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만에 바뀐 ‘술 세금’…국산 맥주의 역습 시작된다

입력 2020.01.0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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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법 개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1949년에 주세법이 처음 제정될 당시에는 종량세 체계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1968년에 종량세를 종가세로 바꿉니다. 주류 소비는 줄이면서 세수는 늘리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종가세는 말 그대로 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입니다. 주류 제조업자가 출고하는 제품 1리터당 가격에 세율을 곱해서 세금을 산출합니다. 주류 수입업자는 수입 신고하는 제품 1리터당 가격에 세율을 곱합니다. 주종이 똑같아도 제품 가격이 낮으면 세금을 적게 내고, 가격이 높으면 세금을 많이 내는 겁니다. 주류 도매상이나 주류를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음식점이나 편의점 등은 주세를 내지 않습니다.

세금을 걷는 정부는 좋을지 모르지만, 주류업체와 시민들에겐 반갑지 않습니다. 특히 시민들은 맛없는 술을 먹을 확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제도입니다. 원가를 낮출수록 세금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52년 만에 다시 '종량세'로 바뀐 이유는?

맥주와 탁주에 대한 이런 종가세가 2020년 1월 1일부터 종량세로 바뀌었습니다. 68년 개정 이후 52년 만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입니다.


요즘 대부분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를 '만 원에 4캔'으로 묶어서 판매합니다. 주류 수입업체들은 이런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2014년 6.7%에서 지난해 17.5%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거의 4년 만에 점유율이 2.6배가 된 겁니다. 그런데 국산 맥주는 점유율을 계속 뺏기면서도 왜 '만 원에 4캔'으로 안 팔지? 궁금해하셨던 분들 많으셨을 텐데요. 바로 '종가세'인 기존 세금 체계 때문이었습니다.

출고 시점 가격으로 세금을 매기다 보니, 국내 맥주 제조업체에겐 제조원가에다 판매 관리비와 매출 이익 등이 모두 과세표준에 포함됐습니다. 특히 맥주는 세율이 72%에 달합니다. 출고 시점 가격이 1,000원이면 720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류 수입업체의 경우 수입 신고 가격과 관세만 과세표준에 포함됐습니다. 결과적으로 국산 맥주에 비해 수입 맥주에는 주세가 상대적으로 적게 부과됐고, 이는 제품 판매가격의 차이로 이어졌습니다.


갈수록 국내 업체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결국 국세청이 주세법에 손을 댔습니다. 종량세는 출고되는 주류의 '양'에만 세율을 곱하기 때문에 생산원가 등 가격이 다르더라도 주종이 같고, 출고량이 같다면 세금도 똑같습니다. 이젠 국산·수입 맥주 모두 용량을 기준으로 같은 세금이 부과됩니다.

즉 종가세 체계에선 고품질 맥주를 생산해서 원가가 올라가면 그만큼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이제는 원가가 오르더라도 세금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고품질의 맥주를 추가적인 세금 부담 없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가가 오르면 맥주 가격 자체는 오를 수 있지만, 주류업체들이 고품질 맥주를 만들 유인이 커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수제맥주도 '4캔 만 원' 시대?

이번 주세법 개정으로 가장 수혜를 받는 곳은 수제맥주를 제조하는 곳입니다.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은 수제맥주 제조사는 생산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서 지금보다 더 다양한 제품과 고품질의 맥주 생산이 기대됩니다.

캔맥주 출고가격도 낮아질 전망입니다. 종가세 체계에선 과세표준에 포함됐던 캔용기 제조비용이 종량세에선 빠지는 게 그 이윱니다. 캔용기 제조 비용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어서 이 비용만 빠져도 가격 차이가 꽤 납니다. 구체적으로 리터당 총 세 부담을 비교해보면 종가세로는 1,758원을 냈는데, 종량세로는 1,343원만 내면 됩니다. 415원이나 내려가는 겁니다.

국세청 관계자는 "낮아진 출고가격을 소비자 가격에 얼마나 반영할지는 판매업자가 결정할 사항이지만 가격 조정 여력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습니다.


