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치마 입고 가전제품 홍보 아직도?…‘성 상품화’ 논란

입력 2020.01.1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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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노형동의 가전제품 매장 앞. 두 명의 여성이 춤을 추며 할인 행사 홍보하는 모습

제주시 노형동의 가전제품 매장 앞. 두 명의 여성이 춤을 추며 할인 행사 홍보하는 모습

"요즘도 이런 행사를 해?"

처음 이 소식을 접한 건 친한 지인을 통해서였습니다.

흰색 와이셔츠에 짧은 치마를 입은 두 여성이 길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진 한 장. 얼핏 보니 제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제주시 노형동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저녁, 근처를 지나던 기자가 걸음을 멈췄던 곳은 한 대기업의 가전제품 판매점 앞이었습니다. 사진 속 두 여성은 그날도 세일 행사 현수막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매장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며칠 뒤, 제주시 내 다른 매장에서도 춤추는 여성들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복장만 다를 뿐, 이번에도 두 여성이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춤을 추며 행사를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하고, 일상생활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감지할 수 있는 '성 인지(성 평등) 감수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시대. 왜 이런 홍보 방식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를 짚어 보기 전에, 기자는 이런 홍보 방식이 왜 문제인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여성 모델들을 활용해 홍보를 했던 제주시 내 한 가전제품 영업지점. 대규모 오픈 행사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여성 모델들을 활용해 홍보를 했던 제주시 내 한 가전제품 영업지점. 대규모 오픈 행사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상품 품질보다 여성으로 이목 끌어

전문가들은 이 같은 마케팅이 여성이라는 성을 상품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전제품 할인 행사라면 할인 품목은 무엇인지, 할인하는 제품의 기능과 내구성은 얼마나 우수한지, 할인율은 얼마나 큰지 등을 홍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신체 조건을 앞세워 여성들을 선발한 뒤, 이들의 신체를 최대한 부각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자체가 여성을 상품 판매의 도구로 이용하는 거라는 게 이들 설명입니다. 말 그대로,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겁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윤소 활동가는 "제품이나 회사명을 가렸을 때 어떤 제품을 광고하고 홍보하는지 모르겠다면, 그 광고는 성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라며 "광고의 내용과 무관하게 여성의 몸을 전시할 경우, 그건 성 상품화이자 대상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성 상품화가 요즘의 마케팅 추세와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여름도 아니고 어느 여성이 추운 날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일하고 싶겠냐"면서 "보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광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 원(F1)의 공식 웹사이트. 2018년 ‘그리드 걸’을 없애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사진 출처 : F1 공식 웹사이트]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 원(F1)의 공식 웹사이트. 2018년 ‘그리드 걸’을 없애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사진 출처 : F1 공식 웹사이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리드 걸

실제로 이런 움직임은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지난 2018년 호주에서 막을 연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 원(F1)에선 '레이싱 걸'로 불리는 그리드 걸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이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상태에서 출전 선수 이름이 적힌 팻말 등을 들고 자세를 취하는 역할 등을 맡아 왔습니다.

당시 F1 협회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그리드 걸을 없애겠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협회는 "그리드 걸을 고용해 온 오랜 시간의 관습을 이제는 끝내겠다"며 "이러한 관습이 우리의 브랜드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데다, 현대 사회의 규범에도 맞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소주병에 여성 연예인 사진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지나친 음주 문화를 근절하려는 게 제1 목적이지만, 주류 광고에서 불거지는 성 상품화 논란 또한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입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 이미지를 상품 판매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며 "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2017년 신세계그룹이 (주)제주소주를 인수해 당시 출시한 제품. 제품명을 두고 성매매 시장을 연상시킨다는 논란이 일었다.2017년 신세계그룹이 (주)제주소주를 인수해 당시 출시한 제품. 제품명을 두고 성매매 시장을 연상시킨다는 논란이 일었다.

한편, 이와 비슷한 논란이 제주에서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 주류회사가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소주를 출시해, 성 상품화 논란의 중심에 선 겁니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2017년, 알코올도수 16.9도 소주 '짧은 밤'과 그 보다 도수가 높은 20.1도 소주 '긴 밤' 두 종을 출시했습니다. 여기에 제주가 고향인 한 여성 가수를 모델로 선정해, '너는 어떤 밤이 좋아'란 광고 문구를 내걸었습니다.

당시 제주 지역 여성단체들은 논평을 내고 제품명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송영심 제주여성인권연대 소장은 "저런 상품명이 재밌다 생각하고 넘기기보다, 상품명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를 면밀히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여성을 물건에 대입해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곧 성 상품화"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여성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

일각에선 이런 문제 제기가 도리어 다른 여성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합니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적여' 프레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논리를 앞세우며 이 모든 게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심에서 시작된다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차원에서 시작되는 논의"라며 "여성들이 지금보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늘려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여성들이 이런 노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제주여성인권연대 송영심 소장은 "짧은 옷을 입고 알바를 하는 여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판촉 행사를 기획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라며 현상을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가 됐던 영업지점 두 곳 모두 닷새 동안 여성 모델들을 앞세워 할인 행사를 홍보했다.문제가 됐던 영업지점 두 곳 모두 닷새 동안 여성 모델들을 앞세워 할인 행사를 홍보했다.

