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보 어떻게 알았지? 논란 속 ‘적십자 회비’ 첫 헌법소원

입력 2019.12.27 (07:00) 수정 2019.12.2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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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라고 왔는데, 이거 세금이에요?"

고등학교 2학년인 황준혁 군은 12월 초 아파트 우편함에서 지로용지를 발견했습니다. 집집마다 꽂혀있는 걸 보고는 세금인가 하고 엄마에게 갖다 드렸지만 그건 '적십자 회비 통지서'였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보낸 지로용지를 처음 본 황 군은 인터넷 검색을 했고 많은 이들이 '이거 의무 납부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황 군은 친구 고범석 군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학생들이 제일 먼저 궁금했던 건 국가 기관이 아닌 적십자가 어떻게 우리 집 주소에 부모님 이름을 정확하게 써서, 즉 해당 주소의 세대주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회비 통지서를 보낼 수 있는지였습니다.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8조〉에는 적십자사가 회원 모집과 회비 모금을 위해서 세대주의 이름과 주소, 사업자의 상호와 주소, 법인이나 단체의 명칭과 소재지, 회비 납부자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자료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를 다니고 사업체를 옮겨도 적십자의 지로용지는 정확하게 배포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국가가 자료 제공을 거부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규정은 없습니다. 실제 최근 10년 동안 적십자가 정부에 자료 제공을 요청해 거부당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인정보의 주체, 다시 말해 회비 통지서를 받는 국민 개개인은 본인의 정보가 적십자사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개인정보 제공과 수집, 활용에 대한 사전 고지도, 동의 여부 확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지로용지가 세금 고지서 모양이죠?"

대한적십자사는 12월과 1월을 집중모금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적십자사는 개인 1만 원, 개인사업자 3만 원, 법인 5만 원으로 일괄 책정해 각 가정과 기업에 통지서를 보냅니다. 지로용지가 세금이나 공과금 납부서와 같은 형태일 뿐 아니라 내지 않으면 2월에 2차 통지서가 발송도 됩니다.

적십자 회비 납부가 의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실 금액도 몇 년전까진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2015년엔 사전 고지 없이 일부 지역에서 회비를 1,000원씩 올려 통지서를 발송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회비를 모금할 때 지로 용지를 발송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입니다. 1996년까지는 동네 통반장이 집집마다 방문해 돈을 걷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강제성 논란이 일자 지로 용지를 발송하는 것으로 대체됐습니다.

이제 각 집의 현관문을 두드려 회비를 받는 지역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여전히 통장, 이장들이 적십자 회비 모금을 독려하는 글, 회비 통지서를 세대마다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하소연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적십자사의 지로 통지서 논란은 오래된 문제입니다. 채용 비리, 박경서 회장의 성희롱 발언, 혈액백 입찰 특혜 의혹 등 적십자에 관련된 불미스런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국민들의 신뢰도 낮아졌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회비의 지로 통지서 문제는 국정감사에서 수차례 지적됐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최근 3년동안 43차례나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동의 없이 개인 정보를 제공하지 말라'와 '세금으로 오인할 수 있는 지로용지를 보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적십자사는 지로 통지서를 갈수록 더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2014년 1,704만 건 가량이던 발송 건수는 지난해 2,070만 건을 넘었습니다. 통지서를 제작하고 발송하는 비용도 2014년 28억 5,400만 원에서 올해 6월 기준 36억 3,700만 원으로 늘었습니다. 지로용지를 보내는 데만 184억 5,300만 원이 들었습니다. (*출처: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실)

지로 모금에 대해 적십자사는 "모든 은행 지점 및 ATM 기기 등을 수납 창구로 활용할 수 있어 편리하며 참여자가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급 결제 수단으로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198개국 적십자사 회원국 중 집집마다 지로 용지를 배포해 회비를 모금하는 나라는 한국 뿐입니다.

미래의 세대주, 적십자 회비 '첫 헌법소원'

12월 18일 오전 9시 3분, 부산발 KTX가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황 군과 고 군의 손에는 40페이지 가까이 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청구서에는 국가가 적십자사에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근거가 되는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8조'는 위헌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적십자사가 요청할 수 있다는 '필요한 자료'의 모호한 범위, 국가가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특별한 사유'의 불명확한 정의 등 예측할 수 없고 정확한 한계를 알 수 없는 조항에 대한 위헌성 판단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적십자사에 납부하는 기부금을 '회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회비'는 '모임을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해 모임의 구성원에게 걷는 돈'이고 '후원금'은 '개인이나 단체의 활동, 사업따위를 돕기 위한 기부금'이며 '기부금'은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대가 없이 내놓은 돈'입니다. 따라서 적십자 후원금, 기부금이 아닌 '회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대한적십자사의 회원인 것처럼 착오를 일으킬 수 있게 한다는 겁니다.


