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은 ‘특급’, 하청은 ‘1·2급’… 마스크조차 차별?

입력 2019.12.0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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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내려앉은 눈 위에 누군가 발자국을 남긴 듯 합니다. 언뜻 짓궂게도, 언뜻 낭만적으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런 여유를 찾기 어려운 공간에서 촬영됐습니다.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흰 가루, 눈처럼 보이는 저 가루들의 정체는 타고 남은 석탄재입니다. 고 김용균 씨와 동료들이 일해왔던 화력발전소의 최근 내부 모습입니다. 바닥뿐 아니라 각종 기계 설비들의 위에도 뽀얗게 석탄재들이 쌓여 있습니다.


최근 우리들은 아침마다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한 뒤 출근길에 오릅니다. 승용차 내부용 공기청정기도 제법 인기를 끕니다. '공기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불과 5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산먼지가 가득한 이 장소가, 이들이 하루 8시간 이상씩 마스크를 쓴 채 일과를 보내야 하는 곳입니다.


고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 이후, 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김 씨와 함께, 혹은 비슷한 공간에서 일해왔던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이 4일 진행된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기자간담회'에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김용균 특조위가 구성 초기부터 강조해 왔던 '특급마스크' 지급 여부입니다. '김용균 특조위'의 활동을 통해 공장 내 먼지에서 '결정형 유리규산'등 발암물질이 확인되면서, 현장 하청노동자들에게 현재의 1·2급 마스크보다 성능이 좋은 '특급마스크'를 즉시 지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 마스크조차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특급마스크의 개당 가격은 2,950원. 현재 지급돼 있는 1·2급 마스크가 천 원 안팎이니 상대적으로 비싼 것은 사실입니다. 특급마스크 지급 요청에 대해 원청 업체는 '이미 하청업체에 안전관리비를 지급했고, 추가로 지급하면 감사 대상이 된다'며 책임을 미루고, 하청 업체는 '지급받은 예산에 여유가 없다'며 회피하고 있습니다. 김용균 특조위가 강조해 왔던 '책임의 공백' 상태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들던 사측이 갑자기 일회성으로나마 '특급마스크'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원청업체의 사장들이 국회에 불려 나간 직후입니다. 한 하청노동자는 "지난 국정감사에서 발암물질 문제로 발전사 사장들을 질타하고 났더니, 국감이 끝나기도 전에 특급마스크가 지급됐다"며 "국회의원들이 시킨 건 감사대상이 아니고 노동자들이 달라고 하는 건 감사대상이 되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서운함을 토로했습니다. "원청 업체에서 감사에 지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쓰는 것 중에 여유분을 일단 좀 줄 수 있다고도 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달리, 원청 업체 직원들은 벌써 특급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여전히 손전등 없이는 일하기 힘들 정도로 암흑 속에 방치된 공간도 많습니다. 그나마 김용균 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 등에는 예전보다 밝은 조명이 설치됐지만, 다른 공장들의 변화 속도는 더디다는 겁니다. 삼천포화력발전소에서 온 한 노동자는 "김용균 사고 이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삼천포는 조명조차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고 김용균 씨와 함께 일했던 태안화력발전소의 참가자는 "타 사업장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변화조차 못 느낀다는 점이 가슴아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따로, 결정하는 사람 따로... "근본 문제는 원·하청 구조"

어떤 등급의 마스크가 지급될지, 얼마나 밝은 조명이 설치될지 등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릅니다. 참석자들은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원·하청구조'에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간담회에서 신대원 한국발전기술지부장은 "하청업체에 8년 전에 입사해서, 현장에 조명을 좀 달아달라는 말을 5년 넘게 해왔다"며 "그동안 그 요청을 무시하다가 이제야 하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가 참 딱하고 비참하다"고 말했습니다.

