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돈 빌리기 실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입력 2020.01.02 (15:35) 수정 2020.01.0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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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이상한 실험?

어제(1일) 'KBS 뉴스9'에서는 새해를 여는 기획뉴스 여러 개를 준비했습니다. 뉴스 앞부분에 총 4개의 꼭지가 방송됐는데 한국사회 신뢰, 소득격차, 성 불평등, 공정 및 안전과 관련해 여론조사 및 통계에 기초한 리포트였습니다.

방송 후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처음 본 사람에게 돈 안 빌려줌 = 한국은 불신 사회'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해당 실험이 신뢰를 측정할 수 있는 실험이 맞느냐면서 리포트의 일부 캡처와 함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실험 설계와 의도 등을 풀어보려 합니다.

연관기사 : [신년여론조사①] 처음 만난 사람보다 못 믿어…‘국회·언론·검찰’ 불신 톱3 (2020년 1월 1일, KBS 뉴스9)


"지갑을 놓고 와서 3천 원만... 바로 갚을게요."

실험은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타인을 어느 정도나 믿는지 알아보려 진행했습니다. 어디를 급하게 가야 하는데 지갑을 잠깐 놓고 왔고(잃어버렸고), 3천 원만 빌려주면 바로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방송엔 나가지 않았지만, 연락처나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며 난처한 상황이 거짓말이 아님을 믿게 하려 했습니다. 3천 원을 말한 이유는 버스와 지하철 각 1회씩 교통비를 고려한 액수였고, 소위 구걸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는 만큼 일부러 옷을 깔끔히 입었습니다.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습니다. 처음 본 사람에 당황하거나 외면했습니다. 무작위로 골라 도움을 요청한 20명 가운데 4명만이 도움을 줬고, 나머지 16명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낯선 타인에게 돈을 빌려줬지만 돌려받지 못한 사례들을 공유하며 "기자 너 같으면 빌려주겠느냐?"라는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안 줄 것 같습니다.

3천 원,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액수지만 무엇보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의 말을 어떻게 믿어? 뭘 믿고?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직간접적 경험들을 통해 느낀 누리꾼들과 기자의 인상, 바로 그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신뢰 정도입니다.


내가 도우면 나도 도움받을 수 있다는 기대…'일반화된 신뢰'

지난 2011년 KBS 특별기획 <사회적 자본> 다큐멘터리 팀은 국가별로 이런 돈 빌리기 실험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뷰에서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신뢰의 범위를 넓혀서 제공하는 일반화된 신뢰를 보여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교수는 또 "내가 다른 사람을 돕게 되면 도움을 받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돕게 되고, 도움의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되면서 사회 전체에 선한 의도가 널리 퍼지게 된다. 그래서 이기심이 줄어들고 이타심이 늘어나면서 사회의 신뢰가 높아지고 사회적 자본이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내가 도우면 나도 언젠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받은 경험이 많을수록 타인을 더 돕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도움 주기를 꺼렸던 분들에게 실험임을 밝히고 이유를 묻자, 과거에 빌려준 적 있지만 못 받았다거나 진짜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지 믿을 수 없어서 지갑을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지갑을 열었던 분들은 자신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도왔다거나, 3천 원 정도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물론, 돈을 빌리는 게 아닌 다른 방식 가령 몸을 다친 사람으로 설정하고 도움을 구해보거나 휴대전화를 빌려보거나 다른 방식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만 촬영 가능한 상황을 설정해야 했고, 이미 같은 실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신뢰를 측정한 내용이 이미 책으로도 출간된 점이 고려됐습니다.


돈 빌리기 실험보다 중요한 건…검찰·언론 국회에 대한 불신 짚어봐야

커뮤니티에 올라온 캡처에서는 고작 2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점수가 3.7점(10점 만점)이라고 단정 짓는다며 비난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20명을 대상으로 길거리에서 한 조사가 공신력을 갖긴 어렵습니다. 실험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라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점수가 3.7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해당 리포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신뢰가 바탕이어야 할 국가·사회 기관들이 정작 처음 만난 사람보다도 낮은 신뢰점수를 받은 상황 말입니다. 검찰은 3.7점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 같은 신뢰점수를 받았고 언론은 3.1점, 국회는 2.7점으로 처음 만난 사람보다도 오히려 믿을 게 못됐습니다.

조사 대상 7개 기관(청와대, 정부부처, 경찰, 법원 포함) 가운데 보통인 5점 이상을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사회에서 믿을 건 가족(8.7점)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한국사회 신뢰와 신뢰가 왜 중요한지에 관해서는 아래 연관기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기사 : [KBS 신년여론조사②] 진보는 ‘청와대’, 보수는 ‘검찰’을 가장 신뢰 (2020년 1월 1일, KBS홈페이지)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리포트 일부 캡처만 올려놓은 글에 누군가 댓글을 통해 전체 맥락을 담은 캡처 파일을 올렸고, 그러면서 원래의 비난 글은 삭제됐습니다. 이런 상황 역시 어쩌면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증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새해에는 언론을 포함해 검찰, 국회의 신뢰점수가 최소한 처음 만난 사람 보다는 높아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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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돈 빌리기 실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 입력 2020-01-02 15:35:45
    • 수정2020-01-02 15:37:29
    취재후·사건후
KBS의 이상한 실험?

