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메르켈도 ‘홍콩사태’에 뿔났나…나토 판 바꾸는 ‘EU-중국’ 균열

입력 2019.12.10 (15:41) 수정 2019.12.1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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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런던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정상 회의에서 시선을 끈 사건은 단연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정상 등이 나눈 25초짜리 트럼프 대통령 뒷말 영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40분 동안 즉석 기자회견을 하는 바람에 다음 일정이 차질을 빚었다'는 게 정상들의 사적 대화 주제였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영상에 등장한 정상들에게 불만을 쏟아낸 뒤 폐회식 회견도 하지 않고 에어포스원에 올라 '왕따' 논란까지 일었다.

[연관기사] ‘왕따’ 트럼프 돌연 귀국…나토 ‘파열음’

'트럼프 왕따 논란' 해프닝에 가려 정작 중요한 회의 결과는 묻히고 말았다. 이번 나토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은 나토 창설 뒤 처음으로 '중국의 부상'을 도전 과제로 명시한 '런던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왕따 논란'이 보여주듯 그 위상과 방위비 등으로 놓고 시끄러운 나토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담겼다.

이런 결과의 중심에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나토를 이끌어온 유럽연합(이하 'EU') 리더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있었다. '세계주의자'임을 자처하며 '국가주의자' 트럼프와 부딪혀온 메르켈, 어떤 일이 있었길래 최근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트럼프와 보조를 맞추려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걸까.

■ 나토 '중국 부상은 도전 과제' 첫 명시 ... "중국, 무기 협약 가입해야"

나토 29개 회원국 정상들은 지난 4일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런던 선언문에서 "중국의 커지는 영향력과 국제 정책이 기회뿐 아니라 우리가 동맹으로서 함께 대처할 필요가 있는 도전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부상'을 나토의 도전 과제로 명시한 것인데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정상들은 지금의 세계정세를 '도전의 시기'라고 진단했다. "'도전의 시기'에 우리는 동맹으로서 더 강하다"면서 "유럽과 북미 사이의 유대와 '워싱턴 조약' 제5 조에 대한 약속은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조약 5조는 나토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만 공격을 받아도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대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4일)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4일)

런던 선언문은 특히, 미국이 중국에 대해 가장 경계하는 분야인 통신 안보 분야에서의 대응 필요성도 언급했다. 선언문은 "나토와 동맹국들은 5G를 포함해 우리의 통신 안보를 보장하고 안전하고 탄력적인 시스템에 의존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전념한다"고 명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나토 회의에서도 유럽 각국이 5G 통신망에서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를 배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화웨이 장비를 쓰는 것이 우리의 국가 안보 이익이나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영미권 5개국 기밀 정보 동맹체) 안보 파트너 국가들과의 협력에 악영향을 줘선 안 된다"고 밝혔다.

[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막 오른 미중 ‘미사일 대전(大戰)’…‘고래 싸움’ 쓰나미가 다가온다

노르웨이 출신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정치인들은 수사만 화려하고 결과물은 빈약해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완전 그 반대였다"며 런던 선언문을 높이 평가했다. 스톨텐베르그 총장은 더 나아가 중국을 향해 "무기 협약에 가입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냉전 시절 소련과 맺었던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을 탈퇴한 뒤 중국 인근 국가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을 언급하며 중국에 INF 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맺자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나온 나토 수장의 언급이라 예사롭지 않다.

■ '홍콩 지지' 요청에 화답한 메르켈 ... "유럽, 중국에 공동 대응해야"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 홀대 논란 속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외쳤고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에 동조하면서 유럽연합의 쌍두마차 두 나라가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1년 뒤 이 세 명의 정상이 함께 서명한 선언문은 사실상 중국을 나토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국가주의자’ 트럼프 勝?…급변하는 세계질서

메르켈 총리가 총리 관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 (지난달 28일)메르켈 총리가 총리 관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 (지난달 28일)

변화의 조짐은 지난달 27일 독일 연방 하원에서 한 메르켈 총리의 연설에서 이미 감지됐다. 메르켈 총리는 이 연설에서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개별적으로 펼치면서 서로 다른 신호를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위험한 일이다. 개별적인 대응은 중국에 재앙이 아니라 유럽에 재앙"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과 무역 전쟁 중인 중국이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에 구애의 손길을 내미는 가운데 나온 입장이다. 유럽이 중국을 상대로 공동 대응할 문제로 메르켈 총리는 5G 통신 네트워크 구축 과정에서의 보안 기준도 언급했다.

