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미 정부·수뇌부, 제주 초토화작전 알고 있었다”…4·3평화재단, 미국자료 추가 입수

입력 2020.01.12 (15:27) 수정 2020.01.1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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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 당시, 미군정과 주한 미 군사고문단이 5.10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당시 제주 초토화작전을 훌륭한 작전으로 평가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입수한 연합군 최고사령부 자료에서 당시 미 군정 최고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5.10 선거반대 세력을 "범죄자일 뿐"이라고 언급한 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미군정 수뇌, 단독선거 반대자 '범죄자'로 취급했다"

평화재단이 입수한 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Hodge) 중장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앞둔 1948년 3월 3일 UN임시위원단과 덕수궁에서 가진 회의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을 벌였는데, UN임시위원단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지만, 하지는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다" 라며 강력하게 맞섰고, 임시위원단이 "우익세력이 그런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냐"고 따지자 하지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평화재단은 '정치범'과 '범죄자'는 대응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하지의 이 같은 답변은 5‧10선거를 반대한 제주지역에서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제주 초토화작전 "최고 수준의 사고" 극찬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이 입수한 1948년 7월 2일자 미 국무부 문서에는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가 제주의 최고 지휘관 브라운(Rothell H. Brown)대령의 보고를 바탕으로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자와 관계되어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도 담겨 있다.

1949년 1월 ‘싹쓸이(cleaning-up)’와 로버츠 장군의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1949년 1월 ‘싹쓸이(cleaning-up)’와 로버츠 장군의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은 당시 제주 초토화작전을 극찬한 보고서도 입수했는데, 당시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Roberts) 공한철 등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에서 소위 초토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며,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에 의하면, 로버츠 준장은 1949년 1월 28일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했다고 밝혔다.

1949년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2천 명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세워 사형 350명 등 중형을 선고했다고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1949년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2천 명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세워 사형 350명 등 중형을 선고했다고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은 또, 당시 극동군사령부 정보요약 보고에서도 우익세력의 행위에 대한 앞선 하지의 답변과는 달리, 미군은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이 76명의 주민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을 때 "그들에게 '주의(brought to the attention)'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고, 극동군사령부 문서 1949년 7월 21일 자에는 유재흥 대령의 귀순공작과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며, "약 2천 명의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에 대한 재판이 제주도에서 최근 진행되었다. 350명의 사람이 사형을, 약 1천 650명이 20년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도 기록했다고 밝혔다.

평화재단은 이에 대해 4‧3 군사재판 수형자 중 일부가 지난해(2019년) 법원에 의해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과 국가보상판결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당시 미군은 '공산주의자들'이란 누명을 씌우고 불법적인 재판과 가혹행위를 가해도 용인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주4‧3평화재단, 미국자료 현지조사 결과 3만 8천매 입수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미국자료를 검색하는 모습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미국자료를 검색하는 모습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평화재단은 이번 미국 현지 조사에서 제주4·3과 관련한 3만 8천 500여 매의 기록물을 수집해 '4·3 아카이브' 구축의 토대도 마련했다.

제주4·3과 관련한 미국자료 조사는 2001년 4·3위원회가 한 뒤 18년 만에 재개된 것으로 그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간된 위원회의 미국자료집은 NARA의 분류체계에 따른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증거자료로서의 가치가 반감됐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해당 문서들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증거력을 되살린 것은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또, 2001년에는 주한미 군정청·주한미군 등 남한에 진주했던 미 군정·미군 문서를 대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이번 현지조사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연합군 최고사령부, 국무부 등 상위기관의 문서들을 중점적으로 조사·수집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올해에도 미국자료 현지조사팀을 가동해, 미군자료의 비밀해제 요청을 계속해가면서 조사대상을 NARA 이외에 미 육군군사연구소와 트루먼도서관 등 미국 소재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등으로 확대하고, 올 연말에 이번 수집자료 등을 토대로 '4‧3 미국자료집'을 편찬할 예정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당시 미 군정과 주한 미 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 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고,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해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