어제(1일) 'KBS 뉴스9'에서는 새해를 여는 기획뉴스 여러 개를 준비했습니다. 뉴스 앞부분에 총 4개의 꼭지가 방송됐는데 한국사회 신뢰, 소득격차, 성 불평등, 공정 및 안전과 관련해 여론조사 및 통계에 기초한 리포트였습니다.

방송 후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처음 본 사람에게 돈 안 빌려줌 = 한국은 불신 사회'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해당 실험이 신뢰를 측정할 수 있는 실험이 맞느냐면서 리포트의 일부 캡처와 함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실험 설계와 의도 등을 풀어보려 합니다.

연관기사 : [신년여론조사①] 처음 만난 사람보다 못 믿어…‘국회·언론·검찰’ 불신 톱3 (2020년 1월 1일, KBS 뉴스9)


"지갑을 놓고 와서 3천 원만... 바로 갚을게요."

실험은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타인을 어느 정도나 믿는지 알아보려 진행했습니다. 어디를 급하게 가야 하는데 지갑을 잠깐 놓고 왔고(잃어버렸고), 3천 원만 빌려주면 바로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방송엔 나가지 않았지만, 연락처나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며 난처한 상황이 거짓말이 아님을 믿게 하려 했습니다. 3천 원을 말한 이유는 버스와 지하철 각 1회씩 교통비를 고려한 액수였고, 소위 구걸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는 만큼 일부러 옷을 깔끔히 입었습니다.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습니다. 처음 본 사람에 당황하거나 외면했습니다. 무작위로 골라 도움을 요청한 20명 가운데 4명만이 도움을 줬고, 나머지 16명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낯선 타인에게 돈을 빌려줬지만 돌려받지 못한 사례들을 공유하며 "기자 너 같으면 빌려주겠느냐?"라는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안 줄 것 같습니다.

3천 원,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액수지만 무엇보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의 말을 어떻게 믿어? 뭘 믿고?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직간접적 경험들을 통해 느낀 누리꾼들과 기자의 인상, 바로 그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신뢰 정도입니다.


내가 도우면 나도 도움받을 수 있다는 기대…'일반화된 신뢰'

지난 2011년 KBS 특별기획 <사회적 자본> 다큐멘터리 팀은 국가별로 이런 돈 빌리기 실험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뷰에서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신뢰의 범위를 넓혀서 제공하는 일반화된 신뢰를 보여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교수는 또 "내가 다른 사람을 돕게 되면 도움을 받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돕게 되고, 도움의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되면서 사회 전체에 선한 의도가 널리 퍼지게 된다. 그래서 이기심이 줄어들고 이타심이 늘어나면서 사회의 신뢰가 높아지고 사회적 자본이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내가 도우면 나도 언젠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받은 경험이 많을수록 타인을 더 돕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도움 주기를 꺼렸던 분들에게 실험임을 밝히고 이유를 묻자, 과거에 빌려준 적 있지만 못 받았다거나 진짜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지 믿을 수 없어서 지갑을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지갑을 열었던 분들은 자신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도왔다거나, 3천 원 정도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물론, 돈을 빌리는 게 아닌 다른 방식 가령 몸을 다친 사람으로 설정하고 도움을 구해보거나 휴대전화를 빌려보거나 다른 방식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만 촬영 가능한 상황을 설정해야 했고, 이미 같은 실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신뢰를 측정한 내용이 이미 책으로도 출간된 점이 고려됐습니다.


돈 빌리기 실험보다 중요한 건…검찰·언론 국회에 대한 불신 짚어봐야

커뮤니티에 올라온 캡처에서는 고작 2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점수가 3.7점(10점 만점)이라고 단정 짓는다며 비난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20명을 대상으로 길거리에서 한 조사가 공신력을 갖긴 어렵습니다. 실험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라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점수가 3.7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해당 리포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신뢰가 바탕이어야 할 국가·사회 기관들이 정작 처음 만난 사람보다도 낮은 신뢰점수를 받은 상황 말입니다. 검찰은 3.7점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 같은 신뢰점수를 받았고 언론은 3.1점, 국회는 2.7점으로 처음 만난 사람보다도 오히려 믿을 게 못됐습니다.

조사 대상 7개 기관(청와대, 정부부처, 경찰, 법원 포함) 가운데 보통인 5점 이상을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사회에서 믿을 건 가족(8.7점)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한국사회 신뢰와 신뢰가 왜 중요한지에 관해서는 아래 연관기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기사 : [KBS 신년여론조사②] 진보는 ‘청와대’, 보수는 ‘검찰’을 가장 신뢰 (2020년 1월 1일, KBS홈페이지)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리포트 일부 캡처만 올려놓은 글에 누군가 댓글을 통해 전체 맥락을 담은 캡처 파일을 올렸고, 그러면서 원래의 비난 글은 삭제됐습니다. 이런 상황 역시 어쩌면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증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새해에는 언론을 포함해 검찰, 국회의 신뢰점수가 최소한 처음 만난 사람 보다는 높아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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