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中 감기 앓는 아이에 ‘간질약’ 처방…“하마터면~”

입력 2020.01.0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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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약 처방 어린이 ..'실명 위기까지'

열흘 전인 작년 12월 29일 중국 동북부 지린 성의 한 6살 여자아이가 감기 증세로 지역 어린이 전문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의사 처방을 받고 귀가한 아이의 상태가 그날 밤 더 악화했다. 중국 매체와 인터뷰한 아이 아버지의 이야기다.

"첫날 약을 먹고 나서 저녁에 자다 일어난 아이의 눈이 멍해 있었어요. 헛소리도 하는 거에요"

열이 내리지 않아 그런 거로 생각한 부모는 그날 밤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 아이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아이를 돌보던 장모님이 출근한 저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다시 가보자고 했어요. 어린이 병원을 다녀와도 아이 상태가 안 좋아지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자는 거에요."

다른 병원을 부랴부랴 찾은 부모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그 의사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묻는 거에요. 그래서 어린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의사가 보자마자, 이건 열감기 치료 약이 아니라는 거에요. 간질 치료 약이라는 겁니다."

이미 간질약을 감기약인 줄 알고 18알이나 먹은 뒤였다. 그날 밤 아이 상태는 더 나빠졌다.

"저녁 9시쯤 소파에 기대있던 아이가 갑자기 저의 손을 잡으면서 "아빠 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라고 말하는 거에요. 너무너무 놀라서 다리가 풀려버렸어요."


약 처방은 잘못하지만…. "의사가 신(神)이 아니잖아요"

다음 날 첫 처방을 받은 어린이 전문병원을 다시 찾아간 부모가 어떻게 된 일인지 따졌다. 처방전을 본 담당 의사는 '감기약'과 '간질약' 코드 번호가 비슷해 일어난 일이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환자와 가족에게도 사과했다.

병원 측은 위로금으로 1만 위안(168만 원)을 내놓겠다고 부모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병원 관계자의 말이 부모를 또 화나게 했다. 중국 매체에 보도된 병원 관계자의 녹취 음성이다.

"의사도 신이 아니고 사람이에요. 의사 일은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차랑 부딪힐 가능성이 있어요. 의사가 약을 잘못 처방했다고 의사 일을 그만두라고 할 순 없어요. 그럼 병원에 의사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이 사건은 중대 의료사고는 아닙니다. 별거 아니기 때문에 상부에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고해야 할 사항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기사를 접한 시민들은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느냐?" "작은 병원도 아니고 어린이 전문병원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병원에 묻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잘못이 중대 사고에 해당합니까?" 등의 댓글을 올리며 병원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질타했다.

중국 인민일보는 8일 이 사건을 자세히 전하며 아이 감기 증세가 나아 지난 6일 퇴원했고, 아이 눈 상태도 좋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해당 의사에겐 병원에서 정직 처분을 내렸다고 전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의료사고지만 14억 인구 중국에선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서 웬만해선 중국 매체에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이 의료사고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까지 난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이다. 중국 사회에서 가지는 인민일보의 무게를 참작할 때 아마도 아이와 아이의 부모는 억울한 일 없이 후유증 치료 등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가짜 DPT 백신 사건' 교훈?

중국 당국과 관영매체가 이 문제를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것일까? 중국 보건당국은 앞서 잊지 못할 의료사고를 겪었다. 2년 전 발생한 DPT(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가짜 백신 사건이다. 디프테리아와 백일해, 파상풍은 예방 접종을 하면 막을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생후 2개월 아이 때부터 예방접종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백신을 중국 2대 백신 기업인 창성 바이오가 가짜로 만들어 판매한 것이다. 중국 보건당국의 조사로 뒤늦게 드러났는데, 이미 36만 명의 아이들이 이 가짜 백신을 접종한 상태였다.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는 아이까지 생겨났다.

들끓는 민심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중국공산당 타도하자'는 벽보가 나붙고, 피해 어린이 부모들이 베이징 보건당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SNS로 당국에 대한 성토가 넘쳐나고, 관련 사실을 중국 국영 방송사 CCTV에서 인터뷰했던 보건당국 고위 공무원은 '명품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사퇴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부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사태가 전개되자 리커창 총리가 "이번 일은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깬 사건"이라며 "전 인민에게 반드시 명백히 설명하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순방 중이던 시진핑 주석까지 나서 해당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창성 바이오 대표 등 15명이 구속됐고, 91억 1,203만 위안(1조 5,37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벌금이 부과됐다.


집권 70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은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서 출발한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인구가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시기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중국 인민들이 꼽는 공산당 업적 중 가장 큰 것이 개혁개방을 통해 인민의 삶의 질을 크게 높였다는 것이다.

비록 강압적이고 폐쇄적인 일방주의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는 있지만,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의 신뢰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를 잘 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제성장에 목매달고, 민심 동향도 항상 주시한다. 이번 일도 중국 소도시에서 일어난 한 의료사고가 나비효과로 번져나갈 여파를 살폈을 수도 있다. 비록 지도부를 뽑는 인민의 선거와 책임을 묻는 탄핵 같은 민주적 절차는 없지만, 가짜 백신 사태처럼 통치 정당성을 흔드는 사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와 의사수렴 구조, 집행 방식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 서구사회가 프랑스 혁명 이후 주권자가 국민임을 분명히 하고 이런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중국은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전제주의적 통치 시스템이다.