병맥주와 페트맥주, 생맥주는 출고가격이 다소 높아집니다. 그동안 포장 용기를 재활용해서 사용하는 등 포장 용기 제조비용이 이미 낮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낮은 제조비용 덕분에 상대적으로 판매가격이 낮았던 생맥주의 세금 부담액이 오히려 커지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국세청은 2년간 생맥주에 한해서 주세를 20% 경감해주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등 탁주의 경우엔 종가세 체계에서도 세율이 5%에 불과했습니다. 이 때문에 종량세로 전환되더라도 출고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적습니다. 하지만 고가의 포장재를 사용하던 고급 탁주는 세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양질의 원재료를 사용해서 가격을 인상해도 세 부담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고품질 제품 개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맥주 소비자 가격 달라질까?…"글쎄"

주세법 개정 혜택을 크게 받는 수제맥주 제조사들은 가격을 낮출 여지가 크지만, 기존 대형 주류업체들은 시장 상황을 계속 살펴보는 눈치입니다.

오비맥주는 지난해 10월에 이미 주세법 개정을 반영해서 출고가격을 평균 4.7% 인하했다는 입장입니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종량세로 바뀌는 논의가 예전부터 계속 있었기 때문에 업계 1위로서 환영하는 차원에서 미리 반영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4월에 인상한 출고 가격을 되돌리는 수준이고, 여전히 경쟁 제품 출고가격과 비슷하기 때문에 주세법 개정 영향을 받고 큰 변화를 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이트진로는 가격 변동에 대해 내부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출고가격을 내리는 건 시장에서 즉각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 반면, 출고가격을 올리면 시장에서 곧바로 가격을 올린다"며 "캔맥주 출고가격을 내리고, 병맥주와 페트맥주, 생맥주 출고가격을 올리는 것이 소비자들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업계 3위인 롯데칠성음료는 이미 지난 1일부터 '클라우드' 캔맥주와 병백주의 출고가격을 각각 16.7%, 5.4% 인하했고 생맥주는 3% 인상했습니다. 다만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에 비해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소비자 가격에 크게 영향을 미치긴 어렵습니다.

52년 만에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수입 맥주의 급성장에는 제동이 걸렸습니다. 국산 맥주가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지만 실제로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격 변동이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세법 개정이 주류업체들의 배만 불리는 데 그치는 건 아닐까요? 그러지 않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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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년 만에 바뀐 ‘술 세금’…국산 맥주의 역습 시작된다
    • 입력 2020-01-07 08:01:16
    취재K
주세법 개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1949년에 주세법이 처음 제정될 당시에는 종량세 체계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1968년에 종량세를 종가세로 바꿉니다. 주류 소비는 줄이면서 세수는 늘리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종가세는 말 그대로 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입니다. 주류 제조업자가 출고하는 제품 1리터당 가격에 세율을 곱해서 세금을 산출합니다. 주류 수입업자는 수입 신고하는 제품 1리터당 가격에 세율을 곱합니다. 주종이 똑같아도 제품 가격이 낮으면 세금을 적게 내고, 가격이 높으면 세금을 많이 내는 겁니다. 주류 도매상이나 주류를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음식점이나 편의점 등은 주세를 내지 않습니다.

세금을 걷는 정부는 좋을지 모르지만, 주류업체와 시민들에겐 반갑지 않습니다. 특히 시민들은 맛없는 술을 먹을 확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제도입니다. 원가를 낮출수록 세금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52년 만에 다시 '종량세'로 바뀐 이유는?

맥주와 탁주에 대한 이런 종가세가 2020년 1월 1일부터 종량세로 바뀌었습니다. 68년 개정 이후 52년 만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입니다.


요즘 대부분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를 '만 원에 4캔'으로 묶어서 판매합니다. 주류 수입업체들은 이런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2014년 6.7%에서 지난해 17.5%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거의 4년 만에 점유율이 2.6배가 된 겁니다. 그런데 국산 맥주는 점유율을 계속 뺏기면서도 왜 '만 원에 4캔'으로 안 팔지? 궁금해하셨던 분들 많으셨을 텐데요. 바로 '종가세'인 기존 세금 체계 때문이었습니다.

출고 시점 가격으로 세금을 매기다 보니, 국내 맥주 제조업체에겐 제조원가에다 판매 관리비와 매출 이익 등이 모두 과세표준에 포함됐습니다. 특히 맥주는 세율이 72%에 달합니다. 출고 시점 가격이 1,000원이면 720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류 수입업체의 경우 수입 신고 가격과 관세만 과세표준에 포함됐습니다. 결과적으로 국산 맥주에 비해 수입 맥주에는 주세가 상대적으로 적게 부과됐고, 이는 제품 판매가격의 차이로 이어졌습니다.


