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 논란에 빠진 한국경제,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

입력 2019.12.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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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0% 안팎으로 떨어진 데다, 국내총생산(GDP)디플레이터마저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GDP 디플레이터에는 소비자 물가와 달리 국내에서 생산한 수출품 가격이 들어간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최근까지도 물가가 계속 올랐기 때문에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은 매우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세계사 속에서 디플레이션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세는 물론 근세에 이르기까지 종종 디플레이션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그 나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디플레이션과 오즈의 마법사

우리에게 친숙한 오즈의 마법사는 결코 단순한 어린이 동화가 아니다. 한때 경제부 기자로 일하던 작가 L.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이 1890년대 당시 디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미국의 경제 상황을 통렬히 고발하고,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저자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바움은 미국 경제가 극심한 물가 하락, 즉 디플레이션의 상황에 빠진 원인이 '금본위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금 보유량만큼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기 때문에 통화 공급이 제한된다. 그 결과 통화 공급 부족으로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심각한 불황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바움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Jr.)가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해 금본위제를 고집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토네이도에 날려 낯선 오즈의 나라로 떨어진 주인공 도로시는 미국인을 상징한다. 오즈의 세계는 디플레이션에 빠진 미국 경제를 뜻한다. 도로시는 오즈로 날아가자마자 사악한 동쪽 마녀를 쓰러뜨리고 은구두를 얻게 되는데, 여기서 도로시가 물리친 동쪽 마녀는 금본위제를 고집하던 미국 동부의 금융자본가, 즉 월스트리트를 의미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에메랄드 구두는 원전이 아니라 나중에 각색된 내용이다.)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따라가던 황금빛 길은 금본위제를 상장한다. 잘못된 길이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이 금본위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즉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현상을 빗댄 것이다.

도로시가 길을 따라가며 만난 허수아비는 미국의 농민, 양철 인형은 도시 노동자, 그리고 겁쟁이 사자는 당시 매킨리 대통령의 맞수였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뜻하고, 오즈의 마법사는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을 뜻한다.

결국 도로시와 그 일행은 서쪽 마녀를 물리치고, 오즈의 마법사에게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 준 것은 도로시가 동쪽 마녀를 물리친 직후 초반부터 신고 있었던 은구두, 즉 은본위제였다.

바움은 금보다 더 생산량과 매장량이 풍부한 은을 통화의 기준으로 삼는 은본위제를 도입하면 통화량이 늘어 디플레이션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맞았는지,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더 이상 금과 태환되지 않는 불태환 화폐(Fiat Money)가 대세가 된 이후에는 과거 불태환 지폐가 등장하기 전 인류를 괴롭혀왔던 디플레이션을 완전히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불태환 화폐(Fiat Money)로도 막지 못한 일본의 디플레이션

이론상 무한대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불태환 화폐가 확고히 자리 잡은 이후 일본의 장기 불황이 오기 전까지 인류는 이제 디플레이션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태환 지폐를 과도하게 찍어서 나타나는 인플레이션만 극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9년 버블 붕괴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20년 장기 불황과 극심한 디플레이션은 그 모든 믿음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 은행이 지속적으로 돈을 풀고, 재정지출을 확대해도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더구나 돈줄만 확실하게 죄면 잡을 수 있었던 인플레이션과 달리 온갖 정책을 쏟아 부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그동안 인류는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방법만 발전시켰을 뿐, 과거 인류를 괴롭혀왔던 디플레이션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했다. 그 결과 일본은 무려 20년이 넘는 장기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 초기에 수많은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일본에서 디플레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일본인들의 독특한 국민성에서 찾았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일본인들이 워낙 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본만의 현상으로 치부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디플레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자 디플레가 결코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왜 마이너스 금리와 천문학적인 양적완화에도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일까?

일반인들은 물가 상승을 매우 안 좋은 신호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물가가 전혀 오르지 않는 것보다 해마다 물가가 1~2% 정도 오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 유럽국가들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좀처럼 물가가 오르지 않고 있다. 화폐의 유통 속도가 줄어들었다는 얘기인데, 최근 선진국 대부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디플레이션이나 유사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고령화, 저성장, 저출산 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디플레가 나타났다고 추정할 뿐이다. 만일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면 돈을 지금 쓰는 것보다 나중에 쓰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돈을 쓰는 길이 되기 때문에 결국 지출을 미루게 되고 소비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디플레로 진입한 나라들의 공통된 교훈은 불태환 지폐의 대규모 발행이나 마이너스 금리로는 디플레를 근원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디플레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전 세계에서 디플레에 대해 그나마 잘 대응하고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처럼 하루빨리 STEM인재(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육성과 영입을 통해 경제활력을 되찾고,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생산연령인구 감소를 방어에 나서야 한다.

