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여자라 섬세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은 한 섬세한 여자의 이야기

입력 2020.01.08 (10:03) 수정 2020.01.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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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자라 섬세하시네요"

'뭐야? 칭찬인가, 칭찬인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차별당한 기분인데?' 이런 경험 종종 겪지요?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생각해 줘서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듣고 나면 기분이 왠지 찜찜한 그런 말들. 그렇다고 '기분 나쁘다'고 괜히 말했다가는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적 느낌'이 엄습합니다.

바로 이런 걸 '먼지 차별'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곳곳에 깔려 있고, 유해하며, 자주 치워주지 않으면 쌓이는 '먼지'와도 같은 차별이란 뜻입니다. 이런 말들을 곰곰이 따져 보면, 어떤 경향성이 있는데요. 성별이나 나이, 신체조건, 성 정체성,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를 기저에 깔고 있는 표현입니다.

여성단체인 한국 여성의 전화는 벌써 3년 전부터 이 '먼지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여 왔는데요. '먼지 차별'의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화장이 왜 그래?'
'오늘 어디 좋은 데 가? 옷이 좀...'
'살 좀 빼~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엄마가 일하면 애는 누가 봐?'
'육아휴직 쓰면 출.포.남(출세를 포기한 남자)'
'육아휴직? 좋겠다~ 나도 쉬고 싶다'
'우리 팀장은 여잔데 일 잘해'
'이래서 여직원이랑 일을 못 하겠어.'
'동료끼리 뭐 어때? 이게 동료애지'
'몇 학번이에요?' (흠… 대학 안 다녔는데… 어쩌지)

사례집을 발간한 한국여성의전화 최선혜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지 차별이란 게 용어에서 나타나듯이 먼지가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일상생활 곳곳에 깔려 있고, 오래되거나 쌓이면 몸에 유해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먼지 차별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거나 나는 당연하게 이런 이야기가 일반적이라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말에 담겨 있는 건 불평등이거나 차별이어서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그런 걸 말합니다."

최 소장은 또 "저도 결혼 언제 하냐? 이런 얘기 자주 들어요. 친척들이 결혼 안 할 거냐?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할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고요. 나는 너를 위해서 얘기한 건데, 너 잘되라고 얘기한 건데, 걱정되어서 얘기한 건데, 칭찬으로 얘기한 건데 이게 왜 차별이냐 라고 항변을 하시는데, 상대방이 이 이야기가 불편하다고 얘기하면 어느 지점에서 이 이야기가 불편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입니다.

2020년 1월 2일 새벽 3시,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진정이 올라왔습니다. 진정을 제출한 주체는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단체 소속 회원들. 2017년 결성돼 현재 회원 수는 1,800명이 넘는, 꽤 규모 있는 단체입니다. 1월 1일 휴일이 끝나자마자 2일 새벽 3시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을 정도로 다급했던 이들의 사연은 무엇일까요.

출처:한국 여성의 전화출처:한국 여성의 전화

유아용 제품을 판매하면서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으로 규정해 판매하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주장인데요, 실제로 인터넷 유아용품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젖꼭지부터 의류, 크레파스에 이르기까지 파란색 제품에는 남아용, 분홍색 제품에는 여아용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장하나 활동가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태어나자마자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이라는 고정관념을 주입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제조업체부터 분홍색 물품에는 여아용이다, 파란색 물품에는 남아용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성별에 따른 특정 색깔을 강요하기 때문에 유아에 대한 인권침해입니다. 이유가 없는 규범이 아이들에게 강요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남자애들은 울지 마라, 여자애들은 얌전하게 걸어라. 이런 식으로 이유가 없는 낡은 규범들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아이들이 자라 선택하게 될 직업이 됐든 자아실현의 여정에 있어, 여성, 남성이라는 굴레가 평생 덧씌워지는 출발점일 수도 있는 거죠."

출처:한국 여성의 전화출처:한국 여성의 전화

기자 역시 두 딸을 키운 엄마로서, 머리핀부터 부츠까지 분홍색으로 '도배'한 '핑크 공주'들을 키워야 했던 엄마로서, '여자아이에겐 역시 분홍색'이라는 고정관념에 순응하면서도 문제의식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얘기했다간 너무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될까 두려워 침묵했었지요. 보통 부모들이 모두 비슷할 겁니다. 이런 침묵은 '사소해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백한 차별'인 '먼지 차별'을 용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2018년 '차별의 언어'라는 책을 펴낸 이화여대 장한업 교수는 이런 '먼지 차별'의 기저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과 다른 사람의 '다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배려심 부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장한업 교수의 얘깁니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아주 쉽게 말들을 해요. 결혼했냐, 아이는 몇이냐.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결혼을 안 했다고 하면 아주 놀라고, 아이를 낳은 나이가 되었는데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하면 또 놀랍니다. 문제는 타인의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이지만, 인간의 다를 수 있는 권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줘야지요. 인간은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요. 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게 문제이고,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너무 개입하면서도 자신이 개입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불편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도 못 하고 있지요."

