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3:1’ 채용은 무죄?…‘들러리’서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입력 2020.01.2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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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신한은행 채용비리' 사건의 최고 책임자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에게 어제(22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간 신한은행 전·현직 임직원 자녀와 외부 청탁 지원자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며 서류와 면접전형에서 부정 합격시킨 혐의입니다.

재판부는 조 회장이 채용비리에 직접 가담했다고 보고 업무방해 혐의에 대해 '유죄' 판단을 내렸습니다. 함께 기소된 당시 부행장과 인사부장 등에 대해서도 모두 업무방해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무죄' 판단을 받은 혐의도 있습니다. 법원은 신한은행이 남녀 합격자 비율을 3:1로 인위적으로 조정해 차별했다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남자 3, 여자 1'…관행처럼 지켜진 채용 법칙

애초 검찰의 공소사실 요지는 이렇습니다. 2015년 상반기 채용 당시 은행장이었던 조용병 회장은 인사부장에게 원서 접수 남녀 비율 등을 보고받자 "예년 관행대로 남녀 합격자 비율을 3:1로 정하여 채용절차를 진행하되, 해외대 출신 및 이공계 출신도 좀 더 선발하라"는 취지로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 어쩌다 한번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도, 2016년 상·하반기에도 비율만 7:3과 3:1을 오갔을 뿐 합격자 성비를 인위적으로 맞춰 채용하라는 지시는 말 그대로 '관행'처럼 당연하게 이어졌습니다.

채용팀은 면접에서 합격자의 남녀 비율에 관한 통계표를 작성해 관리했고 수십 명의 면접 점수가 바뀌었으며, 결과적으로 조 회장이 지시한 비율은 고스란히 지켜졌습니다. 원래의 면접 점수대로 선발할 경우 남성 합격률이 목표보다 저조하자, 합격권에 있던 여성 지원자를 떨어뜨리고 불합격권에 있던 남성 지원자를 합격시켰다는 게 검찰의 판단입니다. 이를 위해 선발 기준도 새로 세우고, 면접 점수도 임의로 조작했다는 겁니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어제(22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며 법정구속을 피했다.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어제(22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며 법정구속을 피했다.

재판부 "여성에게만 일관되게 불리한 건 아냐"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에게만 일관되게 불리한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합격 여부가 성별에 따라 무 자르듯 나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사기업인 신한은행은 나름의 '채용 목표'를 달성하고자 합격자를 선발했습니다. 면접 등급이나 점수 같은 일괄적인 기준만 적용된 게 아니었습니다. 글로벌 역량을 갖춘 해외대 출신 지원자, 보훈·장애인 지원자, 전문 자격증을 가진 지원자 등은 정량적인 점수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합격시켰습니다. 여성이더라도 뛰어난 능력이나 선발에 고려할 만한 특이점을 갖춘 지원자는 '사정 절차'를 거쳐 불합격권에서 합격권으로 점수가 변경됐습니다.

재판부는 1차 면접에서 높은 등급을 받고도 점수가 변경돼 탈락한 여성 지원자들이 존재하고, 채용팀이 합격자 남녀 비율 통계표를 관리했으며, 결과적으로 합격자 성비가 3:1에 맞춰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채용 성차별 '기소의견 송치'는 1년에 1건뿐…"실효성 의문"

신한은행의 채용 성차별은 일차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남겼습니다. 청년 실업자 30만 명 시대, 여성들은 정말 평등한 고용 환경에 놓여있는 걸까요. 원서 접수 단계부터 남녀 채용 비율이 3:1로 결정돼 있고 매 채용 단계마다 비율이 조정됐어도,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의 채용 목표가 그렇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어제(22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동안 고용노동부가 남녀고용평등법에 규정된 '모집·채용 성차별'을 적발해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사건은 단 6건뿐입니다. 1년에 1건꼴인 셈인데, 고용 성차별과 관련해 연간 200건이 넘는 상담이 접수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남녀고용평등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현재와 같이 기업의 자율성에만 맡긴 채 제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차별을 생산하는 패턴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이는 장래에도 지속적인 차별을 생산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법의 취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한 번, 한 번의 기회가 소중한 청년들이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지 않는 사회,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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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녀 3:1’ 채용은 무죄?…‘들러리’서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 입력 2020-01-23 15:34:05
    취재K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신한은행 채용비리' 사건의 최고 책임자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에게 어제(22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간 신한은행 전·현직 임직원 자녀와 외부 청탁 지원자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며 서류와 면접전형에서 부정 합격시킨 혐의입니다.

