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래의 최강시사] 제대하니 신검 통지서 와있어…‘녹화사업’이 뭐길래

입력 2019.12.24 (09:27) 수정 2019.12.2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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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검사도 받기 이전 학생운동했다는 이유로 등교 중 아무도 모르게 군대로 끌려가
- 운동권 학생 2000여명 강제로 입대, 사회와 격리시킨 후 정신 개조해 프락치로 이용
- 고문·구타·협박·회유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 끊거나 실종된 학생 10명
- 기무사(당시 보안사) 자료 공개하고 진상조사 및 처벌 하려면 특별법 만들어야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12월 24일(화) 7:40~7:56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조종주 씨 (강제징집 녹화사업 피해자)



▷ 김경래 :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 시절이죠. 녹화사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녹화사업 그러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무 심자는 게 아니라 일종의 운동권들의 교화사업이라고 할까요? 프락치 만드는 그런 사업이었습니다. 이게 한두 명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지금 명단 나온 것만 해도 한 2천 명 가까이 됩니다. 굉장히 대규모로 진행된 거고 노태우 정권까지 계속됐다고 합니다, 그게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어떤 보상이라든가 진상규명이 아직 제대로 안 됐어요. 그래서 최근에 피해자 200여 명이 진실규명추진위를 만들어서 진실을 규명하자, 이렇게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게 시작 단계입니다. 피해자 중에 한 분을 저희들이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관련 이야기 좀 여쭤보겠습니다. 조종주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조종주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경래 : 조 선생님은 진실규명추진위원회에서 지금 활동을 하고 계신 거죠?

▶ 조종주 : 네, 사무처장 맡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선생님은 언제 끌려가신 거예요, 말하자면? 그게 녹화사업이라고 그래서 대학생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을 징집한 거잖아요, 군대로 보내버린 거잖아요, 일종의. 언제 끌려가신 겁니까?

▶ 조종주 : 저는 1983년 8월 23일 학교에 그날 개학하는 날이라서 등교하다가 학교 앞에서 바로 잡혀서 바로 군대로 가버렸어요.

▷ 김경래 : 그때가 몇 학년...

▶ 조종주 : 2학년 때입니다.

▷ 김경래 : 2학년, 그러니까 1년 대학생활을 하고 2학년 첫 개학일에 잡혀가신 거.

▶ 조종주 : 8월이니까 다음 학기.

▷ 김경래 : 아, 2학기에. 아니, 영장이 사전에 나온 건가요? 아니면 어떻게 된 건가요?

▶ 조종주 : 저는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아예 신체검사 받으라는 통지를 받은 적이 없었어요.

▷ 김경래 : 아,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황이었어요?

▶ 조종주 : 예, 신체검사도 안 받고 군대 가서 끝나고 제대하고 나오니까 신체검사 통지서가 왔더라고요. 그러니까 관리가 안 돼 있던 거죠.

▷ 김경래 : 아, 제대를 하니까 신체검사 받으라고 온 거예요?

▶ 조종주 : 그러니까 병무청에서는 어느 과정을 거쳐서 제가 군대 갔는지는 잘 모르고 있고 그러니까 저는 사라져버린 거죠. 사라져버렸다가 나오니까 다시 신체검사 받으라고 통지가 왔던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개학날 그러면 군대 가라고 해서 바로 그날 끌려간 거예요?

▶ 조종주 : 바로 끌고 가버렸어요.

▷ 김경래 : 부모님들한테 연락이나 이런 것들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 조종주 : 아무도 몰랐죠. 제가 군대 간 것을 군에 가면 옷이 오지 않습니까, 집으로?

▷ 김경래 : 그렇죠, 훈련소에서요.

▶ 조종주 : 옷이 온 걸 보고 알았고.

▷ 김경래 : 아, 부모님이요?

▶ 조종주 : 예, 그렇게 알았고 행방불명 됐다고 난리가 났었죠.

▷ 김경래 : 부모님도 부모님인데, 주변에 친구들도 갑자기 학교에 안 나온 거잖아요, 친구가.