유럽 동맹국들에 '중국 당국의 스파이 활동에 이용될 수 있다'며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메르켈 총리이기에 그의 '중국 견제' 발언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메르켈 총리가 중국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기 전 눈에 띄는 사건이 있었다. 홍콩 시위의 주축 운동가인 조슈아 웡이 그에게 지지를 요청한 일이었다.

홍콩인들이 독일 총리 관저 앞에서 ‘홍콩 지지’를 촉구하고 있다 (9월 5일)홍콩인들이 독일 총리 관저 앞에서 ‘홍콩 지지’를 촉구하고 있다 (9월 5일)


베이징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가 시진핑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9월 6일)베이징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가 시진핑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9월 6일)

지난 9월 4일, 조슈아 웡은 메르켈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다. 웡은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인 사실을 거론하면서 "당신은 독재 정권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다. 중국은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독일도 중국과 거래하기 전 방심해선 안 된다"고 썼다. 서한을 받은 다음 날 중국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리커창 총리를 만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홍콩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해결책은 대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 폭력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인권 이슈' 적극 문제 삼는 유럽 ... EU-중국 관계 '복병'되나

유로존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도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 독일 경제는 올해 2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며 2009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가파른 침체를 겪고 있다. 자국의 기업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에 간 상황에서도 EU 수장 국가의 정상으로서 웡의 메시지에 화답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중국 현지에서 인권 변호사들도 만나 중국의 인권과 종교 자유 억압, 인터넷 검열 문제 등을 논의했다.

조슈아 웡(왼쪽)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 (베를린 연방 의사당, 지난 9월)조슈아 웡(왼쪽)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 (베를린 연방 의사당, 지난 9월)

메리켈 총리가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조슈아 웡이 독일을 찾았다. 웡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독일의 보수 성향 미디어그룹 행사에 참석해 '행정장관 직선제를 이뤄낼 때까지 시위를 지속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외교부는 "독일이 홍콩의 분열 분자가 입국해 반중국 분열 행위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 강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명한다"고 반발했다.

[연관기사] [글로벌돋보기] “도시 전체가 수용소”…위구르, 미중 싸움 ‘불쏘시개’ 되나

홍콩 사태 같은 중국 '인권' 문제를 고리로 한 중국과의 마찰음은 유럽 다른 국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홍콩 시위를 인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던 독일과 영국은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중국 공산당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비밀 강제 수용소 운영 지침이 담긴 기밀문서를 폭로하자 "수용소에 대한 유엔의 제한받지 않는 접근을 즉각 보장하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했다.

EU에서 친중 성향이 가장 강한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 상원은 지난달 28일 조슈아 웡과 화상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웡은 일부 이탈리아 업체가 중국 경찰에 시위대 진압 장비를 판매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탈리아 같은 책임 있는 나라가 자유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주재 중국 대사관이 "이탈리아 정치인들이 웡과 화상 회의를 한 것은 무책임한 행태"라며 발끈하자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탈리아 의회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맞받았다.

