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말살 예고’ 日 연하장…‘어울림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20.01.2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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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東京) 밑,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는 '어울림관'(ふれあい館)이라는 다문화 시설이 있습니다. 1년 중 유일하게 연말 12월 29일부터 새해 1월 3일까지 휴관합니다. 지난 4일 아침, 출근한 직원은 우편물 뭉치를 집어 들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연하장에는 "근하신년. 재일 조선·한국인을 이 세상에서 말살하자. 살아남았으면 잔혹하게 죽이자"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손으로 썼지만, 자를 대 선을 그은 것처럼 글자는 네모 반듯했습니다. 필체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발송인 정보도 없었습니다. 시설 측은 이틀 뒤, 협박 엽서를 받은 사실을 경찰에 알렸습니다. 후쿠다 노리히코(福田紀彦) 가와사키 시장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해 필요한 대응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일본 언론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3주, 엽서 한 통은 평온하던 시설의 일상을 어떻게 바꿔 놨을까요?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는 다문화 시설 ‘어울림관’. (화면출처 : 일본 NHK)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는 다문화 시설 ‘어울림관’. (화면출처 : 일본 NHK)

엽서는 시설 이용자의 불안감을 자극했습니다. 지난 4일부터 21일까지 이용자는 2,315명.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43명(26.6%)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현지 경찰은 시설 주변 순찰을 늘렸습니다. 시설 측에는 출입문 한 개는 닫아두고, 일부 방의 경우 환한 낮에도 커튼을 쳐 두도록 했습니다. 야간 근무 직원도 늘릴 걸 권했습니다.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에 혐의를 둔 경찰 조사도 곧 시작될 분위기입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설이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의 타깃이 됐을까요? 1988년에 문을 연 '어울림관'은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사는 사쿠라모토(桜本) 지역에 있습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재일동포들이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곳입니다. 한국 상점이 많아 '가와사키 코리아타운의 부엌'으로 불리고, 해마다 풍물놀이패가 지나간 뒤 일본인 이웃들과 한국 요리도 나눠 먹습니다.

지난해 12월 12일 ‘헤이트 스피치’를 처벌하는 조례안이 가결된 뒤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최강이자 씨. (KBS 뉴스 화면)지난해 12월 12일 ‘헤이트 스피치’를 처벌하는 조례안이 가결된 뒤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최강이자 씨. (KBS 뉴스 화면)

혐한 시위를 멈춘 마을, 사쿠라모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극우단체이자 혐한 시위로 악명 높은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한일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시설에는 "조선으로 돌아가라", "세금 도둑"이라는 괴롭힘 전화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합법적인' 시위 신고를 낸 우익들은 외려 경찰 보호를 받으며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이란 증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마을 주민에 더해 부끄러움을 느낀 일본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혐한 시위대 10명이 들이닥치면 100명이 모였고, 100명이 습격하면 1,000명이 집결해 "차별주의자는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저항은 극우 시위대를 막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울림관'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3세인 최강이자(46) 씨 등은 '헤이트 스피치'를 막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기나긴 싸움을 벌였습니다.

일본 가나가와 신문사가 사쿠라모토의 싸움을 취재해 출판한 ‘헤이트 시위를 멈춘 마을’ 책자 표지.일본 가나가와 신문사가 사쿠라모토의 싸움을 취재해 출판한 ‘헤이트 시위를 멈춘 마을’ 책자 표지.

억제 효과 기대했지만…

그리고 4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12일. 가와사키시 의회는 '헤이트 스피치'에 최대 벌금 50만 엔(약 550만 원)을 매기는 조례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일본에서 형사처벌 조례가 만들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오사카(大阪)나 고베(神戶) 등에도 비슷한 조례가 있긴 하지만, 벌칙 규정은 없습니다. 가나가와 신문은 이런 사쿠라모토의 싸움을 취재해 '헤이트 시위를 멈춘 마을'(부제 '차별은 사람을 죽인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가와사키시 조례는 오는 7월부터 전면 시행됩니다. 혐한 시위를 억제할 것이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던 조례 제정 이후 날아든 '몰살 예고' 연하장. 시설 측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취재에 응하기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차별을 부추기는 세력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혼돈을 야기하고, 서로 증오하게 해서 발생하는 상황은 그들에게 이익이 됩니다. '어울림관', 더 나아가 사쿠라모토의 싸움은 여전해 보였습니다.

세계 최대 청원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서명. ‘몰살 예고’ 연하장에 대한 일본 정부와 가와시키시의 긴급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세계 최대 청원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서명. ‘몰살 예고’ 연하장에 대한 일본 정부와 가와시키시의 긴급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어울림관'의 싸움