▶ 조종주 : 예, 사라진 거죠.

▷ 김경래 :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 조종주 : 예, 즐비했죠. 아주 많았고 그 당시에 약 한 2천 명 정도가 그렇게 군대를 갔습니다. 저보다 앞에 갔거나 뒤에 갔거나 하는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숫자가 한 1,200명 정도 되고요. 그뒤에 사회 문제가 되니까 안 하는 척하면서 몰래 한 숫자가 1985년부터 해서 또 한 몇백 명 돼서 합계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한 2천 명이 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김경래 : 그때 당시에 이런 식으로 갑자기 군대에 끌려간 사람 중에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분이 유시민 씨, 유시민 작가 그리고 심재철 지금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그리고 이강택 지금 교통방송 사장, 김선수 대법관 유명한 분들도 있지만 어쨌든 숫자만 해도 대략 한 2천 명 정도 된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끌려가서 그냥 일반 군대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아니면 또 다른 일을 시키던가요, 그렇게 하는 건가요?

▶ 조종주 : 우리를 군에 끌고 간 것은 첫째는 사회에서 격리시키겠다는 게 제일 1차 목적이었던 것 같고요.

▷ 김경래 : 운동권이라서?

▶ 조종주 : 운동권이라서 격리시키겠다, 그러니까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되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계속 특히 우리가 그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라는 거였거든요.

▷ 김경래 : 83년이었으니까요.

▶ 조종주 : 한창 그게 컸고 그게 국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폭력을 가하는지를 보고 다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한테 가장 큰 그 당시의 이슈였고 아픔이었고 그랬죠. 계속 그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니까.

▷ 김경래 : 학생들이.

▶ 조종주 : 이걸 격리시켜야겠다, 이게 1차 목적. 두 번째는 격리시킨 다음에 정신을 개조하겠다, 녹화사업하겠다.

▷ 김경래 : 녹화사업이라는 게 말하자면 붉은 이념을 푸르게 만들겠다, 이런 거죠? 녹화사업이?

▶ 조종주 : 예, 그런 내용이죠. 그다음에는 그렇게 해서 정신을 개조한 다음에 프락치로 활용하겠다. 그래서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는 대학 내의 운동권 학생들을 잡아내겠다. 프락치로 활용하겠다, 이렇게 3단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 김경래 : 아니, 정신개조라고 하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구타라든가 고문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었나요, 그러면?

▶ 조종주 : 예, 그 당시에 젊은 청년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했는데 그걸 꺾는 방법은 고문, 구타, 협박, 회유 이런 것들로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그 과정에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 김경래 : 선생님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조종주 : 저는 갑자기 그렇게 군대를 잡혀간 다음에 그 당시 군대는 다 고생하는 거니까.

▷ 김경래 : 그렇긴 하죠.

▶ 조종주 : 좀 더 맞고 “너희들 데모하다 왔지?” 하면서 내 얻어맞고 일상적인 폭력에는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로 참고 견디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의 의사와 다르게 불법적으로 잡혀서 군대에 오고 거기서 사상을 개조하려고 하고 또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군대생활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이것은 사회 문제화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탈영을 했어요.

▷ 김경래 : 선생님, 탈영을 하셨어요?

▶ 조종주 : 네, 이등병 때 탈영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아니, 그러면 몇 개월 만에 탈영을 하신 거예요?

▶ 조종주 : 이제 훈련소 끝나고 나서 두 달 만에 했죠.

▷ 김경래 : 그러면 자대 배치받고 두 달 만에 이거를 사회에 고발을 해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탈영을 하고 나서?

▶ 조종주 : 먼저 탈영하면 바로 잡으러 나오잖아요.

▷ 김경래 : 그러겠죠.