대한적십자사 회비 모금에 대한 '첫 헌법소원'이 제기된 이틀 후부터 인터넷에는 적십자사가 회비 모금 방식을 다양화하기 위해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10월 15일,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은 '지로 용지와 관련해 내부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직 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올해 각 가정에는 적십자 회비 지로 통지서가 발부됐고 내년 2월~3월, 2차 통지서도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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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27 07:00:03
    • 수정2019-12-27 07:14:03
    취재K
"돈 내라고 왔는데, 이거 세금이에요?" 고등학교 2학년인 황준혁 군은 12월 초 아파트 우편함에서 지로용지를 발견했습니다. 집집마다 꽂혀있는 걸 보고는 세금인가 하고 엄마에게 갖다 드렸지만 그건 '적십자 회비 통지서'였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보낸 지로용지를 처음 본 황 군은 인터넷 검색을 했고 많은 이들이 '이거 의무 납부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황 군은 친구 고범석 군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학생들이 제일 먼저 궁금했던 건 국가 기관이 아닌 적십자가 어떻게 우리 집 주소에 부모님 이름을 정확하게 써서, 즉 해당 주소의 세대주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회비 통지서를 보낼 수 있는지였습니다.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8조〉에는 적십자사가 회원 모집과 회비 모금을 위해서 세대주의 이름과 주소, 사업자의 상호와 주소, 법인이나 단체의 명칭과 소재지, 회비 납부자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자료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를 다니고 사업체를 옮겨도 적십자의 지로용지는 정확하게 배포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국가가 자료 제공을 거부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규정은 없습니다. 실제 최근 10년 동안 적십자가 정부에 자료 제공을 요청해 거부당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인정보의 주체, 다시 말해 회비 통지서를 받는 국민 개개인은 본인의 정보가 적십자사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개인정보 제공과 수집, 활용에 대한 사전 고지도, 동의 여부 확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지로용지가 세금 고지서 모양이죠?" 대한적십자사는 12월과 1월을 집중모금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적십자사는 개인 1만 원, 개인사업자 3만 원, 법인 5만 원으로 일괄 책정해 각 가정과 기업에 통지서를 보냅니다. 지로용지가 세금이나 공과금 납부서와 같은 형태일 뿐 아니라 내지 않으면 2월에 2차 통지서가 발송도 됩니다. 적십자 회비 납부가 의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실 금액도 몇 년전까진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2015년엔 사전 고지 없이 일부 지역에서 회비를 1,000원씩 올려 통지서를 발송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회비를 모금할 때 지로 용지를 발송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입니다. 1996년까지는 동네 통반장이 집집마다 방문해 돈을 걷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강제성 논란이 일자 지로 용지를 발송하는 것으로 대체됐습니다. 이제 각 집의 현관문을 두드려 회비를 받는 지역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여전히 통장, 이장들이 적십자 회비 모금을 독려하는 글, 회비 통지서를 세대마다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하소연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적십자사의 지로 통지서 논란은 오래된 문제입니다. 채용 비리, 박경서 회장의 성희롱 발언, 혈액백 입찰 특혜 의혹 등 적십자에 관련된 불미스런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국민들의 신뢰도 낮아졌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회비의 지로 통지서 문제는 국정감사에서 수차례 지적됐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최근 3년동안 43차례나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동의 없이 개인 정보를 제공하지 말라'와 '세금으로 오인할 수 있는 지로용지를 보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적십자사는 지로 통지서를 갈수록 더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2014년 1,704만 건 가량이던 발송 건수는 지난해 2,070만 건을 넘었습니다. 통지서를 제작하고 발송하는 비용도 2014년 28억 5,400만 원에서 올해 6월 기준 36억 3,700만 원으로 늘었습니다. 지로용지를 보내는 데만 184억 5,300만 원이 들었습니다. (*출처: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실) 지로 모금에 대해 적십자사는 "모든 은행 지점 및 ATM 기기 등을 수납 창구로 활용할 수 있어 편리하며 참여자가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급 결제 수단으로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198개국 적십자사 회원국 중 집집마다 지로 용지를 배포해 회비를 모금하는 나라는 한국 뿐입니다. 미래의 세대주, 적십자 회비 '첫 헌법소원' 12월 18일 오전 9시 3분, 부산발 KTX가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황 군과 고 군의 손에는 40페이지 가까이 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청구서에는 국가가 적십자사에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근거가 되는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8조'는 위헌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적십자사가 요청할 수 있다는 '필요한 자료'의 모호한 범위, 국가가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특별한 사유'의 불명확한 정의 등 예측할 수 없고 정확한 한계를 알 수 없는 조항에 대한 위헌성 판단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적십자사에 납부하는 기부금을 '회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회비'는 '모임을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해 모임의 구성원에게 걷는 돈'이고 '후원금'은 '개인이나 단체의 활동, 사업따위를 돕기 위한 기부금'이며 '기부금'은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대가 없이 내놓은 돈'입니다. 따라서 적십자 후원금, 기부금이 아닌 '회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대한적십자사의 회원인 것처럼 착오를 일으킬 수 있게 한다는 겁니다. 대한적십자사 회비 모금에 대한 '첫 헌법소원'이 제기된 이틀 후부터 인터넷에는 적십자사가 회비 모금 방식을 다양화하기 위해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10월 15일,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은 '지로 용지와 관련해 내부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직 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올해 각 가정에는 적십자 회비 지로 통지서가 발부됐고 내년 2월~3월, 2차 통지서도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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