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나 죽고 나거든…” 문화재 복원에 쫓겨나는 노인들

입력 2019.12.17 (15:29) 수정 2019.12.1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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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 있는 '장시마을'

평화롭던 시골 마을 분위기는 최근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택 사이 사이에 커다란 공터가 생겼고, 흙도 여기저기 파헤쳐졌습니다. 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김해시 대동면 장시마을에 가야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김해시 대동면 장시마을에 가야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가야사 복원에 '쫓겨나는' 마을 주민들

장시마을에는 가야시대 유골이 발견된 '예안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마을은 2005년 처음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최근 정부가 가야사 복원사업을 본격 추진하며 마을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확대됐습니다.

그 탓에 장시마을 토지와 주택은 모두 수용돼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났고, 현재 이 마을 22가구 가운데 13가구 30여 명만 남았습니다. 장시마을에서 50년이 넘도록 사셨던 추창국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시마을 주민 추창국 할아버지장시마을 주민 추창국 할아버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파요. 자식들 여기서 다 낳아서 전부 키우고, 친구들은 뿔뿔이 다 헤어지고…. 이게 뭡니까." (77살, 추창국 할아버지)

■ "이주단지는 검토사항일 뿐, 시의 의무는 아냐"

주민들이 애초 김해시가 거론한 공동 이주대책을 믿고 기다려왔습니다.

장시마을 보상 논의가 시작되던 2007년. 김해시는 주민설명회에서 보상금과 함께 공동 이주단지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남은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 몇몇은 보상금을 받고 토지와 주택의 권리를 지자체에 넘겼습니다.

김해시가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한 주민건의사항 처리 계획서김해시가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한 주민건의사항 처리 계획서

하지만 김해시는 보상금만 지급할 뿐, 이주대책은 마련해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가야사 복원사업 관련 예산 확보가 어려워지고 담당자도 수차례 바뀌면서, 이주 대책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김해시청 관계자는 "당시 이주대책을 검토한다고 한 것일 뿐 시의 의무는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어르신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 전수 조사도 없이 '가구 수 부족'?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어르신들이 새로이 정착할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기자의 질문에 김해시는 "현재 남은 가구 수가 부족해 공동 이주단지 조성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법에 따라 공동 이주단지를 조성하려면 10가구 이상이 돼야 하는데, 이미 이사를 했거나 이사 계획이 있는 가구가 많아 실제 이주단지 조성을 원하는 세대는 4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장시마을 주민들이 타작을 마치고 함께 찍은 사진장시마을 주민들이 타작을 마치고 함께 찍은 사진

하지만 선뜻 이해되는 답변은 아니었습니다. 취재현장에서 들었던 어르신들의 말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공동 이주단지가 마련되지 않으니, 다들 어쩔 수 없이 이사계획을 세워뒀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최근 시에서 공동 이주단지에 들어올 의사가 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해시가 제대로 된 전수조사도 없이 '가구 수 부족'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살다가 가는 것, 그게 소원이죠"

그간의 사정과 관계없이,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장시마을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보상절차가 전부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김해시는 이미 마을 주민들에게 내년 8월까지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했습니다.

이 마을 주민 30여 명은 대부분 80~90대 고령, 젊어야 60~70대입니다. 어르신들은 이제 고향 땅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조성수 할아버지조성수 할아버지

"소원 같은 것은 뭐,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살다가 가는 것이죠. 그게 소원이죠." (93살, 조성수 할아버지)

가야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문화재 복원 사업. 그 뒤편에는 평생의 정든 터전에서 떠나야 하는 이들의 눈물이 서려 있지만, 누구도 닦아 줄 수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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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7 15:29:28
    • 수정2019-12-17 15:31:27
    취재후·사건후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 있는 '장시마을'

평화롭던 시골 마을 분위기는 최근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택 사이 사이에 커다란 공터가 생겼고, 흙도 여기저기 파헤쳐졌습니다. 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김해시 대동면 장시마을에 가야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가야사 복원에 '쫓겨나는' 마을 주민들

장시마을에는 가야시대 유골이 발견된 '예안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마을은 2005년 처음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최근 정부가 가야사 복원사업을 본격 추진하며 마을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확대됐습니다.

그 탓에 장시마을 토지와 주택은 모두 수용돼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났고, 현재 이 마을 22가구 가운데 13가구 30여 명만 남았습니다. 장시마을에서 50년이 넘도록 사셨던 추창국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시마을 주민 추창국 할아버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파요. 자식들 여기서 다 낳아서 전부 키우고, 친구들은 뿔뿔이 다 헤어지고…. 이게 뭡니까." (77살, 추창국 할아버지)

■ "이주단지는 검토사항일 뿐, 시의 의무는 아냐"

주민들이 애초 김해시가 거론한 공동 이주대책을 믿고 기다려왔습니다.

장시마을 보상 논의가 시작되던 2007년. 김해시는 주민설명회에서 보상금과 함께 공동 이주단지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남은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 몇몇은 보상금을 받고 토지와 주택의 권리를 지자체에 넘겼습니다.

김해시가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한 주민건의사항 처리 계획서
하지만 김해시는 보상금만 지급할 뿐, 이주대책은 마련해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가야사 복원사업 관련 예산 확보가 어려워지고 담당자도 수차례 바뀌면서, 이주 대책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김해시청 관계자는 "당시 이주대책을 검토한다고 한 것일 뿐 시의 의무는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어르신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 전수 조사도 없이 '가구 수 부족'?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어르신들이 새로이 정착할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기자의 질문에 김해시는 "현재 남은 가구 수가 부족해 공동 이주단지 조성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법에 따라 공동 이주단지를 조성하려면 10가구 이상이 돼야 하는데, 이미 이사를 했거나 이사 계획이 있는 가구가 많아 실제 이주단지 조성을 원하는 세대는 4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장시마을 주민들이 타작을 마치고 함께 찍은 사진
하지만 선뜻 이해되는 답변은 아니었습니다. 취재현장에서 들었던 어르신들의 말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공동 이주단지가 마련되지 않으니, 다들 어쩔 수 없이 이사계획을 세워뒀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최근 시에서 공동 이주단지에 들어올 의사가 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해시가 제대로 된 전수조사도 없이 '가구 수 부족'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살다가 가는 것, 그게 소원이죠"

그간의 사정과 관계없이,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장시마을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보상절차가 전부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김해시는 이미 마을 주민들에게 내년 8월까지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했습니다.

이 마을 주민 30여 명은 대부분 80~90대 고령, 젊어야 60~70대입니다. 어르신들은 이제 고향 땅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조성수 할아버지
"소원 같은 것은 뭐,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살다가 가는 것이죠. 그게 소원이죠." (93살, 조성수 할아버지)

가야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문화재 복원 사업. 그 뒤편에는 평생의 정든 터전에서 떠나야 하는 이들의 눈물이 서려 있지만, 누구도 닦아 줄 수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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