▶ 조종주 : 바로 잡으러 나오니까 처음에는 머리가 좀 길 때까지 군인이니까 머리 짧았으니까 머리가 길 때까지 숨어 있어야겠다, 생각해서 절에 숨어 있었어요. 절에 숨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저는 계속 숨어 있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셨더라고요, 절에. 저희 누나가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아무도 몰랐는데, 군부대에서는 더욱더 알 수 없는 거고. 그런데 아버지가 알게 돼서 오셨더라고요. 아버지한테 설득을 했어요. 여차저차한 과정으로 이것을 반드시 남한산성 갈 작정하고 시작한 거니까 그렇게 알아달라. 그리고 불이익 겪겠다, 젊은이로서 그 정도 배짱은 있다고 해서 설득을 했는데, 어머니를 만났는데 보안대하고 헌병대에서 내 어머니하고 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한 일주일 동안. 그러면서 계속 어디 있느냐,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있느냐? 계속하고 혹시 북한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던 거예요.

▷ 김경래 : 어머니한테요?

▶ 조종주 : 예, 어머니한테요.

▷ 김경래 : 걱정 많이 하셨겠네요.

▶ 조종주 :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도 배짱도 있으시고 그런 분인데, 제가 마침 잠시 어떻게 여지가 틈이 있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가 숨을 못 쉬는 거예요. 숨이 코에서 목까지만 왔다 갔다 흔히 하는 말로 깔딱 숨쉰다, 그러는데 그러고 계시는 거예요. 정신을 거의 놓기 직전 상태가 되어 계시고. 설득을 하려고 했다가 아버지는 설득을 하지만 어머니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30분 이야기를 하다가 이러다 우리 엄마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갈게요, 올라가서.

▷ 김경래 : 그러면 다시 군대에 가신 거예요?

▶ 조종주 : 예, 다시 올라갔습니다.

▷ 김경래 : 그런데 그러면 탈영까지 하고 이래서 가서 더 고초가 심하셨을 것 같은데요.

▶ 조종주 : 다 고생했죠. 저뿐만 아니라 저도 고생했지만 저처럼 군대 간 사람들, 2천여 명 전부 다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 일로. 어떻게 보면 저보다 더한 분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 김경래 : 아니, 그런데 사상 개조라는 게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데, 그게 가능한 건가요? 어떤 식으로 하는 거예요?

▶ 조종주 : 보통 일주일에서 15일, 더 길면 한 달씩 보안사에서 고문, 협박을 하는 거예요, 고문, 협박. 그러면서 계속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고 많이 하는 게 써라, 네가 한 일을 써라. 내 쓰는 거예요.

▷ 김경래 : 친구들이 무슨 책 읽고 어떤 활동했는지 다 쓰라는 거군요.

▶ 조종주 : 그래서 결국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을 쓰라고 압박을 하는 거죠. 그러면 뭐 워낙 힘드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나중에 내 생각을 지킬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는 일단 쓰거든요. 그러면 쓴 것을 들고 마지막에 태극기 앞에 서서 사진도 찍고 이 사람은 드디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사진 찍고 박수 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김경래 : 아니, 이게 무슨 나치고 아니고.

▶ 조종주 : 나치 비슷하죠. 나치라고 봐야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런 상황을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진짜 사라진 분들이 꽤 많잖아요, 의문사. 어느 정도로 파악이 됩니까?

▶ 조종주 : 저희가 공식적으로 현재는 10명을 이야기합니다.

▷ 김경래 : 10명이요?

▶ 조종주 : 네, 정부에서 인정한 사람이 4명 그다음에 자료가 없어서 파악이 안 되는 2명 그뒤에 또 있어서 그리고 제대한 다음에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그런데 그것이 최종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는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은 못해요. 저희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열 사람이죠.

▷ 김경래 : 적어도 열 분이 그런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숨겼거나 혹은 지금 사라져버린 그런 상황이네요. 아예 그분 가족들은 지금 몇십 년이 지났잖아요, 지금. 지금까지 시신도 못 찾고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거네요.

▶ 조종주 : 시신들은 사라졌다기보다 의문사라고 봐야죠. 의문사인데.

▷ 김경래 : 의문사, 왜 죽었는지 모르는.

▶ 조종주 : 군에는 자료가 있을 텐데 안 보여주니까.

