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수사 뒤 후원 급감…위기의 ‘베이비박스’ 가보니

입력 2019.12.18 (06:02) 수정 2019.12.18 (10:5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년 12월 9일, 왕자님, 시설'

아직 황달기가 빠지지 않은 유찬이(가명) 머리맡엔 명찰이 하나 달려있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날짜와 성별인데, '시설'이란 글씨는 유찬이가 곧 보육원으로 갈 예정이라는 뜻입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유찬이는 다른 가정에 입양될 수 없습니다. 출생신고는 현행법상 입양의 필수 요건입니다. 유찬이의 엄마나 아빠가 언제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말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 이곳에서 키울 수도 없습니다.

며칠 뒤면 유찬이는 서울시아동복지센터를 거쳐 아동양육시설로 가야합니다.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유찬이는 통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지난 9일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유찬이(가명)가 침대에 누워 있다.지난 9일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유찬이(가명)가 침대에 누워 있다.

태어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찬이는 올해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158번째 아이입니다. 유찬이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모두 1,674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예년같으면 사흘에 2명꼴, 연평균 200명 정도의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맡겨졌는데, 올해는 50명 정도 줄었습니다.

후원금·후원물품 급감..베이비박스엔 무슨일이?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주사랑공동체 물품창고에 쌓인 기저귀와 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들어 주사랑공동체에 들어오는 후원품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임선주 베이비박스 운영팀장은 "평소 같으면 선반 아래까지 물품이 쌓여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선반에도 비어 있는 곳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창고에 있는 기저귀와 분유는 '베이비케어 키트'에 담겨 매달 20일쯤 90여개 가정으로 배송됩니다. 이 키트를 받는 사람들은 자녀 양육을 포기하고 아이를 맡기러 이곳을 찾았다가 마음을 바꾼 부모들인데, 대부분 미혼모입니다.

키트는 아이의 성장 속도를 고려해 기저귀 크기나 분유량을 다르게 담습니다. 보통 한 가정당 기저귀 5박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두 합치면 450개가 필요합니다. 부쩍 줄어든 후원 물품에 임 팀장은 벌써 다음달과 다다음달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주사랑공동체에서 아이를 직접 키우는 부모들에게 보내주는 베이비케어 키트.주사랑공동체에서 아이를 직접 키우는 부모들에게 보내주는 베이비케어 키트.

이번달 키트엔 아동복, 장난감 등이 함께 담깁니다. 모두 후원 받은 물품들입니다. 인근 복지관에선 어르신들이 뜨게질로 짠 발싸개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주사랑공동체 관계자는 "후원금과 물품이 줄어든 건 맞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버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주사랑공동체는, 대표인 이종락 목사가 경찰 수사를 받았던 여파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이 목사는 기초생활수급비 부정 수급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앞서 금천구청은 이 목사가 2014년 7월부터 올해 4월까지 소득신고 의무를 어긴 채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유지하면서 기초생활수급비로 2억900만원을 부당하게 받았다며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이 목사 측이 위법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습니다.

이종락 목사이종락 목사

이종락 목사 "법에 무지…아기들이 생명을 잃어선 안돼"

이 목사는 그동안 언론에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꺼려왔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변명처럼 들리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게 주사랑공동체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기자를 만난 이 목사는 우선 "제가 참 부족해서 그렇다"면서 "이번 일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초생활수급비 부정 수급에 대해선 법에 무지했던 부분이 있었고, 구청에서 우선 청구한 수급비는 반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머지 수급비도 고지서가 나오는 대로 분할해서 반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목사는 이어 "그동안 함께 기도하고 봉사했던 분들이 이 일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분이 있다"면서 "다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생명을 살리는 행동에 동참해주셨으면 좋지 않나 생각하고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


올해로 10년이 된 베이비박스 운영과 관련해선 '아동 유기'를 부추긴다는 논란이 여전합니다.

이에 대해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서 "출산한 아이를 키울 여건이 되지 않는 산모와 영아를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이 제정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민간에서 해오던 이같은 일을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는 특별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지금 재산적으로 상당히 어렵고 3년 동안 마이너스 상태"라면서도 "미혼모도, 신생아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다"며 베이비박스 운영에 대한 의지를 거듭 드러냈습니다.