갈수록 국내 업체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결국 국세청이 주세법에 손을 댔습니다. 종량세는 출고되는 주류의 '양'에만 세율을 곱하기 때문에 생산원가 등 가격이 다르더라도 주종이 같고, 출고량이 같다면 세금도 똑같습니다. 이젠 국산·수입 맥주 모두 용량을 기준으로 같은 세금이 부과됩니다.

즉 종가세 체계에선 고품질 맥주를 생산해서 원가가 올라가면 그만큼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이제는 원가가 오르더라도 세금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고품질의 맥주를 추가적인 세금 부담 없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가가 오르면 맥주 가격 자체는 오를 수 있지만, 주류업체들이 고품질 맥주를 만들 유인이 커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수제맥주도 '4캔 만 원' 시대?

이번 주세법 개정으로 가장 수혜를 받는 곳은 수제맥주를 제조하는 곳입니다.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은 수제맥주 제조사는 생산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서 지금보다 더 다양한 제품과 고품질의 맥주 생산이 기대됩니다.

캔맥주 출고가격도 낮아질 전망입니다. 종가세 체계에선 과세표준에 포함됐던 캔용기 제조비용이 종량세에선 빠지는 게 그 이윱니다. 캔용기 제조 비용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어서 이 비용만 빠져도 가격 차이가 꽤 납니다. 구체적으로 리터당 총 세 부담을 비교해보면 종가세로는 1,758원을 냈는데, 종량세로는 1,343원만 내면 됩니다. 415원이나 내려가는 겁니다.

국세청 관계자는 "낮아진 출고가격을 소비자 가격에 얼마나 반영할지는 판매업자가 결정할 사항이지만 가격 조정 여력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습니다.


병맥주와 페트맥주, 생맥주는 출고가격이 다소 높아집니다. 그동안 포장 용기를 재활용해서 사용하는 등 포장 용기 제조비용이 이미 낮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낮은 제조비용 덕분에 상대적으로 판매가격이 낮았던 생맥주의 세금 부담액이 오히려 커지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국세청은 2년간 생맥주에 한해서 주세를 20% 경감해주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등 탁주의 경우엔 종가세 체계에서도 세율이 5%에 불과했습니다. 이 때문에 종량세로 전환되더라도 출고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적습니다. 하지만 고가의 포장재를 사용하던 고급 탁주는 세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양질의 원재료를 사용해서 가격을 인상해도 세 부담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고품질 제품 개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맥주 소비자 가격 달라질까?…"글쎄"

주세법 개정 혜택을 크게 받는 수제맥주 제조사들은 가격을 낮출 여지가 크지만, 기존 대형 주류업체들은 시장 상황을 계속 살펴보는 눈치입니다.

오비맥주는 지난해 10월에 이미 주세법 개정을 반영해서 출고가격을 평균 4.7% 인하했다는 입장입니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종량세로 바뀌는 논의가 예전부터 계속 있었기 때문에 업계 1위로서 환영하는 차원에서 미리 반영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4월에 인상한 출고 가격을 되돌리는 수준이고, 여전히 경쟁 제품 출고가격과 비슷하기 때문에 주세법 개정 영향을 받고 큰 변화를 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이트진로는 가격 변동에 대해 내부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출고가격을 내리는 건 시장에서 즉각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 반면, 출고가격을 올리면 시장에서 곧바로 가격을 올린다"며 "캔맥주 출고가격을 내리고, 병맥주와 페트맥주, 생맥주 출고가격을 올리는 것이 소비자들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업계 3위인 롯데칠성음료는 이미 지난 1일부터 '클라우드' 캔맥주와 병백주의 출고가격을 각각 16.7%, 5.4% 인하했고 생맥주는 3% 인상했습니다. 다만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에 비해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소비자 가격에 크게 영향을 미치긴 어렵습니다.

52년 만에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수입 맥주의 급성장에는 제동이 걸렸습니다. 국산 맥주가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지만 실제로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격 변동이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세법 개정이 주류업체들의 배만 불리는 데 그치는 건 아닐까요? 그러지 않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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