지난 22일, '인종차별 철폐 기본법을 요구하는 의원 연맹' 회장인 하쿠 신쿤(白真勲·입헌민주당) 참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 6명이 '어울림관'을 찾아 직원들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나라에서 외국인을 차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말도 안 된다"(하쿠 의원), "공격이 말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매우 심각한 사태"(아리타 요시오 의원)라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 청원사이트 '체인지닷아오르지'(Change.org)에서는 21일부터 일본 정부와 가와사키시에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는 인터넷 서명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재일 한국인을 어머니로 둔 모델 겸 배우 미즈하라 키코(水原希子)도 "악질적인 인종 차별, 재일 교포에 대한 증오에 마음이 아프다"며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23일 오후 6시 현재 서명에는 1만 5천 명 넘게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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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말살 예고’ 日 연하장…‘어울림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입력 2020-01-24 07:09:05
    특파원 리포트
일본 도쿄(東京) 밑,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는 '어울림관'(ふれあい館)이라는 다문화 시설이 있습니다. 1년 중 유일하게 연말 12월 29일부터 새해 1월 3일까지 휴관합니다. 지난 4일 아침, 출근한 직원은 우편물 뭉치를 집어 들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연하장에는 "근하신년. 재일 조선·한국인을 이 세상에서 말살하자. 살아남았으면 잔혹하게 죽이자"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손으로 썼지만, 자를 대 선을 그은 것처럼 글자는 네모 반듯했습니다. 필체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발송인 정보도 없었습니다. 시설 측은 이틀 뒤, 협박 엽서를 받은 사실을 경찰에 알렸습니다. 후쿠다 노리히코(福田紀彦) 가와사키 시장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해 필요한 대응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일본 언론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3주, 엽서 한 통은 평온하던 시설의 일상을 어떻게 바꿔 놨을까요?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는 다문화 시설 ‘어울림관’. (화면출처 : 일본 NHK)
엽서는 시설 이용자의 불안감을 자극했습니다. 지난 4일부터 21일까지 이용자는 2,315명.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843명(26.6%)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현지 경찰은 시설 주변 순찰을 늘렸습니다. 시설 측에는 출입문 한 개는 닫아두고, 일부 방의 경우 환한 낮에도 커튼을 쳐 두도록 했습니다. 야간 근무 직원도 늘릴 걸 권했습니다.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에 혐의를 둔 경찰 조사도 곧 시작될 분위기입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설이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의 타깃이 됐을까요? 1988년에 문을 연 '어울림관'은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사는 사쿠라모토(桜本) 지역에 있습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재일동포들이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곳입니다. 한국 상점이 많아 '가와사키 코리아타운의 부엌'으로 불리고, 해마다 풍물놀이패가 지나간 뒤 일본인 이웃들과 한국 요리도 나눠 먹습니다.

지난해 12월 12일 ‘헤이트 스피치’를 처벌하는 조례안이 가결된 뒤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최강이자 씨. (KBS 뉴스 화면)
혐한 시위를 멈춘 마을, 사쿠라모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극우단체이자 혐한 시위로 악명 높은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한일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시설에는 "조선으로 돌아가라", "세금 도둑"이라는 괴롭힘 전화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합법적인' 시위 신고를 낸 우익들은 외려 경찰 보호를 받으며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이란 증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마을 주민에 더해 부끄러움을 느낀 일본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혐한 시위대 10명이 들이닥치면 100명이 모였고, 100명이 습격하면 1,000명이 집결해 "차별주의자는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저항은 극우 시위대를 막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울림관'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3세인 최강이자(46) 씨 등은 '헤이트 스피치'를 막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기나긴 싸움을 벌였습니다.

일본 가나가와 신문사가 사쿠라모토의 싸움을 취재해 출판한 ‘헤이트 시위를 멈춘 마을’ 책자 표지.
억제 효과 기대했지만…

그리고 4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12일. 가와사키시 의회는 '헤이트 스피치'에 최대 벌금 50만 엔(약 550만 원)을 매기는 조례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일본에서 형사처벌 조례가 만들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오사카(大阪)나 고베(神戶) 등에도 비슷한 조례가 있긴 하지만, 벌칙 규정은 없습니다. 가나가와 신문은 이런 사쿠라모토의 싸움을 취재해 '헤이트 시위를 멈춘 마을'(부제 '차별은 사람을 죽인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가와사키시 조례는 오는 7월부터 전면 시행됩니다. 혐한 시위를 억제할 것이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던 조례 제정 이후 날아든 '몰살 예고' 연하장. 시설 측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취재에 응하기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차별을 부추기는 세력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혼돈을 야기하고, 서로 증오하게 해서 발생하는 상황은 그들에게 이익이 됩니다. '어울림관', 더 나아가 사쿠라모토의 싸움은 여전해 보였습니다.

세계 최대 청원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서명. ‘몰살 예고’ 연하장에 대한 일본 정부와 가와시키시의 긴급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어울림관'의 싸움

지난 22일, '인종차별 철폐 기본법을 요구하는 의원 연맹' 회장인 하쿠 신쿤(白真勲·입헌민주당) 참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 6명이 '어울림관'을 찾아 직원들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나라에서 외국인을 차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말도 안 된다"(하쿠 의원), "공격이 말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매우 심각한 사태"(아리타 요시오 의원)라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 청원사이트 '체인지닷아오르지'(Change.org)에서는 21일부터 일본 정부와 가와사키시에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는 인터넷 서명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재일 한국인을 어머니로 둔 모델 겸 배우 미즈하라 키코(水原希子)도 "악질적인 인종 차별, 재일 교포에 대한 증오에 마음이 아프다"며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23일 오후 6시 현재 서명에는 1만 5천 명 넘게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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