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신탁 판매 허용해달라”…못 이긴척 은행 손 들어준 금융당국

입력 2019.12.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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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손실률 52.7%에 최대 손실률은 98.1%, 지난달까지 손실이 확정된 상품 규모만 2천80억 원. 해외금리연계 DLF는 국내 금융소비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다행히 최근엔 손실을 일부 회복하는 추세지만 이미 손실이 확정된 피해자들의 시간은 돌릴 수 없습니다.

금융감독원이 몇 달에 걸쳐 조사한 결과 DLF 사태는 금융기관들의 구조적인 문제와 도덕적 해이가 결합된 총체적인 비극이었습니다. 금융기관들은 투자 경험이 없고 난청인 70대 경증 치매 환자에게도 DLF를 팔았습니다. 치매 환자의 투자성향을 적극투자형으로 작성하고, 별도의 설명 없이 '위험등급 초과 가입 확인서'에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금감원은 본점 차원의 과도한 수익 추구와 심각한 내부 통제 부실이 대규모 불완전판매로 이어졌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DLF 투자 손실에 대해 역대 최대인 최고 80% 배상까지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면 안 되겠죠.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단순히 내부적인 해결에만 맡기기엔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이번엔 금융위 차례…분쟁조정 다음은 '제도 개선'

공은 금융위로 넘어갔습니다. 금융위는 지난달 14일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고난도 투자 상품으로 분류되는 사모펀드와 신탁 등은 은행과 보험사에서 팔 수 없고, 일반 투자자의 사모펀드 최소 투자금액을 1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상향해 투자의 문턱을 높이는 게 요지였습니다. 평생 어렵게 모은 쌈짓돈이나 퇴직금을 덜컥 투자했다가 허망하게 날리는 상황을 막겠다는 겁니다.

금융회사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행위준칙'을 마련해 이사회나 CEO의 역할을 명확히 명시하고, 불완전판매에 대해 징벌적 과징금(최대 50%)도 도입했습니다.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입증 책임도 소비자에서 판매업자로 바뀌었습니다.

예상보다 강한 규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금융사고가 터졌다고 산업을 죽일 수 있는 사후 규제를 내놓는 건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특히 은행권 반발이 심했고, 이에 금융위는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방안을 내놓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달까지 진행된 상황입니다.

은행 요구는 딱 하나 "신탁 판매는 허용해달라"


은행이 요구한 건 주가연계신탁, ELT 판매였습니다. ELT는 최근 5년간 판매 잔액이 194조 원에 이르고, 지난해에만 40조 원을 넘게 판 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수료를 1% 수준으로만 가정해도 약 4,000억 원의 수수료가 확보되는 상품이었이었으니까 은행 입장에선 ELT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탁은 은행이 고객과 일대일로 계약해 고객 재산을 운용 관리하는 상품입니다. 연계형 파생상품(ELS, DLS)을 펀드로 팔면 주가연계펀드(ELF), 해외금리연계펀드(DLF)가 되고, 신탁으로 팔면 주가연계신탁(ELT), 파생결합증권신탁(DLT)이 됩니다.

문제는 ELT도 대부분 원금 손실 가능성이 20~30%를 넘는 고난도 투자상품으로 분류된다는 점입니다. 금융위도 애초에 신탁은 고객과 일대일로 계약하고 자산을 운용한다는 측면에서 공모와 사모를 구분할 수 없고, 고위험 상품이 담길 여지가 크다고 봤기 때문에 은행 판매를 금지했지만 은행들의 반발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못 이긴 척 은행 손들어준 금융당국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은행의 동정론이 결국 먹혔습니다. 금융위가 공모형 ELS(주가연계증권)를 담은 신탁(ELT)의 은행 판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한 겁니다.

기초 자산을 주요국 대표 주가지수인 5개(KOSPI200, S&P500, Eurostoxx50, HSCEI, NIKKEI225)로 한정하고, 공모로 발행되며 손실 배수가 1 이하인 파생결합증권을 담은 신탁 상품에 한해서만 은행 판매를 허용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ELT 판매 규모도 올해 11월 말 잔액(37조∼40조 원) 이내로 제한됩니다. 마구잡이로 신규 가입을 시켜서 40조 원이 넘는 규모로 확대시키지는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같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비자 보호 가치를 큰소리쳤던 지난달의 호기가 다소 퇴색된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금융기관 영업을 고려해 정부 정책을 펼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쳐서 기대가 컸던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특히 DLF로 사고 친 우리은행이나 하나은행도 특별한 페널티 없이 똑같이 ELT를 팔 수 있게 허용된 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두 은행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DLF 피해자들의 돈은 되돌릴 수 없지만, 은행들은 아무런 금전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은행권에선 DLF 같은 사태가 재발해도 '우린 별 피해 없어. 제도만 또 바뀌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은행권이 또다시 탐욕에 눈이 멀면 그땐 누가 책임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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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위험 신탁 판매 허용해달라”…못 이긴척 은행 손 들어준 금융당국
    • 입력 2019-12-12 17:57:51
    취재K
평균 손실률 52.7%에 최대 손실률은 98.1%, 지난달까지 손실이 확정된 상품 규모만 2천80억 원. 해외금리연계 DLF는 국내 금융소비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다행히 최근엔 손실을 일부 회복하는 추세지만 이미 손실이 확정된 피해자들의 시간은 돌릴 수 없습니다.