■ '트럼프와 갈등' 마크롱에 손 내민 중국 ... 메르켈, '일대일로'에 시큰둥

이탈리아는 G7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일대일로에 동참하는 국가다. 미국과의 무역전쟁이 고조되던 지난 3월 시진핑 주석이 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이탈리아였다. 유로존 위기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탈리아는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중국 자본에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해왔다. 이런 이탈리아마저 홍콩 문제에 대해 고자세로 나오자 중국은 유럽 쪽의 '중국 인권 문제 제기'에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나토 회의를 앞둔 지난 2일에는 유럽연합을 향해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함께 수호하자'며 구애를 보냈다. 미국에 맞설 수 있도록 중국 편이 돼달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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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은퇴 선언 이후 제기돼온 메르켈 총리 건강이상설 등 국내 정치 문제까지 겹쳐 독일이 비틀거리자 프랑스의 입김이 세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통합'을 주창하고 나토군·방위비 문제 등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유럽의 새로운 리더를 자처해왔다. 중국은 최근 이 점을 공략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국빈만찬 뒤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상하이, 지난달 6일)마크롱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국빈만찬 뒤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상하이, 지난달 6일)

지난달 초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독일 합작인 에어버스 등 유럽 기업 대표들을 이끌고 중국을 찾았다. 당시 중국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에 버금가는 특급 의전을 해줘 화제가 됐다. 시진핑 주석도 3월 유럽 순방 때 마크롱 대통령을 찾았다.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시 주석 파리 방문에 맞춰 메르켈 총리와 융커 EU 집행위원장을 초청했다.

당시에도 메르켈 총리는 "유럽이 일대일로에서 역할을 하려면 '호혜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이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융커 위원장도 "EU와 중국 간 보다 균형 잡힌 관계가 필요하다"며 거리를 뒀다. 융커 위원장은 중국의 개방 속도가 늦은데 대한 불만도 표시했다. 에어버스 여객기 대량 구매 약속 등 중국의 파격적인 공세에도 독일과 EU는 일대일로 협조 요청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다.

■ "일대일로는 약탈 구조" ... 나토, 미·중 갈등 속 '새로운 길' 찾나

미국은 틈 나는 대로 일대일로에 대한 방해 작전을 펴왔다. 이를 위해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10월에는 몬테네그로와 북마케도니아를 찾아 "비리 및 부채와 싸우지 않길 바란다. 일대일로 위험을 경계하라"고 촉구했다.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결국 중국이 인프라를 빼앗아가는 약탈적 구조'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재정이 어려운 나라에는 '중국의 인프라 사업 확보를 위한 뇌물 전략'을 경고해왔다.

나토 회원국 가운데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국가들을 보면 하나같이 재정 건전성이 낮은 게 사실이다. 일례로 그리스의 경우 국가 최대 항구인 피레우스항 운영권을 중국 원양운수 그룹에 내주는 등 중국 자본 잠식이 심각한 수준이다. '유럽이 중국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지난달 연설은 '재정이 어려운 나라가 중국의 주요 표적이니 조심하자'는 경계심의 표출이었다. 조슈아 웡도 이탈리아를 찾았을 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며 일대일로에 대한 경고를 빼놓지 않았다.