"이게 성 상품화? 관례처럼 해 왔던 것"

그렇다면 여성 모델들을 통해 세일 행사를 홍보한 영업지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문제가 됐던 영업지점 두 곳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봤습니다.

답변은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지금껏 이러한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A 지점장은 "관례처럼 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홍보 방법을 택했던 것"이라며 "누군가가 지적해 줬다면 다른 방법을 고민은 해 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B 지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B 지점장은 "이런 홍보 방식에 문제가 있느냐"고 취재진에 반문하며 "모델들이 할인 행사를 한다는 안내 멘트도 전달하는데,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했습니다.

외부 업체가 제안하는 대로 행사를 진행한다는 답변도 돌아왔습니다. 오픈 행사나 대규모 할인 행사가 계획되면, '이벤트 회사'라 불리는 외부 업체가 전단지를 돌릴지, 대형 풍선을 설치할지 등 홍보 방법을 제안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홍보 방식을 선택할 건지, 최종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에 두 지점장은 모두 말을 흐렸습니다.

대기업 본사 "개별 지점의 독자적 결정"

대기업 본사의 책임은 없을까요? 해당 기업 본사에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직접 물어봤습니다.

본사는 이런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문제가 된 가전제품 판매점이 자회사 소속인 데다, 홍보 방식은 개별 지점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만큼 알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다만 본사 차원의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했습니다. 관계자는 "앞으로 영업점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홍보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겠다"며 "제품과 서비스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집중하는 행사가 되도록 지점들을 상대로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주도청 정문에 걸려 있는 ‘여성친화도시’ 현판. 제주도청 정문에 걸려 있는 ‘여성친화도시’ 현판.

제1호 여성친화도시 제주과제는?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된 제주도. 지난 2011년 최초로 지정된 데 이어 2016년 한 차례 다시 지정됐습니다.

이에 발맞춰 제주도는 2018년 8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성 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전담부서, '성평등정책관'을 행정부지사 직속으로 신설했습니다.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성 인지 감수성을 키우고, 이를 정책에 녹여 도민 사회에 성 평등한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가세해 제주도의회도 지난해 말, 성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주도지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의 양성평등 조례 개정안을 가결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민간에선 성 평등과 거리가 먼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양성평등 조례 개정안을 발의한 강성의 제주도의원은 "성평등정책관 조직이 생겼지만, 아직까진 걸음마 수준"이라며 "시민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니터링하고 제주도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돌과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해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린 제주도. 제주 여성들의 대표성만큼이나, 이들이 전보다 성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도록 도정과 민간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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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짧은 치마 입고 가전제품 홍보 아직도?…‘성 상품화’ 논란
    • 입력 2020-01-19 09:45:42
    취재K

제주시 노형동의 가전제품 매장 앞. 두 명의 여성이 춤을 추며 할인 행사 홍보하는 모습

"요즘도 이런 행사를 해?"

처음 이 소식을 접한 건 친한 지인을 통해서였습니다.

흰색 와이셔츠에 짧은 치마를 입은 두 여성이 길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진 한 장. 얼핏 보니 제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제주시 노형동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저녁, 근처를 지나던 기자가 걸음을 멈췄던 곳은 한 대기업의 가전제품 판매점 앞이었습니다. 사진 속 두 여성은 그날도 세일 행사 현수막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매장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며칠 뒤, 제주시 내 다른 매장에서도 춤추는 여성들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복장만 다를 뿐, 이번에도 두 여성이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춤을 추며 행사를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하고, 일상생활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감지할 수 있는 '성 인지(성 평등) 감수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시대. 왜 이런 홍보 방식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를 짚어 보기 전에, 기자는 이런 홍보 방식이 왜 문제인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여성 모델들을 활용해 홍보를 했던 제주시 내 한 가전제품 영업지점. 대규모 오픈 행사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상품 품질보다 여성으로 이목 끌어

전문가들은 이 같은 마케팅이 여성이라는 성을 상품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전제품 할인 행사라면 할인 품목은 무엇인지, 할인하는 제품의 기능과 내구성은 얼마나 우수한지, 할인율은 얼마나 큰지 등을 홍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신체 조건을 앞세워 여성들을 선발한 뒤, 이들의 신체를 최대한 부각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자체가 여성을 상품 판매의 도구로 이용하는 거라는 게 이들 설명입니다. 말 그대로,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겁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윤소 활동가는 "제품이나 회사명을 가렸을 때 어떤 제품을 광고하고 홍보하는지 모르겠다면, 그 광고는 성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라며 "광고의 내용과 무관하게 여성의 몸을 전시할 경우, 그건 성 상품화이자 대상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성 상품화가 요즘의 마케팅 추세와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여름도 아니고 어느 여성이 추운 날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일하고 싶겠냐"면서 "보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광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 원(F1)의 공식 웹사이트. 2018년 ‘그리드 걸’을 없애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사진 출처 : F1 공식 웹사이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리드 걸

실제로 이런 움직임은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지난 2018년 호주에서 막을 연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 원(F1)에선 '레이싱 걸'로 불리는 그리드 걸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이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상태에서 출전 선수 이름이 적힌 팻말 등을 들고 자세를 취하는 역할 등을 맡아 왔습니다.