금융감독원이 몇 달에 걸쳐 조사한 결과 DLF 사태는 금융기관들의 구조적인 문제와 도덕적 해이가 결합된 총체적인 비극이었습니다. 금융기관들은 투자 경험이 없고 난청인 70대 경증 치매 환자에게도 DLF를 팔았습니다. 치매 환자의 투자성향을 적극투자형으로 작성하고, 별도의 설명 없이 '위험등급 초과 가입 확인서'에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금감원은 본점 차원의 과도한 수익 추구와 심각한 내부 통제 부실이 대규모 불완전판매로 이어졌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DLF 투자 손실에 대해 역대 최대인 최고 80% 배상까지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면 안 되겠죠.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단순히 내부적인 해결에만 맡기기엔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이번엔 금융위 차례…분쟁조정 다음은 '제도 개선'

공은 금융위로 넘어갔습니다. 금융위는 지난달 14일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고난도 투자 상품으로 분류되는 사모펀드와 신탁 등은 은행과 보험사에서 팔 수 없고, 일반 투자자의 사모펀드 최소 투자금액을 1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상향해 투자의 문턱을 높이는 게 요지였습니다. 평생 어렵게 모은 쌈짓돈이나 퇴직금을 덜컥 투자했다가 허망하게 날리는 상황을 막겠다는 겁니다.

금융회사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행위준칙'을 마련해 이사회나 CEO의 역할을 명확히 명시하고, 불완전판매에 대해 징벌적 과징금(최대 50%)도 도입했습니다.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입증 책임도 소비자에서 판매업자로 바뀌었습니다.

예상보다 강한 규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금융사고가 터졌다고 산업을 죽일 수 있는 사후 규제를 내놓는 건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특히 은행권 반발이 심했고, 이에 금융위는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방안을 내놓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달까지 진행된 상황입니다.

은행 요구는 딱 하나 "신탁 판매는 허용해달라"


은행이 요구한 건 주가연계신탁, ELT 판매였습니다. ELT는 최근 5년간 판매 잔액이 194조 원에 이르고, 지난해에만 40조 원을 넘게 판 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수료를 1% 수준으로만 가정해도 약 4,000억 원의 수수료가 확보되는 상품이었이었으니까 은행 입장에선 ELT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탁은 은행이 고객과 일대일로 계약해 고객 재산을 운용 관리하는 상품입니다. 연계형 파생상품(ELS, DLS)을 펀드로 팔면 주가연계펀드(ELF), 해외금리연계펀드(DLF)가 되고, 신탁으로 팔면 주가연계신탁(ELT), 파생결합증권신탁(DLT)이 됩니다.

문제는 ELT도 대부분 원금 손실 가능성이 20~30%를 넘는 고난도 투자상품으로 분류된다는 점입니다. 금융위도 애초에 신탁은 고객과 일대일로 계약하고 자산을 운용한다는 측면에서 공모와 사모를 구분할 수 없고, 고위험 상품이 담길 여지가 크다고 봤기 때문에 은행 판매를 금지했지만 은행들의 반발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못 이긴 척 은행 손들어준 금융당국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은행의 동정론이 결국 먹혔습니다. 금융위가 공모형 ELS(주가연계증권)를 담은 신탁(ELT)의 은행 판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한 겁니다.

기초 자산을 주요국 대표 주가지수인 5개(KOSPI200, S&P500, Eurostoxx50, HSCEI, NIKKEI225)로 한정하고, 공모로 발행되며 손실 배수가 1 이하인 파생결합증권을 담은 신탁 상품에 한해서만 은행 판매를 허용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ELT 판매 규모도 올해 11월 말 잔액(37조∼40조 원) 이내로 제한됩니다. 마구잡이로 신규 가입을 시켜서 40조 원이 넘는 규모로 확대시키지는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같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비자 보호 가치를 큰소리쳤던 지난달의 호기가 다소 퇴색된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금융기관 영업을 고려해 정부 정책을 펼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쳐서 기대가 컸던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특히 DLF로 사고 친 우리은행이나 하나은행도 특별한 페널티 없이 똑같이 ELT를 팔 수 있게 허용된 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두 은행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DLF 피해자들의 돈은 되돌릴 수 없지만, 은행들은 아무런 금전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은행권에선 DLF 같은 사태가 재발해도 '우린 별 피해 없어. 제도만 또 바뀌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은행권이 또다시 탐욕에 눈이 멀면 그땐 누가 책임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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