이미 일본과 수많은 유럽 선진국이 디플레의 그림자에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가 디플레 상황에 이미 빠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 지금 우리가 디플레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일본이나 유럽이 먼저 간 길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지금 디플레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늦기 전에 빨리 디플레를 막는 방안을 강구하고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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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플레 논란에 빠진 한국경제,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
    • 입력 2019-12-05 07:00:55
    취재K
최근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0% 안팎으로 떨어진 데다, 국내총생산(GDP)디플레이터마저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GDP 디플레이터에는 소비자 물가와 달리 국내에서 생산한 수출품 가격이 들어간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최근까지도 물가가 계속 올랐기 때문에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은 매우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세계사 속에서 디플레이션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세는 물론 근세에 이르기까지 종종 디플레이션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그 나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디플레이션과 오즈의 마법사

우리에게 친숙한 오즈의 마법사는 결코 단순한 어린이 동화가 아니다. 한때 경제부 기자로 일하던 작가 L.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이 1890년대 당시 디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미국의 경제 상황을 통렬히 고발하고,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저자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바움은 미국 경제가 극심한 물가 하락, 즉 디플레이션의 상황에 빠진 원인이 '금본위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금 보유량만큼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기 때문에 통화 공급이 제한된다. 그 결과 통화 공급 부족으로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심각한 불황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바움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Jr.)가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해 금본위제를 고집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토네이도에 날려 낯선 오즈의 나라로 떨어진 주인공 도로시는 미국인을 상징한다. 오즈의 세계는 디플레이션에 빠진 미국 경제를 뜻한다. 도로시는 오즈로 날아가자마자 사악한 동쪽 마녀를 쓰러뜨리고 은구두를 얻게 되는데, 여기서 도로시가 물리친 동쪽 마녀는 금본위제를 고집하던 미국 동부의 금융자본가, 즉 월스트리트를 의미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에메랄드 구두는 원전이 아니라 나중에 각색된 내용이다.)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따라가던 황금빛 길은 금본위제를 상장한다. 잘못된 길이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이 금본위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즉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현상을 빗댄 것이다.

도로시가 길을 따라가며 만난 허수아비는 미국의 농민, 양철 인형은 도시 노동자, 그리고 겁쟁이 사자는 당시 매킨리 대통령의 맞수였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뜻하고, 오즈의 마법사는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을 뜻한다.

결국 도로시와 그 일행은 서쪽 마녀를 물리치고, 오즈의 마법사에게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 준 것은 도로시가 동쪽 마녀를 물리친 직후 초반부터 신고 있었던 은구두, 즉 은본위제였다.

바움은 금보다 더 생산량과 매장량이 풍부한 은을 통화의 기준으로 삼는 은본위제를 도입하면 통화량이 늘어 디플레이션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맞았는지,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더 이상 금과 태환되지 않는 불태환 화폐(Fiat Money)가 대세가 된 이후에는 과거 불태환 지폐가 등장하기 전 인류를 괴롭혀왔던 디플레이션을 완전히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불태환 화폐(Fiat Money)로도 막지 못한 일본의 디플레이션

이론상 무한대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불태환 화폐가 확고히 자리 잡은 이후 일본의 장기 불황이 오기 전까지 인류는 이제 디플레이션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태환 지폐를 과도하게 찍어서 나타나는 인플레이션만 극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9년 버블 붕괴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20년 장기 불황과 극심한 디플레이션은 그 모든 믿음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 은행이 지속적으로 돈을 풀고, 재정지출을 확대해도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더구나 돈줄만 확실하게 죄면 잡을 수 있었던 인플레이션과 달리 온갖 정책을 쏟아 부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그동안 인류는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방법만 발전시켰을 뿐, 과거 인류를 괴롭혀왔던 디플레이션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했다. 그 결과 일본은 무려 20년이 넘는 장기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 초기에 수많은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일본에서 디플레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일본인들의 독특한 국민성에서 찾았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일본인들이 워낙 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본만의 현상으로 치부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디플레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자 디플레가 결코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왜 마이너스 금리와 천문학적인 양적완화에도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일까?

일반인들은 물가 상승을 매우 안 좋은 신호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물가가 전혀 오르지 않는 것보다 해마다 물가가 1~2% 정도 오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 유럽국가들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좀처럼 물가가 오르지 않고 있다. 화폐의 유통 속도가 줄어들었다는 얘기인데, 최근 선진국 대부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디플레이션이나 유사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고령화, 저성장, 저출산 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디플레가 나타났다고 추정할 뿐이다. 만일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면 돈을 지금 쓰는 것보다 나중에 쓰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돈을 쓰는 길이 되기 때문에 결국 지출을 미루게 되고 소비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디플레로 진입한 나라들의 공통된 교훈은 불태환 지폐의 대규모 발행이나 마이너스 금리로는 디플레를 근원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디플레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전 세계에서 디플레에 대해 그나마 잘 대응하고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처럼 하루빨리 STEM인재(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육성과 영입을 통해 경제활력을 되찾고,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생산연령인구 감소를 방어에 나서야 한다.

이미 일본과 수많은 유럽 선진국이 디플레의 그림자에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가 디플레 상황에 이미 빠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 지금 우리가 디플레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일본이나 유럽이 먼저 간 길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지금 디플레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늦기 전에 빨리 디플레를 막는 방안을 강구하고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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