▷ 김경래 : 그러니까요. 그때 노무현 정부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거를 조금 봤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때 진실이나 이런 것들이 규명이 제대로 안 됐다고 보시는 거예요?

▶ 조종주 : 예, 2번에 걸쳐서 김대중 대통령 때, 노무현 대통령 때. 김대중 대통령 때는 대통령 산하기관으로 해서 했고요, 의문사 진상규명을 했고. 그다음에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국방부 내에 아무래도 의문사가 군에 대체로 있으니까 국방부 내에 설치를 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그 당시에 보안사죠.

▷ 김경래 : 그 이후에 기무사로 바뀐 보안사.

▶ 조종주 : 기무사로 바뀐 여기서 자료를 숨기고 안 내놓습니다, 없다고 하고.

▷ 김경래 : 아, 협조를 안 했군요.

▶ 조종주 : 대통령이나 정부기관에서 해도 자료를 숨기고 안 내놔서 아직도 정확한 진상들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 김경래 : 그래서 이번에 어떤 진상규명추진위원회 이걸 만드신 거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요구를 하시는 거죠, 지금 추진위원회에서?

▶ 조종주 : 저희 요구는 몇 가지 있습니다.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료를 다 공개해라.

▷ 김경래 : 일단 자료를 공개해라.

▶ 조종주 : 그래서 자료를 공개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자. 두 번째로는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필요하다. 진실규명을 위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자. 그다음에 관련자, 책임자들을 처벌하자. 그리고 다시는 국가가 이러한 국가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개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확실하게 해라.

▷ 김경래 : 아직 사과를 못 받으셨나요?

▶ 조종주 : 예,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습니다.

▷ 김경래 : 그래요? 물론 공소시효 같은 것들이 다 지나서 현행법으로 처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 조종주 : 그래서 특별법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 김경래 :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책임자는 처벌하고 진실을 규명하자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하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얼마 전에 전두환 씨 집 앞에 가서 시위를 하셨어요. 그 현장에 가셨나요?

▶ 조종주 : 예.

▷ 김경래 : 전두환 씨 최근에 언론에 많이 노출이 됐습니다. 밥 먹는 것, 골프 치는 것. 보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 조종주 : 방송에서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납니다, 아직도 화가 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처벌해야겠다는 반드시 처벌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전두환 씨가 이 부분, 이 사건 녹화사업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거나 이랬던 적이 있나요? 사과를 한다거나 그러지 않았겠죠?

▶ 조종주 : 전혀 안 했고요.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진상조사 과정에서 전두환 씨가 최종 지시자였다는 것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 김경래 : 아, 최종 지시자였다는 게 확인은 됐어요? 집 앞에 갔더니 내다보지는 않죠, 당연히?

▶ 조종주 : 예, 아무리 소리 지르고 해도 있는지 없는지 죽은 듯이 있더라고요.

▷ 김경래 : 지금 그러면 진상규명추진위원회 같이 활동하시는 분들이 한 몇 분 정도 되시나요?

▶ 조종주 : 지금 한 200여 분 계십니다.

▷ 김경래 : 연세들이 한 60대.

▶ 조종주 : 60 전후죠. 제가 제일 막내 정도 되고요.

▷ 김경래 : 그렇습니까? 아까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망하신 분도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런 분들은 가족분들이나 이런 분들도 같이 참여하고 이렇게 하나요?

▶ 조종주 : 예, 가족분들이 다 같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 김경래 : 유족들이요?

▶ 조종주 : 네.

▷ 김경래 : 그렇군요.