※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할 수 있다.…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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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4·3 당시 미 정부·수뇌부, 제주 초토화작전 알고 있었다”…4·3평화재단, 미국자료 추가 입수
    • 입력 2020-01-12 15:27:23
    • 수정2020-01-12 15:29:09
    취재K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 당시, 미군정과 주한 미 군사고문단이 5.10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당시 제주 초토화작전을 훌륭한 작전으로 평가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입수한 연합군 최고사령부 자료에서 당시 미 군정 최고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5.10 선거반대 세력을 "범죄자일 뿐"이라고 언급한 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미군정 수뇌, 단독선거 반대자 '범죄자'로 취급했다"

평화재단이 입수한 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Hodge) 중장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앞둔 1948년 3월 3일 UN임시위원단과 덕수궁에서 가진 회의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을 벌였는데, UN임시위원단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지만, 하지는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다" 라며 강력하게 맞섰고, 임시위원단이 "우익세력이 그런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냐"고 따지자 하지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평화재단은 '정치범'과 '범죄자'는 대응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하지의 이 같은 답변은 5‧10선거를 반대한 제주지역에서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제주 초토화작전 "최고 수준의 사고" 극찬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이 입수한 1948년 7월 2일자 미 국무부 문서에는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가 제주의 최고 지휘관 브라운(Rothell H. Brown)대령의 보고를 바탕으로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자와 관계되어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도 담겨 있다.

1949년 1월 ‘싹쓸이(cleaning-up)’와 로버츠 장군의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은 당시 제주 초토화작전을 극찬한 보고서도 입수했는데, 당시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Roberts) 공한철 등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에서 소위 초토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며,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에 의하면, 로버츠 준장은 1949년 1월 28일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했다고 밝혔다.

1949년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2천 명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세워 사형 350명 등 중형을 선고했다고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평화재단은 또, 당시 극동군사령부 정보요약 보고에서도 우익세력의 행위에 대한 앞선 하지의 답변과는 달리, 미군은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이 76명의 주민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을 때 "그들에게 '주의(brought to the attention)'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고, 극동군사령부 문서 1949년 7월 21일 자에는 유재흥 대령의 귀순공작과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며, "약 2천 명의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에 대한 재판이 제주도에서 최근 진행되었다. 350명의 사람이 사형을, 약 1천 650명이 20년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도 기록했다고 밝혔다.

평화재단은 이에 대해 4‧3 군사재판 수형자 중 일부가 지난해(2019년) 법원에 의해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과 국가보상판결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당시 미군은 '공산주의자들'이란 누명을 씌우고 불법적인 재판과 가혹행위를 가해도 용인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주4‧3평화재단, 미국자료 현지조사 결과 3만 8천매 입수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미국자료를 검색하는 모습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평화재단은 이번 미국 현지 조사에서 제주4·3과 관련한 3만 8천 500여 매의 기록물을 수집해 '4·3 아카이브' 구축의 토대도 마련했다.

제주4·3과 관련한 미국자료 조사는 2001년 4·3위원회가 한 뒤 18년 만에 재개된 것으로 그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간된 위원회의 미국자료집은 NARA의 분류체계에 따른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증거자료로서의 가치가 반감됐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해당 문서들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증거력을 되살린 것은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또, 2001년에는 주한미 군정청·주한미군 등 남한에 진주했던 미 군정·미군 문서를 대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이번 현지조사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연합군 최고사령부, 국무부 등 상위기관의 문서들을 중점적으로 조사·수집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올해에도 미국자료 현지조사팀을 가동해, 미군자료의 비밀해제 요청을 계속해가면서 조사대상을 NARA 이외에 미 육군군사연구소와 트루먼도서관 등 미국 소재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등으로 확대하고, 올 연말에 이번 수집자료 등을 토대로 '4‧3 미국자료집'을 편찬할 예정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당시 미 군정과 주한 미 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 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고,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해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

※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할 수 있다.…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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