당시 F1 협회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그리드 걸을 없애겠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협회는 "그리드 걸을 고용해 온 오랜 시간의 관습을 이제는 끝내겠다"며 "이러한 관습이 우리의 브랜드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데다, 현대 사회의 규범에도 맞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선 소주병에 여성 연예인 사진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지나친 음주 문화를 근절하려는 게 제1 목적이지만, 주류 광고에서 불거지는 성 상품화 논란 또한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입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 이미지를 상품 판매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며 "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2017년 신세계그룹이 (주)제주소주를 인수해 당시 출시한 제품. 제품명을 두고 성매매 시장을 연상시킨다는 논란이 일었다.
한편, 이와 비슷한 논란이 제주에서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 주류회사가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소주를 출시해, 성 상품화 논란의 중심에 선 겁니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2017년, 알코올도수 16.9도 소주 '짧은 밤'과 그 보다 도수가 높은 20.1도 소주 '긴 밤' 두 종을 출시했습니다. 여기에 제주가 고향인 한 여성 가수를 모델로 선정해, '너는 어떤 밤이 좋아'란 광고 문구를 내걸었습니다.

당시 제주 지역 여성단체들은 논평을 내고 제품명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송영심 제주여성인권연대 소장은 "저런 상품명이 재밌다 생각하고 넘기기보다, 상품명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를 면밀히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여성을 물건에 대입해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곧 성 상품화"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여성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

일각에선 이런 문제 제기가 도리어 다른 여성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합니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적여' 프레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논리를 앞세우며 이 모든 게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심에서 시작된다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차원에서 시작되는 논의"라며 "여성들이 지금보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늘려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여성들이 이런 노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제주여성인권연대 송영심 소장은 "짧은 옷을 입고 알바를 하는 여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판촉 행사를 기획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라며 현상을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가 됐던 영업지점 두 곳 모두 닷새 동안 여성 모델들을 앞세워 할인 행사를 홍보했다.
"이게 성 상품화? 관례처럼 해 왔던 것"

그렇다면 여성 모델들을 통해 세일 행사를 홍보한 영업지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문제가 됐던 영업지점 두 곳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봤습니다.

답변은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지금껏 이러한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A 지점장은 "관례처럼 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홍보 방법을 택했던 것"이라며 "누군가가 지적해 줬다면 다른 방법을 고민은 해 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B 지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B 지점장은 "이런 홍보 방식에 문제가 있느냐"고 취재진에 반문하며 "모델들이 할인 행사를 한다는 안내 멘트도 전달하는데,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했습니다.

외부 업체가 제안하는 대로 행사를 진행한다는 답변도 돌아왔습니다. 오픈 행사나 대규모 할인 행사가 계획되면, '이벤트 회사'라 불리는 외부 업체가 전단지를 돌릴지, 대형 풍선을 설치할지 등 홍보 방법을 제안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홍보 방식을 선택할 건지, 최종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에 두 지점장은 모두 말을 흐렸습니다.

대기업 본사 "개별 지점의 독자적 결정"

대기업 본사의 책임은 없을까요? 해당 기업 본사에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직접 물어봤습니다.

본사는 이런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문제가 된 가전제품 판매점이 자회사 소속인 데다, 홍보 방식은 개별 지점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만큼 알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다만 본사 차원의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했습니다. 관계자는 "앞으로 영업점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홍보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겠다"며 "제품과 서비스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집중하는 행사가 되도록 지점들을 상대로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주도청 정문에 걸려 있는 ‘여성친화도시’ 현판.
제1호 여성친화도시 제주과제는?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된 제주도. 지난 2011년 최초로 지정된 데 이어 2016년 한 차례 다시 지정됐습니다.

이에 발맞춰 제주도는 2018년 8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성 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전담부서, '성평등정책관'을 행정부지사 직속으로 신설했습니다.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성 인지 감수성을 키우고, 이를 정책에 녹여 도민 사회에 성 평등한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가세해 제주도의회도 지난해 말, 성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주도지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의 양성평등 조례 개정안을 가결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민간에선 성 평등과 거리가 먼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양성평등 조례 개정안을 발의한 강성의 제주도의원은 "성평등정책관 조직이 생겼지만, 아직까진 걸음마 수준"이라며 "시민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니터링하고 제주도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돌과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해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린 제주도. 제주 여성들의 대표성만큼이나, 이들이 전보다 성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도록 도정과 민간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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