▶ 조종주 : 형, 부모 이렇게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이게 지나간 일이라서 약간 좀 뭐라고 할까요. 편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그 말씀 속에 굉장히 아픔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진상이 규명이 안 됐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인 것 같습니다. 보안사가 협조도 안 했고요.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참 이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서 저희들도 좀 마음이 아픕니다. 일이 진상규명도 되고 책임자 처벌도 되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도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조종주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오늘 감사합니다. 강제징집 그리고 녹화사업이라고 이른바 부르는 그 사업의 피해자십니다. 조종주 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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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래의 최강시사] 제대하니 신검 통지서 와있어…‘녹화사업’이 뭐길래
    • 입력 2019-12-24 09:27:03
    • 수정2019-12-24 09:58:47
    최강시사
- 신체검사도 받기 이전 학생운동했다는 이유로 등교 중 아무도 모르게 군대로 끌려가
- 운동권 학생 2000여명 강제로 입대, 사회와 격리시킨 후 정신 개조해 프락치로 이용
- 고문·구타·협박·회유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 끊거나 실종된 학생 10명
- 기무사(당시 보안사) 자료 공개하고 진상조사 및 처벌 하려면 특별법 만들어야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12월 24일(화) 7:40~7:56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조종주 씨 (강제징집 녹화사업 피해자)



▷ 김경래 :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 시절이죠. 녹화사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녹화사업 그러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무 심자는 게 아니라 일종의 운동권들의 교화사업이라고 할까요? 프락치 만드는 그런 사업이었습니다. 이게 한두 명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지금 명단 나온 것만 해도 한 2천 명 가까이 됩니다. 굉장히 대규모로 진행된 거고 노태우 정권까지 계속됐다고 합니다, 그게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어떤 보상이라든가 진상규명이 아직 제대로 안 됐어요. 그래서 최근에 피해자 200여 명이 진실규명추진위를 만들어서 진실을 규명하자, 이렇게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게 시작 단계입니다. 피해자 중에 한 분을 저희들이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관련 이야기 좀 여쭤보겠습니다. 조종주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조종주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경래 : 조 선생님은 진실규명추진위원회에서 지금 활동을 하고 계신 거죠?

▶ 조종주 : 네, 사무처장 맡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선생님은 언제 끌려가신 거예요, 말하자면? 그게 녹화사업이라고 그래서 대학생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을 징집한 거잖아요, 군대로 보내버린 거잖아요, 일종의. 언제 끌려가신 겁니까?

▶ 조종주 : 저는 1983년 8월 23일 학교에 그날 개학하는 날이라서 등교하다가 학교 앞에서 바로 잡혀서 바로 군대로 가버렸어요.

▷ 김경래 : 그때가 몇 학년...

▶ 조종주 : 2학년 때입니다.

▷ 김경래 : 2학년, 그러니까 1년 대학생활을 하고 2학년 첫 개학일에 잡혀가신 거.

▶ 조종주 : 8월이니까 다음 학기.

▷ 김경래 : 아, 2학기에. 아니, 영장이 사전에 나온 건가요? 아니면 어떻게 된 건가요?

▶ 조종주 : 저는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아예 신체검사 받으라는 통지를 받은 적이 없었어요.

▷ 김경래 : 아,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황이었어요?

▶ 조종주 : 예, 신체검사도 안 받고 군대 가서 끝나고 제대하고 나오니까 신체검사 통지서가 왔더라고요. 그러니까 관리가 안 돼 있던 거죠.

▷ 김경래 : 아, 제대를 하니까 신체검사 받으라고 온 거예요?

▶ 조종주 : 그러니까 병무청에서는 어느 과정을 거쳐서 제가 군대 갔는지는 잘 모르고 있고 그러니까 저는 사라져버린 거죠. 사라져버렸다가 나오니까 다시 신체검사 받으라고 통지가 왔던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개학날 그러면 군대 가라고 해서 바로 그날 끌려간 거예요?

▶ 조종주 : 바로 끌고 가버렸어요.

▷ 김경래 : 부모님들한테 연락이나 이런 것들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 조종주 : 아무도 몰랐죠. 제가 군대 간 것을 군에 가면 옷이 오지 않습니까, 집으로?

▷ 김경래 : 그렇죠, 훈련소에서요.

▶ 조종주 : 옷이 온 걸 보고 알았고.

▷ 김경래 : 아, 부모님이요?

▶ 조종주 : 예, 그렇게 알았고 행방불명 됐다고 난리가 났었죠.

▷ 김경래 : 부모님도 부모님인데, 주변에 친구들도 갑자기 학교에 안 나온 거잖아요, 친구가.