마크롱도 일대일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힌 적은 없다. 시 주석을 만날 때면 "'프랑스와 중국' 간 협력을 뛰어넘는 'EU-중국' 관계"를 강조했다. 화법만 다를 뿐, 오히려 메르켈의 'EU 공동 대응'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는 중국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대열에도 빠지지 않았다. 프랑스 외교부는 홍콩 사태의 평화적 해법을 강조한 데 이어 신장 위구르 수용소 문제가 불거지자 영국·독일과 함께 "중국에 자의적인 대규모 구금을 끝낼 것을 요구한다"는 입장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의 뒤 기념촬영을 위해 자신의 자리로 향하고 있다 (4일)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의 뒤 기념촬영을 위해 자신의 자리로 향하고 있다 (4일)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 전 "나토가 뇌사 상태에 빠져있다"고 말해 트럼프 대통령과 불편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도 남중국해에 항모전단을 보내 미국과 함께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펴고 있다. 프랑스군은 최근 인도양에서 미국, 일본, 호주 등과 함께 연합 해상훈련도 펼쳤다. 나토군은 지금도 확실히 살아있다. 나토 뒷말 영상에서 드러났듯, 유럽 정상들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감정이나 신념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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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장과 자본을 가진 중국에 저자세였던 유럽이 '인권' 문제로 중국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국 주저앉히기에 올인한 미국의 전략에 부합하는 내용의 선언문도 내놨다. 미국의 요구로 형성된 흐름인지 알 수 없지만, 주적이었던 소련 해체 이후 정체성이 모호해진 나토의 새로운 방향타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나토는 미국과 유럽이 70년 넘게 유지해온 군사동맹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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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돋보기] 메르켈도 ‘홍콩사태’에 뿔났나…나토 판 바꾸는 ‘EU-중국’ 균열
    • 입력 2019-12-10 15:41:36
    • 수정2019-12-10 15: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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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런던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정상 회의에서 시선을 끈 사건은 단연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정상 등이 나눈 25초짜리 트럼프 대통령 뒷말 영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40분 동안 즉석 기자회견을 하는 바람에 다음 일정이 차질을 빚었다'는 게 정상들의 사적 대화 주제였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영상에 등장한 정상들에게 불만을 쏟아낸 뒤 폐회식 회견도 하지 않고 에어포스원에 올라 '왕따' 논란까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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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왕따 논란' 해프닝에 가려 정작 중요한 회의 결과는 묻히고 말았다. 이번 나토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은 나토 창설 뒤 처음으로 '중국의 부상'을 도전 과제로 명시한 '런던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왕따 논란'이 보여주듯 그 위상과 방위비 등으로 놓고 시끄러운 나토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담겼다.

이런 결과의 중심에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나토를 이끌어온 유럽연합(이하 'EU') 리더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있었다. '세계주의자'임을 자처하며 '국가주의자' 트럼프와 부딪혀온 메르켈, 어떤 일이 있었길래 최근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트럼프와 보조를 맞추려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걸까.

■ 나토 '중국 부상은 도전 과제' 첫 명시 ... "중국, 무기 협약 가입해야"

나토 29개 회원국 정상들은 지난 4일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런던 선언문에서 "중국의 커지는 영향력과 국제 정책이 기회뿐 아니라 우리가 동맹으로서 함께 대처할 필요가 있는 도전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부상'을 나토의 도전 과제로 명시한 것인데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정상들은 지금의 세계정세를 '도전의 시기'라고 진단했다. "'도전의 시기'에 우리는 동맹으로서 더 강하다"면서 "유럽과 북미 사이의 유대와 '워싱턴 조약' 제5 조에 대한 약속은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조약 5조는 나토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만 공격을 받아도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대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4일)
런던 선언문은 특히, 미국이 중국에 대해 가장 경계하는 분야인 통신 안보 분야에서의 대응 필요성도 언급했다. 선언문은 "나토와 동맹국들은 5G를 포함해 우리의 통신 안보를 보장하고 안전하고 탄력적인 시스템에 의존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전념한다"고 명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나토 회의에서도 유럽 각국이 5G 통신망에서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를 배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화웨이 장비를 쓰는 것이 우리의 국가 안보 이익이나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영미권 5개국 기밀 정보 동맹체) 안보 파트너 국가들과의 협력에 악영향을 줘선 안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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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출신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정치인들은 수사만 화려하고 결과물은 빈약해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완전 그 반대였다"며 런던 선언문을 높이 평가했다. 스톨텐베르그 총장은 더 나아가 중국을 향해 "무기 협약에 가입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냉전 시절 소련과 맺었던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을 탈퇴한 뒤 중국 인근 국가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을 언급하며 중국에 INF 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맺자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나온 나토 수장의 언급이라 예사롭지 않다.