법에 무지했다고 말하지만, 이 목사 스스로 인정했듯이 잘못한 일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아기와 미혼모를 돕겠다는 취지로 만든 베이비박스에 대한 후원마저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게 된 '베이비박스' 해법은 없을까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경찰 수사 뒤 후원 급감…위기의 ‘베이비박스’ 가보니
    • 입력 2019-12-18 06:02:51
    • 수정2019-12-18 10:59:45
    취재K
'2019년 12월 9일, 왕자님, 시설'

아직 황달기가 빠지지 않은 유찬이(가명) 머리맡엔 명찰이 하나 달려있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날짜와 성별인데, '시설'이란 글씨는 유찬이가 곧 보육원으로 갈 예정이라는 뜻입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유찬이는 다른 가정에 입양될 수 없습니다. 출생신고는 현행법상 입양의 필수 요건입니다. 유찬이의 엄마나 아빠가 언제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말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 이곳에서 키울 수도 없습니다.

며칠 뒤면 유찬이는 서울시아동복지센터를 거쳐 아동양육시설로 가야합니다.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유찬이는 통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지난 9일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유찬이(가명)가 침대에 누워 있다.
태어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찬이는 올해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158번째 아이입니다. 유찬이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모두 1,674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예년같으면 사흘에 2명꼴, 연평균 200명 정도의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맡겨졌는데, 올해는 50명 정도 줄었습니다.

후원금·후원물품 급감..베이비박스엔 무슨일이?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주사랑공동체 물품창고에 쌓인 기저귀와 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들어 주사랑공동체에 들어오는 후원품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임선주 베이비박스 운영팀장은 "평소 같으면 선반 아래까지 물품이 쌓여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선반에도 비어 있는 곳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창고에 있는 기저귀와 분유는 '베이비케어 키트'에 담겨 매달 20일쯤 90여개 가정으로 배송됩니다. 이 키트를 받는 사람들은 자녀 양육을 포기하고 아이를 맡기러 이곳을 찾았다가 마음을 바꾼 부모들인데, 대부분 미혼모입니다.

키트는 아이의 성장 속도를 고려해 기저귀 크기나 분유량을 다르게 담습니다. 보통 한 가정당 기저귀 5박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두 합치면 450개가 필요합니다. 부쩍 줄어든 후원 물품에 임 팀장은 벌써 다음달과 다다음달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주사랑공동체에서 아이를 직접 키우는 부모들에게 보내주는 베이비케어 키트.
이번달 키트엔 아동복, 장난감 등이 함께 담깁니다. 모두 후원 받은 물품들입니다. 인근 복지관에선 어르신들이 뜨게질로 짠 발싸개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주사랑공동체 관계자는 "후원금과 물품이 줄어든 건 맞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버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주사랑공동체는, 대표인 이종락 목사가 경찰 수사를 받았던 여파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이 목사는 기초생활수급비 부정 수급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앞서 금천구청은 이 목사가 2014년 7월부터 올해 4월까지 소득신고 의무를 어긴 채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유지하면서 기초생활수급비로 2억900만원을 부당하게 받았다며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이 목사 측이 위법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습니다.

이종락 목사
이종락 목사 "법에 무지…아기들이 생명을 잃어선 안돼"

이 목사는 그동안 언론에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꺼려왔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변명처럼 들리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게 주사랑공동체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기자를 만난 이 목사는 우선 "제가 참 부족해서 그렇다"면서 "이번 일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초생활수급비 부정 수급에 대해선 법에 무지했던 부분이 있었고, 구청에서 우선 청구한 수급비는 반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머지 수급비도 고지서가 나오는 대로 분할해서 반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목사는 이어 "그동안 함께 기도하고 봉사했던 분들이 이 일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분이 있다"면서 "다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생명을 살리는 행동에 동참해주셨으면 좋지 않나 생각하고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


올해로 10년이 된 베이비박스 운영과 관련해선 '아동 유기'를 부추긴다는 논란이 여전합니다.

이에 대해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서 "출산한 아이를 키울 여건이 되지 않는 산모와 영아를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이 제정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민간에서 해오던 이같은 일을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는 특별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지금 재산적으로 상당히 어렵고 3년 동안 마이너스 상태"라면서도 "미혼모도, 신생아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다"며 베이비박스 운영에 대한 의지를 거듭 드러냈습니다.

법에 무지했다고 말하지만, 이 목사 스스로 인정했듯이 잘못한 일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아기와 미혼모를 돕겠다는 취지로 만든 베이비박스에 대한 후원마저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게 된 '베이비박스' 해법은 없을까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