▶ 조종주 : 예, 사라진 거죠.

▷ 김경래 :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 조종주 : 예, 즐비했죠. 아주 많았고 그 당시에 약 한 2천 명 정도가 그렇게 군대를 갔습니다. 저보다 앞에 갔거나 뒤에 갔거나 하는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숫자가 한 1,200명 정도 되고요. 그뒤에 사회 문제가 되니까 안 하는 척하면서 몰래 한 숫자가 1985년부터 해서 또 한 몇백 명 돼서 합계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한 2천 명이 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김경래 : 그때 당시에 이런 식으로 갑자기 군대에 끌려간 사람 중에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분이 유시민 씨, 유시민 작가 그리고 심재철 지금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그리고 이강택 지금 교통방송 사장, 김선수 대법관 유명한 분들도 있지만 어쨌든 숫자만 해도 대략 한 2천 명 정도 된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끌려가서 그냥 일반 군대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아니면 또 다른 일을 시키던가요, 그렇게 하는 건가요?

▶ 조종주 : 우리를 군에 끌고 간 것은 첫째는 사회에서 격리시키겠다는 게 제일 1차 목적이었던 것 같고요.

▷ 김경래 : 운동권이라서?

▶ 조종주 : 운동권이라서 격리시키겠다, 그러니까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되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계속 특히 우리가 그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라는 거였거든요.

▷ 김경래 : 83년이었으니까요.

▶ 조종주 : 한창 그게 컸고 그게 국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폭력을 가하는지를 보고 다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한테 가장 큰 그 당시의 이슈였고 아픔이었고 그랬죠. 계속 그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니까.

▷ 김경래 : 학생들이.

▶ 조종주 : 이걸 격리시켜야겠다, 이게 1차 목적. 두 번째는 격리시킨 다음에 정신을 개조하겠다, 녹화사업하겠다.

▷ 김경래 : 녹화사업이라는 게 말하자면 붉은 이념을 푸르게 만들겠다, 이런 거죠? 녹화사업이?

▶ 조종주 : 예, 그런 내용이죠. 그다음에는 그렇게 해서 정신을 개조한 다음에 프락치로 활용하겠다. 그래서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는 대학 내의 운동권 학생들을 잡아내겠다. 프락치로 활용하겠다, 이렇게 3단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 김경래 : 아니, 정신개조라고 하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구타라든가 고문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었나요, 그러면?

▶ 조종주 : 예, 그 당시에 젊은 청년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했는데 그걸 꺾는 방법은 고문, 구타, 협박, 회유 이런 것들로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그 과정에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 김경래 : 선생님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조종주 : 저는 갑자기 그렇게 군대를 잡혀간 다음에 그 당시 군대는 다 고생하는 거니까.

▷ 김경래 : 그렇긴 하죠.

▶ 조종주 : 좀 더 맞고 “너희들 데모하다 왔지?” 하면서 내 얻어맞고 일상적인 폭력에는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로 참고 견디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의 의사와 다르게 불법적으로 잡혀서 군대에 오고 거기서 사상을 개조하려고 하고 또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군대생활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이것은 사회 문제화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탈영을 했어요.

▷ 김경래 : 선생님, 탈영을 하셨어요?

▶ 조종주 : 네, 이등병 때 탈영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아니, 그러면 몇 개월 만에 탈영을 하신 거예요?

▶ 조종주 : 이제 훈련소 끝나고 나서 두 달 만에 했죠.

▷ 김경래 : 그러면 자대 배치받고 두 달 만에 이거를 사회에 고발을 해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탈영을 하고 나서?

▶ 조종주 : 먼저 탈영하면 바로 잡으러 나오잖아요.

▷ 김경래 : 그러겠죠.