■ '홍콩 지지' 요청에 화답한 메르켈 ... "유럽, 중국에 공동 대응해야"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 홀대 논란 속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외쳤고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에 동조하면서 유럽연합의 쌍두마차 두 나라가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1년 뒤 이 세 명의 정상이 함께 서명한 선언문은 사실상 중국을 나토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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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총리가 총리 관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 (지난달 28일)
변화의 조짐은 지난달 27일 독일 연방 하원에서 한 메르켈 총리의 연설에서 이미 감지됐다. 메르켈 총리는 이 연설에서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개별적으로 펼치면서 서로 다른 신호를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위험한 일이다. 개별적인 대응은 중국에 재앙이 아니라 유럽에 재앙"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과 무역 전쟁 중인 중국이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에 구애의 손길을 내미는 가운데 나온 입장이다. 유럽이 중국을 상대로 공동 대응할 문제로 메르켈 총리는 5G 통신 네트워크 구축 과정에서의 보안 기준도 언급했다.

유럽 동맹국들에 '중국 당국의 스파이 활동에 이용될 수 있다'며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메르켈 총리이기에 그의 '중국 견제' 발언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메르켈 총리가 중국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기 전 눈에 띄는 사건이 있었다. 홍콩 시위의 주축 운동가인 조슈아 웡이 그에게 지지를 요청한 일이었다.

홍콩인들이 독일 총리 관저 앞에서 ‘홍콩 지지’를 촉구하고 있다 (9월 5일)

베이징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가 시진핑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9월 6일)
지난 9월 4일, 조슈아 웡은 메르켈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다. 웡은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인 사실을 거론하면서 "당신은 독재 정권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다. 중국은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독일도 중국과 거래하기 전 방심해선 안 된다"고 썼다. 서한을 받은 다음 날 중국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리커창 총리를 만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홍콩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해결책은 대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 폭력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인권 이슈' 적극 문제 삼는 유럽 ... EU-중국 관계 '복병'되나

유로존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도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 독일 경제는 올해 2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며 2009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가파른 침체를 겪고 있다. 자국의 기업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에 간 상황에서도 EU 수장 국가의 정상으로서 웡의 메시지에 화답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중국 현지에서 인권 변호사들도 만나 중국의 인권과 종교 자유 억압, 인터넷 검열 문제 등을 논의했다.

조슈아 웡(왼쪽)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 (베를린 연방 의사당, 지난 9월)
메리켈 총리가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조슈아 웡이 독일을 찾았다. 웡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을 만났으며 독일의 보수 성향 미디어그룹 행사에 참석해 '행정장관 직선제를 이뤄낼 때까지 시위를 지속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외교부는 "독일이 홍콩의 분열 분자가 입국해 반중국 분열 행위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 강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명한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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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태 같은 중국 '인권' 문제를 고리로 한 중국과의 마찰음은 유럽 다른 국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홍콩 시위를 인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던 독일과 영국은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중국 공산당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비밀 강제 수용소 운영 지침이 담긴 기밀문서를 폭로하자 "수용소에 대한 유엔의 제한받지 않는 접근을 즉각 보장하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했다.

EU에서 친중 성향이 가장 강한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 상원은 지난달 28일 조슈아 웡과 화상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웡은 일부 이탈리아 업체가 중국 경찰에 시위대 진압 장비를 판매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탈리아 같은 책임 있는 나라가 자유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주재 중국 대사관이 "이탈리아 정치인들이 웡과 화상 회의를 한 것은 무책임한 행태"라며 발끈하자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탈리아 의회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맞받았다.