재판부는 조 회장이 채용비리에 직접 가담했다고 보고 업무방해 혐의에 대해 '유죄' 판단을 내렸습니다. 함께 기소된 당시 부행장과 인사부장 등에 대해서도 모두 업무방해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무죄' 판단을 받은 혐의도 있습니다. 법원은 신한은행이 남녀 합격자 비율을 3:1로 인위적으로 조정해 차별했다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남자 3, 여자 1'…관행처럼 지켜진 채용 법칙

애초 검찰의 공소사실 요지는 이렇습니다. 2015년 상반기 채용 당시 은행장이었던 조용병 회장은 인사부장에게 원서 접수 남녀 비율 등을 보고받자 "예년 관행대로 남녀 합격자 비율을 3:1로 정하여 채용절차를 진행하되, 해외대 출신 및 이공계 출신도 좀 더 선발하라"는 취지로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 어쩌다 한번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도, 2016년 상·하반기에도 비율만 7:3과 3:1을 오갔을 뿐 합격자 성비를 인위적으로 맞춰 채용하라는 지시는 말 그대로 '관행'처럼 당연하게 이어졌습니다.

채용팀은 면접에서 합격자의 남녀 비율에 관한 통계표를 작성해 관리했고 수십 명의 면접 점수가 바뀌었으며, 결과적으로 조 회장이 지시한 비율은 고스란히 지켜졌습니다. 원래의 면접 점수대로 선발할 경우 남성 합격률이 목표보다 저조하자, 합격권에 있던 여성 지원자를 떨어뜨리고 불합격권에 있던 남성 지원자를 합격시켰다는 게 검찰의 판단입니다. 이를 위해 선발 기준도 새로 세우고, 면접 점수도 임의로 조작했다는 겁니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어제(22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며 법정구속을 피했다.
재판부 "여성에게만 일관되게 불리한 건 아냐"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에게만 일관되게 불리한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합격 여부가 성별에 따라 무 자르듯 나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사기업인 신한은행은 나름의 '채용 목표'를 달성하고자 합격자를 선발했습니다. 면접 등급이나 점수 같은 일괄적인 기준만 적용된 게 아니었습니다. 글로벌 역량을 갖춘 해외대 출신 지원자, 보훈·장애인 지원자, 전문 자격증을 가진 지원자 등은 정량적인 점수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합격시켰습니다. 여성이더라도 뛰어난 능력이나 선발에 고려할 만한 특이점을 갖춘 지원자는 '사정 절차'를 거쳐 불합격권에서 합격권으로 점수가 변경됐습니다.

재판부는 1차 면접에서 높은 등급을 받고도 점수가 변경돼 탈락한 여성 지원자들이 존재하고, 채용팀이 합격자 남녀 비율 통계표를 관리했으며, 결과적으로 합격자 성비가 3:1에 맞춰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채용 성차별 '기소의견 송치'는 1년에 1건뿐…"실효성 의문"

신한은행의 채용 성차별은 일차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남겼습니다. 청년 실업자 30만 명 시대, 여성들은 정말 평등한 고용 환경에 놓여있는 걸까요. 원서 접수 단계부터 남녀 채용 비율이 3:1로 결정돼 있고 매 채용 단계마다 비율이 조정됐어도,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의 채용 목표가 그렇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어제(22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동안 고용노동부가 남녀고용평등법에 규정된 '모집·채용 성차별'을 적발해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사건은 단 6건뿐입니다. 1년에 1건꼴인 셈인데, 고용 성차별과 관련해 연간 200건이 넘는 상담이 접수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남녀고용평등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현재와 같이 기업의 자율성에만 맡긴 채 제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차별을 생산하는 패턴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이는 장래에도 지속적인 차별을 생산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법의 취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한 번, 한 번의 기회가 소중한 청년들이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지 않는 사회,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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