영흥화력발전소에서 온 또다른 하청노동자는 "원청 업체에서 입사 2년~4년 된 사람들이 현장에 와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따라야 한다"면서 "하청노동자들이 실제로 다치고 사망하는데 원청에서 돈 핑계를 대며 대책 시행이 어렵다고 할 때,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많이 답답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결국 일하는 사람 따로, 결정하는 사람 따로인 지금의 원·하청구조 개선 없이는 매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동료의 사망 뒤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현장에서 무력감을 호소하는 이들. "우리는 아무리 말해봐도 설비에 대한 권한도 없고 설비의 주인도 될 수 없다"는 이들의 호소가 언제까지 반복돼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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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청은 ‘특급’, 하청은 ‘1·2급’… 마스크조차 차별?
    • 입력 2019-12-04 19:30:07
    취재K
하얗게 내려앉은 눈 위에 누군가 발자국을 남긴 듯 합니다. 언뜻 짓궂게도, 언뜻 낭만적으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런 여유를 찾기 어려운 공간에서 촬영됐습니다.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흰 가루, 눈처럼 보이는 저 가루들의 정체는 타고 남은 석탄재입니다. 고 김용균 씨와 동료들이 일해왔던 화력발전소의 최근 내부 모습입니다. 바닥뿐 아니라 각종 기계 설비들의 위에도 뽀얗게 석탄재들이 쌓여 있습니다.


최근 우리들은 아침마다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한 뒤 출근길에 오릅니다. 승용차 내부용 공기청정기도 제법 인기를 끕니다. '공기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불과 5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산먼지가 가득한 이 장소가, 이들이 하루 8시간 이상씩 마스크를 쓴 채 일과를 보내야 하는 곳입니다.


고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 이후, 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김 씨와 함께, 혹은 비슷한 공간에서 일해왔던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이 4일 진행된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기자간담회'에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김용균 특조위가 구성 초기부터 강조해 왔던 '특급마스크' 지급 여부입니다. '김용균 특조위'의 활동을 통해 공장 내 먼지에서 '결정형 유리규산'등 발암물질이 확인되면서, 현장 하청노동자들에게 현재의 1·2급 마스크보다 성능이 좋은 '특급마스크'를 즉시 지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 마스크조차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특급마스크의 개당 가격은 2,950원. 현재 지급돼 있는 1·2급 마스크가 천 원 안팎이니 상대적으로 비싼 것은 사실입니다. 특급마스크 지급 요청에 대해 원청 업체는 '이미 하청업체에 안전관리비를 지급했고, 추가로 지급하면 감사 대상이 된다'며 책임을 미루고, 하청 업체는 '지급받은 예산에 여유가 없다'며 회피하고 있습니다. 김용균 특조위가 강조해 왔던 '책임의 공백' 상태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들던 사측이 갑자기 일회성으로나마 '특급마스크'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원청업체의 사장들이 국회에 불려 나간 직후입니다. 한 하청노동자는 "지난 국정감사에서 발암물질 문제로 발전사 사장들을 질타하고 났더니, 국감이 끝나기도 전에 특급마스크가 지급됐다"며 "국회의원들이 시킨 건 감사대상이 아니고 노동자들이 달라고 하는 건 감사대상이 되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서운함을 토로했습니다. "원청 업체에서 감사에 지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쓰는 것 중에 여유분을 일단 좀 줄 수 있다고도 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달리, 원청 업체 직원들은 벌써 특급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여전히 손전등 없이는 일하기 힘들 정도로 암흑 속에 방치된 공간도 많습니다. 그나마 김용균 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 등에는 예전보다 밝은 조명이 설치됐지만, 다른 공장들의 변화 속도는 더디다는 겁니다. 삼천포화력발전소에서 온 한 노동자는 "김용균 사고 이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삼천포는 조명조차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고 김용균 씨와 함께 일했던 태안화력발전소의 참가자는 "타 사업장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변화조차 못 느낀다는 점이 가슴아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따로, 결정하는 사람 따로... "근본 문제는 원·하청 구조"

어떤 등급의 마스크가 지급될지, 얼마나 밝은 조명이 설치될지 등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릅니다. 참석자들은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원·하청구조'에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간담회에서 신대원 한국발전기술지부장은 "하청업체에 8년 전에 입사해서, 현장에 조명을 좀 달아달라는 말을 5년 넘게 해왔다"며 "그동안 그 요청을 무시하다가 이제야 하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가 참 딱하고 비참하다"고 말했습니다.

영흥화력발전소에서 온 또다른 하청노동자는 "원청 업체에서 입사 2년~4년 된 사람들이 현장에 와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따라야 한다"면서 "하청노동자들이 실제로 다치고 사망하는데 원청에서 돈 핑계를 대며 대책 시행이 어렵다고 할 때,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많이 답답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결국 일하는 사람 따로, 결정하는 사람 따로인 지금의 원·하청구조 개선 없이는 매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동료의 사망 뒤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현장에서 무력감을 호소하는 이들. "우리는 아무리 말해봐도 설비에 대한 권한도 없고 설비의 주인도 될 수 없다"는 이들의 호소가 언제까지 반복돼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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