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위’ 전문 변호사·보험까지 등장…생기부가 뭐기에

입력 2019.12.17 (11:2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학폭위' 징계받으면 상급학교 진학은 끝?

"수시를 3년 동안 바라보고 열심히 했는데 학폭위 결정 때문에 제 인생의 방향이 바뀐다는 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A 학생. 친구와 다투었다가 학교폭력으로 신고돼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6호 처분인 '출석정지'를 받았습니다. 출석정지를 받은 사실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도 기재됐고, 출석하지 못한 기간은 결석으로 처리됐습니다.

A 학생은 학생회장으로 선출돼 학생회 활동도 활발히 했지만 수시 전형으로 지원한 대학에서 모두 떨어졌습니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란 학교 폭력 발생 시 분쟁을 해결하고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에게 징계나 전학 등 처분을 내리는 심의기구입니다. 짧게 '학폭위'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며 학교마다 설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고교나 대학 입시에서 생활기록부의 비중이 크다 보니, 학폭위 처분의 생활기록부 기재를 두고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A 학생도 학폭위 처분이 잘못됐으니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생기부 기재 지워달라" vs "교육부 훈령 탓 못 지운다"

A 학생의 경우 아직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A 학생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효력정지 가처분을 결정했습니다. 학폭위 징계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법원의 결정에도 학교 측과 경기도교육청은 교육부 훈령에 따라 생기부 기재를 지울 수 없다며 학생 측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2018년 서울의 한 중학교 학폭위에서 서면 사과와 출석정지 처분을 받은 B 학생도 '학폭위 구성 절차가 위법하고 처분이 과하다'며 소를 제기했습니다. 효력정지 가처분도 함께 신청했습니다.

재판부는 지난 7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고, 지난 10월에는 학폭위 처분을 모두 취소하라며 B 학생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은 효력정지 가처분이 내려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B 학생의 생기부 기재를 삭제했습니다. B 학생 부모의 요청을 외면하다가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을 받은 뒤에야 삭제한 겁니다.

공문 발송이 하루만 늦어졌어도 B 학생은 진학하려던 자사고에 원서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B 학생의 부모는 "(아이가) '아빠 죽고 싶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힘없고 능력 없는 부모들은 학교를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생각이…."라며 울먹였습니다.

'학폭위 전문 변호사', '특약 보험'까지 생겨

학폭위가 법률 분쟁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새로운 법률시장이 형성됐습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학폭위'를 검색하면 '학폭위 전문 변호사'라는 광고가 수두룩합니다. '교사 출신 변호사', '학폭위 위원 출신 변호사'라는 문구도 눈에 띕니다.

학폭과 관련된 특약 보험상품까지 생겨났습니다. 학폭 피해 학생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거나 교사들이 학폭위 소송에 대응할 때 법률비용을 지원하는 상품입니다.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학폭위 심의 건수는 40% 가까이 증가했고, 이에 불복해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대법원 인터넷 판결 열람 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1년간 학폭위 처분에 대해 무효나 취소,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은 공개된 것만 150건이 넘습니다. 특히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학폭위 처분을 삭제하기 위한 소송이 많습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주로 선도부장 교사들이 소송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학폭위 특약 보험에 많이 가입한다"며 "교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이 엄청나다"고 하소연합니다.

'자치해결제', '생기부 기재 1회 유보' 도입...우려 목소리도

박백범 교육부 차관이 지난 1월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학교폭력 제도개선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백범 교육부 차관이 지난 1월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학교폭력 제도개선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올해 2학기부터 '학교장 자치해결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경미한 학교 폭력 사안은 학폭위를 열지 않고 학교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겁니다.

또 내년 1학기부터는 서면 사과 등 가벼운 징계 처분에 대해서는 1회에 한해 생기부 기재를 유보하기로 하는 제도가 입법 예고돼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교폭력예방연구소 부소장을 맡은 정제영 교수(교육학과)는 "제도 개선을 통해 학폭위를 둘러싼 분쟁이 조금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합니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조정실 회장은 "생기부 기재로 가해 학생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피해 학생 부모들도 반대한다"면서도 "다만, 경미한 사안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조 회장은 "가벼운 사안처럼 보여도 피해 학생에게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며 "경미한지 여부를 피해 학생 입장에서 판단했으면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학폭위’ 전문 변호사·보험까지 등장…생기부가 뭐기에
    • 입력 2019-12-17 11:27:59
    취재K
'학폭위' 징계받으면 상급학교 진학은 끝?