■ '트럼프와 갈등' 마크롱에 손 내민 중국 ... 메르켈, '일대일로'에 시큰둥

이탈리아는 G7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일대일로에 동참하는 국가다. 미국과의 무역전쟁이 고조되던 지난 3월 시진핑 주석이 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이탈리아였다. 유로존 위기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탈리아는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중국 자본에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해왔다. 이런 이탈리아마저 홍콩 문제에 대해 고자세로 나오자 중국은 유럽 쪽의 '중국 인권 문제 제기'에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나토 회의를 앞둔 지난 2일에는 유럽연합을 향해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함께 수호하자'며 구애를 보냈다. 미국에 맞설 수 있도록 중국 편이 돼달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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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은퇴 선언 이후 제기돼온 메르켈 총리 건강이상설 등 국내 정치 문제까지 겹쳐 독일이 비틀거리자 프랑스의 입김이 세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통합'을 주창하고 나토군·방위비 문제 등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유럽의 새로운 리더를 자처해왔다. 중국은 최근 이 점을 공략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국빈만찬 뒤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상하이, 지난달 6일)
지난달 초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독일 합작인 에어버스 등 유럽 기업 대표들을 이끌고 중국을 찾았다. 당시 중국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에 버금가는 특급 의전을 해줘 화제가 됐다. 시진핑 주석도 3월 유럽 순방 때 마크롱 대통령을 찾았다.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시 주석 파리 방문에 맞춰 메르켈 총리와 융커 EU 집행위원장을 초청했다.

당시에도 메르켈 총리는 "유럽이 일대일로에서 역할을 하려면 '호혜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이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융커 위원장도 "EU와 중국 간 보다 균형 잡힌 관계가 필요하다"며 거리를 뒀다. 융커 위원장은 중국의 개방 속도가 늦은데 대한 불만도 표시했다. 에어버스 여객기 대량 구매 약속 등 중국의 파격적인 공세에도 독일과 EU는 일대일로 협조 요청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다.

■ "일대일로는 약탈 구조" ... 나토, 미·중 갈등 속 '새로운 길' 찾나

미국은 틈 나는 대로 일대일로에 대한 방해 작전을 펴왔다. 이를 위해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10월에는 몬테네그로와 북마케도니아를 찾아 "비리 및 부채와 싸우지 않길 바란다. 일대일로 위험을 경계하라"고 촉구했다.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결국 중국이 인프라를 빼앗아가는 약탈적 구조'라고 주장해왔다. 특히, 재정이 어려운 나라에는 '중국의 인프라 사업 확보를 위한 뇌물 전략'을 경고해왔다.

나토 회원국 가운데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국가들을 보면 하나같이 재정 건전성이 낮은 게 사실이다. 일례로 그리스의 경우 국가 최대 항구인 피레우스항 운영권을 중국 원양운수 그룹에 내주는 등 중국 자본 잠식이 심각한 수준이다. '유럽이 중국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지난달 연설은 '재정이 어려운 나라가 중국의 주요 표적이니 조심하자'는 경계심의 표출이었다. 조슈아 웡도 이탈리아를 찾았을 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며 일대일로에 대한 경고를 빼놓지 않았다.

마크롱도 일대일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힌 적은 없다. 시 주석을 만날 때면 "'프랑스와 중국' 간 협력을 뛰어넘는 'EU-중국' 관계"를 강조했다. 화법만 다를 뿐, 오히려 메르켈의 'EU 공동 대응'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는 중국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대열에도 빠지지 않았다. 프랑스 외교부는 홍콩 사태의 평화적 해법을 강조한 데 이어 신장 위구르 수용소 문제가 불거지자 영국·독일과 함께 "중국에 자의적인 대규모 구금을 끝낼 것을 요구한다"는 입장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의 뒤 기념촬영을 위해 자신의 자리로 향하고 있다 (4일)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 전 "나토가 뇌사 상태에 빠져있다"고 말해 트럼프 대통령과 불편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도 남중국해에 항모전단을 보내 미국과 함께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펴고 있다. 프랑스군은 최근 인도양에서 미국, 일본, 호주 등과 함께 연합 해상훈련도 펼쳤다. 나토군은 지금도 확실히 살아있다. 나토 뒷말 영상에서 드러났듯, 유럽 정상들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감정이나 신념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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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장과 자본을 가진 중국에 저자세였던 유럽이 '인권' 문제로 중국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국 주저앉히기에 올인한 미국의 전략에 부합하는 내용의 선언문도 내놨다. 미국의 요구로 형성된 흐름인지 알 수 없지만, 주적이었던 소련 해체 이후 정체성이 모호해진 나토의 새로운 방향타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나토는 미국과 유럽이 70년 넘게 유지해온 군사동맹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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