▶ 조종주 : 바로 잡으러 나오니까 처음에는 머리가 좀 길 때까지 군인이니까 머리 짧았으니까 머리가 길 때까지 숨어 있어야겠다, 생각해서 절에 숨어 있었어요. 절에 숨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저는 계속 숨어 있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셨더라고요, 절에. 저희 누나가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아무도 몰랐는데, 군부대에서는 더욱더 알 수 없는 거고. 그런데 아버지가 알게 돼서 오셨더라고요. 아버지한테 설득을 했어요. 여차저차한 과정으로 이것을 반드시 남한산성 갈 작정하고 시작한 거니까 그렇게 알아달라. 그리고 불이익 겪겠다, 젊은이로서 그 정도 배짱은 있다고 해서 설득을 했는데, 어머니를 만났는데 보안대하고 헌병대에서 내 어머니하고 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한 일주일 동안. 그러면서 계속 어디 있느냐,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있느냐? 계속하고 혹시 북한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던 거예요.

▷ 김경래 : 어머니한테요?

▶ 조종주 : 예, 어머니한테요.

▷ 김경래 : 걱정 많이 하셨겠네요.

▶ 조종주 :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도 배짱도 있으시고 그런 분인데, 제가 마침 잠시 어떻게 여지가 틈이 있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가 숨을 못 쉬는 거예요. 숨이 코에서 목까지만 왔다 갔다 흔히 하는 말로 깔딱 숨쉰다, 그러는데 그러고 계시는 거예요. 정신을 거의 놓기 직전 상태가 되어 계시고. 설득을 하려고 했다가 아버지는 설득을 하지만 어머니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30분 이야기를 하다가 이러다 우리 엄마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갈게요, 올라가서.

▷ 김경래 : 그러면 다시 군대에 가신 거예요?

▶ 조종주 : 예, 다시 올라갔습니다.

▷ 김경래 : 그런데 그러면 탈영까지 하고 이래서 가서 더 고초가 심하셨을 것 같은데요.

▶ 조종주 : 다 고생했죠. 저뿐만 아니라 저도 고생했지만 저처럼 군대 간 사람들, 2천여 명 전부 다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 일로. 어떻게 보면 저보다 더한 분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 김경래 : 아니, 그런데 사상 개조라는 게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데, 그게 가능한 건가요? 어떤 식으로 하는 거예요?

▶ 조종주 : 보통 일주일에서 15일, 더 길면 한 달씩 보안사에서 고문, 협박을 하는 거예요, 고문, 협박. 그러면서 계속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고 많이 하는 게 써라, 네가 한 일을 써라. 내 쓰는 거예요.

▷ 김경래 : 친구들이 무슨 책 읽고 어떤 활동했는지 다 쓰라는 거군요.

▶ 조종주 : 그래서 결국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을 쓰라고 압박을 하는 거죠. 그러면 뭐 워낙 힘드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나중에 내 생각을 지킬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는 일단 쓰거든요. 그러면 쓴 것을 들고 마지막에 태극기 앞에 서서 사진도 찍고 이 사람은 드디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사진 찍고 박수 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김경래 : 아니, 이게 무슨 나치고 아니고.

▶ 조종주 : 나치 비슷하죠. 나치라고 봐야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런 상황을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진짜 사라진 분들이 꽤 많잖아요, 의문사. 어느 정도로 파악이 됩니까?

▶ 조종주 : 저희가 공식적으로 현재는 10명을 이야기합니다.

▷ 김경래 : 10명이요?

▶ 조종주 : 네, 정부에서 인정한 사람이 4명 그다음에 자료가 없어서 파악이 안 되는 2명 그뒤에 또 있어서 그리고 제대한 다음에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그런데 그것이 최종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는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은 못해요. 저희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열 사람이죠.

▷ 김경래 : 적어도 열 분이 그런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숨겼거나 혹은 지금 사라져버린 그런 상황이네요. 아예 그분 가족들은 지금 몇십 년이 지났잖아요, 지금. 지금까지 시신도 못 찾고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거네요.

▶ 조종주 : 시신들은 사라졌다기보다 의문사라고 봐야죠. 의문사인데.

▷ 김경래 : 의문사, 왜 죽었는지 모르는.

▶ 조종주 : 군에는 자료가 있을 텐데 안 보여주니까.