그런 통치 시스템이 민심을 살핀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중국 스스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한 이 정치 시스템에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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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中 감기 앓는 아이에 ‘간질약’ 처방…“하마터면~”
    • 입력 2020-01-08 16:42:45
    특파원 리포트
간질약 처방 어린이 ..'실명 위기까지'

열흘 전인 작년 12월 29일 중국 동북부 지린 성의 한 6살 여자아이가 감기 증세로 지역 어린이 전문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의사 처방을 받고 귀가한 아이의 상태가 그날 밤 더 악화했다. 중국 매체와 인터뷰한 아이 아버지의 이야기다.

"첫날 약을 먹고 나서 저녁에 자다 일어난 아이의 눈이 멍해 있었어요. 헛소리도 하는 거에요"

열이 내리지 않아 그런 거로 생각한 부모는 그날 밤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 아이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아이를 돌보던 장모님이 출근한 저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다시 가보자고 했어요. 어린이 병원을 다녀와도 아이 상태가 안 좋아지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자는 거에요."

다른 병원을 부랴부랴 찾은 부모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그 의사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묻는 거에요. 그래서 어린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의사가 보자마자, 이건 열감기 치료 약이 아니라는 거에요. 간질 치료 약이라는 겁니다."

이미 간질약을 감기약인 줄 알고 18알이나 먹은 뒤였다. 그날 밤 아이 상태는 더 나빠졌다.

"저녁 9시쯤 소파에 기대있던 아이가 갑자기 저의 손을 잡으면서 "아빠 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라고 말하는 거에요. 너무너무 놀라서 다리가 풀려버렸어요."


약 처방은 잘못하지만…. "의사가 신(神)이 아니잖아요"

다음 날 첫 처방을 받은 어린이 전문병원을 다시 찾아간 부모가 어떻게 된 일인지 따졌다. 처방전을 본 담당 의사는 '감기약'과 '간질약' 코드 번호가 비슷해 일어난 일이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환자와 가족에게도 사과했다.

병원 측은 위로금으로 1만 위안(168만 원)을 내놓겠다고 부모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병원 관계자의 말이 부모를 또 화나게 했다. 중국 매체에 보도된 병원 관계자의 녹취 음성이다.

"의사도 신이 아니고 사람이에요. 의사 일은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차랑 부딪힐 가능성이 있어요. 의사가 약을 잘못 처방했다고 의사 일을 그만두라고 할 순 없어요. 그럼 병원에 의사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이 사건은 중대 의료사고는 아닙니다. 별거 아니기 때문에 상부에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고해야 할 사항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기사를 접한 시민들은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느냐?" "작은 병원도 아니고 어린이 전문병원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병원에 묻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잘못이 중대 사고에 해당합니까?" 등의 댓글을 올리며 병원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질타했다.

중국 인민일보는 8일 이 사건을 자세히 전하며 아이 감기 증세가 나아 지난 6일 퇴원했고, 아이 눈 상태도 좋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해당 의사에겐 병원에서 정직 처분을 내렸다고 전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의료사고지만 14억 인구 중국에선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서 웬만해선 중국 매체에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이 의료사고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까지 난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이다. 중국 사회에서 가지는 인민일보의 무게를 참작할 때 아마도 아이와 아이의 부모는 억울한 일 없이 후유증 치료 등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가짜 DPT 백신 사건' 교훈?

중국 당국과 관영매체가 이 문제를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것일까? 중국 보건당국은 앞서 잊지 못할 의료사고를 겪었다. 2년 전 발생한 DPT(디프테리아, 백일해, 파상풍) 가짜 백신 사건이다. 디프테리아와 백일해, 파상풍은 예방 접종을 하면 막을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생후 2개월 아이 때부터 예방접종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백신을 중국 2대 백신 기업인 창성 바이오가 가짜로 만들어 판매한 것이다. 중국 보건당국의 조사로 뒤늦게 드러났는데, 이미 36만 명의 아이들이 이 가짜 백신을 접종한 상태였다.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는 아이까지 생겨났다.

들끓는 민심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중국공산당 타도하자'는 벽보가 나붙고, 피해 어린이 부모들이 베이징 보건당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SNS로 당국에 대한 성토가 넘쳐나고, 관련 사실을 중국 국영 방송사 CCTV에서 인터뷰했던 보건당국 고위 공무원은 '명품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사퇴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부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사태가 전개되자 리커창 총리가 "이번 일은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깬 사건"이라며 "전 인민에게 반드시 명백히 설명하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순방 중이던 시진핑 주석까지 나서 해당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창성 바이오 대표 등 15명이 구속됐고, 91억 1,203만 위안(1조 5,37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벌금이 부과됐다.


집권 70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은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서 출발한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인구가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시기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중국 인민들이 꼽는 공산당 업적 중 가장 큰 것이 개혁개방을 통해 인민의 삶의 질을 크게 높였다는 것이다.

비록 강압적이고 폐쇄적인 일방주의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는 있지만,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의 신뢰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를 잘 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제성장에 목매달고, 민심 동향도 항상 주시한다. 이번 일도 중국 소도시에서 일어난 한 의료사고가 나비효과로 번져나갈 여파를 살폈을 수도 있다. 비록 지도부를 뽑는 인민의 선거와 책임을 묻는 탄핵 같은 민주적 절차는 없지만, 가짜 백신 사태처럼 통치 정당성을 흔드는 사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와 의사수렴 구조, 집행 방식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 서구사회가 프랑스 혁명 이후 주권자가 국민임을 분명히 하고 이런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중국은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전제주의적 통치 시스템이다.

그런 통치 시스템이 민심을 살핀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중국 스스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한 이 정치 시스템에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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