"수시를 3년 동안 바라보고 열심히 했는데 학폭위 결정 때문에 제 인생의 방향이 바뀐다는 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A 학생. 친구와 다투었다가 학교폭력으로 신고돼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6호 처분인 '출석정지'를 받았습니다. 출석정지를 받은 사실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도 기재됐고, 출석하지 못한 기간은 결석으로 처리됐습니다.

A 학생은 학생회장으로 선출돼 학생회 활동도 활발히 했지만 수시 전형으로 지원한 대학에서 모두 떨어졌습니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란 학교 폭력 발생 시 분쟁을 해결하고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에게 징계나 전학 등 처분을 내리는 심의기구입니다. 짧게 '학폭위'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며 학교마다 설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고교나 대학 입시에서 생활기록부의 비중이 크다 보니, 학폭위 처분의 생활기록부 기재를 두고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A 학생도 학폭위 처분이 잘못됐으니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생기부 기재 지워달라" vs "교육부 훈령 탓 못 지운다"

A 학생의 경우 아직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A 학생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효력정지 가처분을 결정했습니다. 학폭위 징계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법원의 결정에도 학교 측과 경기도교육청은 교육부 훈령에 따라 생기부 기재를 지울 수 없다며 학생 측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2018년 서울의 한 중학교 학폭위에서 서면 사과와 출석정지 처분을 받은 B 학생도 '학폭위 구성 절차가 위법하고 처분이 과하다'며 소를 제기했습니다. 효력정지 가처분도 함께 신청했습니다.

재판부는 지난 7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고, 지난 10월에는 학폭위 처분을 모두 취소하라며 B 학생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은 효력정지 가처분이 내려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B 학생의 생기부 기재를 삭제했습니다. B 학생 부모의 요청을 외면하다가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을 받은 뒤에야 삭제한 겁니다.

공문 발송이 하루만 늦어졌어도 B 학생은 진학하려던 자사고에 원서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B 학생의 부모는 "(아이가) '아빠 죽고 싶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힘없고 능력 없는 부모들은 학교를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생각이…."라며 울먹였습니다.

'학폭위 전문 변호사', '특약 보험'까지 생겨

학폭위가 법률 분쟁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새로운 법률시장이 형성됐습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학폭위'를 검색하면 '학폭위 전문 변호사'라는 광고가 수두룩합니다. '교사 출신 변호사', '학폭위 위원 출신 변호사'라는 문구도 눈에 띕니다.

학폭과 관련된 특약 보험상품까지 생겨났습니다. 학폭 피해 학생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거나 교사들이 학폭위 소송에 대응할 때 법률비용을 지원하는 상품입니다.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학폭위 심의 건수는 40% 가까이 증가했고, 이에 불복해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대법원 인터넷 판결 열람 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1년간 학폭위 처분에 대해 무효나 취소,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은 공개된 것만 150건이 넘습니다. 특히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학폭위 처분을 삭제하기 위한 소송이 많습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주로 선도부장 교사들이 소송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학폭위 특약 보험에 많이 가입한다"며 "교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이 엄청나다"고 하소연합니다.

'자치해결제', '생기부 기재 1회 유보' 도입...우려 목소리도

박백범 교육부 차관이 지난 1월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학교폭력 제도개선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올해 2학기부터 '학교장 자치해결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경미한 학교 폭력 사안은 학폭위를 열지 않고 학교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겁니다.

또 내년 1학기부터는 서면 사과 등 가벼운 징계 처분에 대해서는 1회에 한해 생기부 기재를 유보하기로 하는 제도가 입법 예고돼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교폭력예방연구소 부소장을 맡은 정제영 교수(교육학과)는 "제도 개선을 통해 학폭위를 둘러싼 분쟁이 조금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합니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조정실 회장은 "생기부 기재로 가해 학생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피해 학생 부모들도 반대한다"면서도 "다만, 경미한 사안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조 회장은 "가벼운 사안처럼 보여도 피해 학생에게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며 "경미한지 여부를 피해 학생 입장에서 판단했으면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