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아바이 마을’의 새해 소망

입력 2020.01.04 (08:19) 수정 2020.01.0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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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강원도 속초에는 특별한 마을이 있습니다.

함경도가 고향인 분들이 모여 사는 실향민 마을인데요.

6.25 전쟁이 터지자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답니다.

벌써 어언 70년이 흘렀네요.

고향을 그리는 마음, 누구나 갖고 있겠지만 이분들처럼 절실한 분들은 많지 않을 텐데요.

올해는 고향 소식을 듣고, 더 나아가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요?

속초 아바이 마을 이야기, 채유나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작은 마을이 앉아있습니다.

마을과 시내를 이어주는 갯배는 이곳의 명물.

하지만 누가 뭐래도 마을의 자랑거리는 음식입니다.

돼지의 대창으로 만든 아바이 순대, 함경도에서 자주 먹었다는 가자미식해, 그리고 속초의 대표 먹거리 오징어순대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쓸쓸해 보이는 동상이 마을을 지키는 곳,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살고 있는 곳, 강원도 속초의 아바이 마을입니다.

아바이는 함경도 사투리로 나이가 많은 남성을 뜻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모인 피난민들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이어서 아바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요.

당시 피난민들이 실향민이 되어 70년 가까이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시.

올해 일흔 넷, 김의준 씨 고향입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명태가 제일 많이 나는 주산지고 이북에선 또 사과가 제일 많이 나는 주산단지예요."]

1951년 1.4 후퇴 당시 고향을 등지고 내려올 때에는 다시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피난 나와서 곧바로 여기 정착한 게 아니라 거제도까지 갔어요. 피난민 수용소에. 6살 때지. 곧바로 소문이 두 달만 있으면 올라간다 다시. 그러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든 거예요, 속초로. 여기 와서 막혔잖아. 하루라도 빨리 가려고. 그렇게 벌써 70년 다 돼가네."]

김의준 씨는 아직도 낡은 종이 두 장을 품 안에 고이 갖고 다닙니다.

행여 아들이 잊어버릴까, 선친이 친필로 남긴 고향집 주소와 고향 일대 약도입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한테 약도를, 고향 약도를 그려주면서 혹시 가게 되면 가봐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그 지도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간절함이 절절한 시구를 막힘없이 읊는 여든의 김상호 씨 역시 고향이 함경남도입니다.

아바이 마을이 품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다는데요.

[김상호/80세/실향민 : "여보, 금방 며칠 내로 온다하니까 일주일 삼사일 갔다 올 테니 그 사이 당신이 애 보고 몸조리 잘 하고 있으라고. 이렇게 나온 사람들이 많아. 그건 생이별이고 비극이야, 완전히."]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이 곳.

새 출발을 했다가도 옛 가족을 떨쳐버리지 못해 홀로 다시 남겨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고향에 대해 직접 얘기하는 대신 가슴에 묻게 된다는데요.

[김상호/80세/실향민 : "(아버지는) 나서부터 수십 년 동안 거기서 자랐으니까 지금 딱 가고 싶단 그런 말은 안하고 거기 어느 동네는 얼마만큼 변했을까 이런 거 술 마시다 보면 가끔 이야기하는 소리 듣고..."]

12살에 아바이 마을에 정착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이 된 김진국 씨.

점점 흐릿해져 가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야속할 뿐입니다.

[김진국/82세/실향민 : "이제는 크게 고향 생각나질 않거든. 벌써 10년이라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7번 변했는데. 그러나 명절 때 되면 고향이... 연어도 방류하면, 성장해가지고 방류한 자기 개천에 찾아오는데 인간으로서 고향 생각 안 날 턱이 있어요?"]

1950년대 고향을 떠나온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행여나 다시 한번 가볼 수 있을까.

이 곳 주민들은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반복할 때 마다 안타까움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판문점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한반도에 불어오는 듯 했던 평화의 바람.

그 따뜻한 바람에 한동안 마을이 들썩이기도 했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할 때까지만 해도 혹시 고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졌지. 이산가족찾기 하나만 놓고 봐도 발전된 게 하나도 없어요.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우리도 가볼 수 있겠구나,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을 가지면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텐데 그마저 없잖아."]

[김진국/82세/실향민 : "우리가 벌써 저번에는 문재인 대통령하고 김정은 위원장하고 손잡고 넘어갔다 넘어왔다 또 트럼프 대통령 하고 하는 거 보고 이제 좋아지겠구나 했는데..."]

70년 가까운 긴 세월은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나 하는 실망마저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새해 소망이 바뀔 리 없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가볼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할 뿐입니다.

[김상호/80세/실향민 : "책에도 나와 있잖아. 귀소 본능이라고.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난 그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이 나이 먹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더욱 반갑겠지만 그런 기회가 있으면 거기 가서 이렇게 한번 산천도 둘러보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김의준/74세/실향민 : "남북이 잘 돼서 왕래 했으면 좋고. 그러면 같이 발전할 수 있고 형제들도 서로 만날 수 있고. 그런 기회가 되는데 그것마저 안 되니까 안타까운 거지."]

눈앞에 고향을 두고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실향민들.