▷ 김경래 : 그러니까요. 그때 노무현 정부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거를 조금 봤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때 진실이나 이런 것들이 규명이 제대로 안 됐다고 보시는 거예요?

▶ 조종주 : 예, 2번에 걸쳐서 김대중 대통령 때, 노무현 대통령 때. 김대중 대통령 때는 대통령 산하기관으로 해서 했고요, 의문사 진상규명을 했고. 그다음에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국방부 내에 아무래도 의문사가 군에 대체로 있으니까 국방부 내에 설치를 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그 당시에 보안사죠.

▷ 김경래 : 그 이후에 기무사로 바뀐 보안사.

▶ 조종주 : 기무사로 바뀐 여기서 자료를 숨기고 안 내놓습니다, 없다고 하고.

▷ 김경래 : 아, 협조를 안 했군요.

▶ 조종주 : 대통령이나 정부기관에서 해도 자료를 숨기고 안 내놔서 아직도 정확한 진상들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 김경래 : 그래서 이번에 어떤 진상규명추진위원회 이걸 만드신 거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요구를 하시는 거죠, 지금 추진위원회에서?

▶ 조종주 : 저희 요구는 몇 가지 있습니다.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료를 다 공개해라.

▷ 김경래 : 일단 자료를 공개해라.

▶ 조종주 : 그래서 자료를 공개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자. 두 번째로는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필요하다. 진실규명을 위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자. 그다음에 관련자, 책임자들을 처벌하자. 그리고 다시는 국가가 이러한 국가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개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확실하게 해라.

▷ 김경래 : 아직 사과를 못 받으셨나요?

▶ 조종주 : 예,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습니다.

▷ 김경래 : 그래요? 물론 공소시효 같은 것들이 다 지나서 현행법으로 처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 조종주 : 그래서 특별법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 김경래 :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책임자는 처벌하고 진실을 규명하자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하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얼마 전에 전두환 씨 집 앞에 가서 시위를 하셨어요. 그 현장에 가셨나요?

▶ 조종주 : 예.

▷ 김경래 : 전두환 씨 최근에 언론에 많이 노출이 됐습니다. 밥 먹는 것, 골프 치는 것. 보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 조종주 : 방송에서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납니다, 아직도 화가 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처벌해야겠다는 반드시 처벌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전두환 씨가 이 부분, 이 사건 녹화사업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거나 이랬던 적이 있나요? 사과를 한다거나 그러지 않았겠죠?

▶ 조종주 : 전혀 안 했고요.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진상조사 과정에서 전두환 씨가 최종 지시자였다는 것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 김경래 : 아, 최종 지시자였다는 게 확인은 됐어요? 집 앞에 갔더니 내다보지는 않죠, 당연히?

▶ 조종주 : 예, 아무리 소리 지르고 해도 있는지 없는지 죽은 듯이 있더라고요.

▷ 김경래 : 지금 그러면 진상규명추진위원회 같이 활동하시는 분들이 한 몇 분 정도 되시나요?

▶ 조종주 : 지금 한 200여 분 계십니다.

▷ 김경래 : 연세들이 한 60대.

▶ 조종주 : 60 전후죠. 제가 제일 막내 정도 되고요.

▷ 김경래 : 그렇습니까? 아까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망하신 분도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런 분들은 가족분들이나 이런 분들도 같이 참여하고 이렇게 하나요?

▶ 조종주 : 예, 가족분들이 다 같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 김경래 : 유족들이요?

▶ 조종주 : 네.

▷ 김경래 : 그렇군요.

▶ 조종주 : 형, 부모 이렇게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이게 지나간 일이라서 약간 좀 뭐라고 할까요. 편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그 말씀 속에 굉장히 아픔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진상이 규명이 안 됐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인 것 같습니다. 보안사가 협조도 안 했고요.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참 이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서 저희들도 좀 마음이 아픕니다. 일이 진상규명도 되고 책임자 처벌도 되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도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조종주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오늘 감사합니다. 강제징집 그리고 녹화사업이라고 이른바 부르는 그 사업의 피해자십니다. 조종주 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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