' 다투다가 끝나기도 했습니다. 2018년 이후, 행안위 법안소위 회의록에서 찾은 기록들입니다.

[2018.2.20.]
▷홍철호(자유한국당 의원) : 3월 초에 다시 소위를 열어 주시고…사실 우리 원내에서 정확한 팩트에 대해서 이해가 안 돼 있어요.
▷권은희(바른미래당 의원) : 추가로 논의를 계속하는 것으로 하고요.


[2019.4.1.]
▷홍문표(자유한국당 의원) : 기한 연장에는 수긍합니다. 그렇다고 그것 하나만 딱 떼서 결정할 수도 없고, 우리 당의 당론도 있고…오늘 (기한 연장만) 결정해 버리면 나머지 산재한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강창일(더불어민주당 의원) : 또 논의해야지요…먼저 (기한 연장) 해 놓고 다른 것을 계속 논의하면 되지 않습니까?


[2019.5.28.]
▷유민봉(자유한국당 의원) : 지금 당 지도부에서 국회 정상화에 대해 합의가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지도부와 의견을 나눠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재정(더불어민주당 의원) : 심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제(2일)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는 "3년 6개월 동안 심의를 거부하거나 의도적으로 심의를 연기해 온 한국당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상당히 분노해왔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한국당 지도부가 과거사법을 통과시킬 의지가 없다"며 나경원 원내대표 등을 겨냥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 날치기에 또 날치기…6개월이나 시간 있다"

한국당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반박했습니다. 이채익 의원은 어제(2일) 회견에서 "공권력에 희생된 무고한 국민에 대한 진실규명,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배·보상 조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법안소위부터 전체회의까지 일방적 '날치기'로 법안 통과를 강행해왔기에 법안 심사가 늦어지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이 의원은 또 "(여야가) 다 합의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한국당의 수정 요구사항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앞서 민주당 측은 위원회 정수 축소, 조사범위에 노태우 정부 제외, 청문회 규정 삭제 등 한국당 요구사항을 전부 받아들였는데도 한국당 의원들이 법안 표결에 불참했다고 밝혀왔습니다.

과거사법 재심사도 요구했습니다. 날치기로 통과해 법사위로 보내진 법안을, 행안위로 되가져와 심사하자는 겁니다. '시간 끌기 아닐까' 의문이 들 대목인데, 이 의원은 회견에서 "20대 국회 임기가 내년 5월 30일로 6개월이나 남아 있다"며, "임시회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의원은, 어제(2일) 보도 이후 KBS와의 통화에서도 "행안위에서 책임지고 심사할 것"이라며 민주당이 빨리 재심사에 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05년 과거사법 제정 당시, 여야 의원 159명이 찬성했습니다.
14년 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힘을 합쳐 만들었던 과거사법은 8,400건의 억울함을 해소해줬습니다. 2013년 개정안 발의 7년, 과거사법은 여전히 국회를 표류 중입니다.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법안 사망을 지켜봤던 피해자들은, 20대 국회에선 다른 결론이 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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