열 살 남짓했던 젊은 날의 그들은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고향 땅을 두 발로 딛어볼 수 있기를 올해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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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아바이 마을’의 새해 소망
    • 입력 2020-01-04 08:22:48
    • 수정2020-01-04 08:46:17
    남북의 창
[앵커]

강원도 속초에는 특별한 마을이 있습니다.

함경도가 고향인 분들이 모여 사는 실향민 마을인데요.

6.25 전쟁이 터지자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답니다.

벌써 어언 70년이 흘렀네요.

고향을 그리는 마음, 누구나 갖고 있겠지만 이분들처럼 절실한 분들은 많지 않을 텐데요.

올해는 고향 소식을 듣고, 더 나아가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요?

속초 아바이 마을 이야기, 채유나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작은 마을이 앉아있습니다.

마을과 시내를 이어주는 갯배는 이곳의 명물.

하지만 누가 뭐래도 마을의 자랑거리는 음식입니다.

돼지의 대창으로 만든 아바이 순대, 함경도에서 자주 먹었다는 가자미식해, 그리고 속초의 대표 먹거리 오징어순대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쓸쓸해 보이는 동상이 마을을 지키는 곳,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살고 있는 곳, 강원도 속초의 아바이 마을입니다.

아바이는 함경도 사투리로 나이가 많은 남성을 뜻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모인 피난민들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이어서 아바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요.

당시 피난민들이 실향민이 되어 70년 가까이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시.

올해 일흔 넷, 김의준 씨 고향입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명태가 제일 많이 나는 주산지고 이북에선 또 사과가 제일 많이 나는 주산단지예요."]

1951년 1.4 후퇴 당시 고향을 등지고 내려올 때에는 다시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피난 나와서 곧바로 여기 정착한 게 아니라 거제도까지 갔어요. 피난민 수용소에. 6살 때지. 곧바로 소문이 두 달만 있으면 올라간다 다시. 그러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든 거예요, 속초로. 여기 와서 막혔잖아. 하루라도 빨리 가려고. 그렇게 벌써 70년 다 돼가네."]

김의준 씨는 아직도 낡은 종이 두 장을 품 안에 고이 갖고 다닙니다.

행여 아들이 잊어버릴까, 선친이 친필로 남긴 고향집 주소와 고향 일대 약도입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한테 약도를, 고향 약도를 그려주면서 혹시 가게 되면 가봐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그 지도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간절함이 절절한 시구를 막힘없이 읊는 여든의 김상호 씨 역시 고향이 함경남도입니다.

아바이 마을이 품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다는데요.

[김상호/80세/실향민 : "여보, 금방 며칠 내로 온다하니까 일주일 삼사일 갔다 올 테니 그 사이 당신이 애 보고 몸조리 잘 하고 있으라고. 이렇게 나온 사람들이 많아. 그건 생이별이고 비극이야, 완전히."]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이 곳.

새 출발을 했다가도 옛 가족을 떨쳐버리지 못해 홀로 다시 남겨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고향에 대해 직접 얘기하는 대신 가슴에 묻게 된다는데요.

[김상호/80세/실향민 : "(아버지는) 나서부터 수십 년 동안 거기서 자랐으니까 지금 딱 가고 싶단 그런 말은 안하고 거기 어느 동네는 얼마만큼 변했을까 이런 거 술 마시다 보면 가끔 이야기하는 소리 듣고..."]

12살에 아바이 마을에 정착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이 된 김진국 씨.

점점 흐릿해져 가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야속할 뿐입니다.

[김진국/82세/실향민 : "이제는 크게 고향 생각나질 않거든. 벌써 10년이라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7번 변했는데. 그러나 명절 때 되면 고향이... 연어도 방류하면, 성장해가지고 방류한 자기 개천에 찾아오는데 인간으로서 고향 생각 안 날 턱이 있어요?"]

1950년대 고향을 떠나온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행여나 다시 한번 가볼 수 있을까.

이 곳 주민들은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반복할 때 마다 안타까움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판문점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한반도에 불어오는 듯 했던 평화의 바람.

그 따뜻한 바람에 한동안 마을이 들썩이기도 했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김의준/74세/실향민 :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할 때까지만 해도 혹시 고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졌지. 이산가족찾기 하나만 놓고 봐도 발전된 게 하나도 없어요.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우리도 가볼 수 있겠구나,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을 가지면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텐데 그마저 없잖아."]

[김진국/82세/실향민 : "우리가 벌써 저번에는 문재인 대통령하고 김정은 위원장하고 손잡고 넘어갔다 넘어왔다 또 트럼프 대통령 하고 하는 거 보고 이제 좋아지겠구나 했는데..."]

70년 가까운 긴 세월은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나 하는 실망마저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새해 소망이 바뀔 리 없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가볼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할 뿐입니다.

[김상호/80세/실향민 : "책에도 나와 있잖아. 귀소 본능이라고.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난 그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이 나이 먹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더욱 반갑겠지만 그런 기회가 있으면 거기 가서 이렇게 한번 산천도 둘러보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김의준/74세/실향민 : "남북이 잘 돼서 왕래 했으면 좋고. 그러면 같이 발전할 수 있고 형제들도 서로 만날 수 있고. 그런 기회가 되는데 그것마저 안 되니까 안타까운 거지."]

눈앞에 고향을 두고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실향민들.

열 살 남짓했던 젊은 날의 그들은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고향 땅을 두 발로 딛어볼 수 있기를 올해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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