나의 말과 행동은 편견을 가진 게 아닐까.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불편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나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먼지 차별'을 짚어내고 다스려야 말은 칼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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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여자라 섬세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은 한 섬세한 여자의 이야기
    • 입력 2020-01-08 10:03:14
    • 수정2020-01-08 11:10:46
    취재K
"역시 여자라 섬세하시네요" '뭐야? 칭찬인가, 칭찬인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차별당한 기분인데?' 이런 경험 종종 겪지요?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생각해 줘서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듣고 나면 기분이 왠지 찜찜한 그런 말들. 그렇다고 '기분 나쁘다'고 괜히 말했다가는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적 느낌'이 엄습합니다. 바로 이런 걸 '먼지 차별'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곳곳에 깔려 있고, 유해하며, 자주 치워주지 않으면 쌓이는 '먼지'와도 같은 차별이란 뜻입니다. 이런 말들을 곰곰이 따져 보면, 어떤 경향성이 있는데요. 성별이나 나이, 신체조건, 성 정체성,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를 기저에 깔고 있는 표현입니다. 여성단체인 한국 여성의 전화는 벌써 3년 전부터 이 '먼지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여 왔는데요. '먼지 차별'의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화장이 왜 그래?' '오늘 어디 좋은 데 가? 옷이 좀...' '살 좀 빼~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엄마가 일하면 애는 누가 봐?' '육아휴직 쓰면 출.포.남(출세를 포기한 남자)' '육아휴직? 좋겠다~ 나도 쉬고 싶다' '우리 팀장은 여잔데 일 잘해' '이래서 여직원이랑 일을 못 하겠어.' '동료끼리 뭐 어때? 이게 동료애지' '몇 학번이에요?' (흠… 대학 안 다녔는데… 어쩌지) 사례집을 발간한 한국여성의전화 최선혜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지 차별이란 게 용어에서 나타나듯이 먼지가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일상생활 곳곳에 깔려 있고, 오래되거나 쌓이면 몸에 유해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먼지 차별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거나 나는 당연하게 이런 이야기가 일반적이라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말에 담겨 있는 건 불평등이거나 차별이어서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그런 걸 말합니다." 최 소장은 또 "저도 결혼 언제 하냐? 이런 얘기 자주 들어요. 친척들이 결혼 안 할 거냐?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할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고요. 나는 너를 위해서 얘기한 건데, 너 잘되라고 얘기한 건데, 걱정되어서 얘기한 건데, 칭찬으로 얘기한 건데 이게 왜 차별이냐 라고 항변을 하시는데, 상대방이 이 이야기가 불편하다고 얘기하면 어느 지점에서 이 이야기가 불편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입니다. 2020년 1월 2일 새벽 3시,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진정이 올라왔습니다. 진정을 제출한 주체는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단체 소속 회원들. 2017년 결성돼 현재 회원 수는 1,800명이 넘는, 꽤 규모 있는 단체입니다. 1월 1일 휴일이 끝나자마자 2일 새벽 3시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을 정도로 다급했던 이들의 사연은 무엇일까요. 출처:한국 여성의 전화 유아용 제품을 판매하면서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으로 규정해 판매하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주장인데요, 실제로 인터넷 유아용품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젖꼭지부터 의류, 크레파스에 이르기까지 파란색 제품에는 남아용, 분홍색 제품에는 여아용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장하나 활동가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태어나자마자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이라는 고정관념을 주입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제조업체부터 분홍색 물품에는 여아용이다, 파란색 물품에는 남아용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성별에 따른 특정 색깔을 강요하기 때문에 유아에 대한 인권침해입니다. 이유가 없는 규범이 아이들에게 강요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남자애들은 울지 마라, 여자애들은 얌전하게 걸어라. 이런 식으로 이유가 없는 낡은 규범들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아이들이 자라 선택하게 될 직업이 됐든 자아실현의 여정에 있어, 여성, 남성이라는 굴레가 평생 덧씌워지는 출발점일 수도 있는 거죠." 출처:한국 여성의 전화 기자 역시 두 딸을 키운 엄마로서, 머리핀부터 부츠까지 분홍색으로 '도배'한 '핑크 공주'들을 키워야 했던 엄마로서, '여자아이에겐 역시 분홍색'이라는 고정관념에 순응하면서도 문제의식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얘기했다간 너무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될까 두려워 침묵했었지요. 보통 부모들이 모두 비슷할 겁니다. 이런 침묵은 '사소해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백한 차별'인 '먼지 차별'을 용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2018년 '차별의 언어'라는 책을 펴낸 이화여대 장한업 교수는 이런 '먼지 차별'의 기저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과 다른 사람의 '다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배려심 부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장한업 교수의 얘깁니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아주 쉽게 말들을 해요. 결혼했냐, 아이는 몇이냐.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결혼을 안 했다고 하면 아주 놀라고, 아이를 낳은 나이가 되었는데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하면 또 놀랍니다. 문제는 타인의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이지만, 인간의 다를 수 있는 권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줘야지요. 인간은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요. 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게 문제이고,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너무 개입하면서도 자신이 개입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불편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도 못 하고 있지요." 나의 말과 행동은 편견을 가진 게 아닐까.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불편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나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먼지 차별'을 짚어내고 다스려야 말은 칼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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