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아버님을 처음 뵀을 땐, 건강관리 잘하는 어르신으로만 알았습니다

입력 2020.02.02 (13:18) 수정 2020.02.0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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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을 처음 뵀을 땐, 건강관리 잘하는 어르신으로만 알았습니다

주말에 방송될 기획뉴스를 촬영하기 위해 서울 금천구에 사시는 백경택 아버님을 처음 보고 받은 인상입니다. 백 아버님은 1939년생으로 올해 연세가 82살입니다. 백 아버님은 체구는 작지만, 몸은 딴딴해 보였습니다. 촬영에 앞서 일상생활을 여쭤봤는데 아침 6시에는 항상 동네 헬스장에 나가신다고 했습니다. 그 헬스장에서 나이 많은 순서로 제일 앞에 있을 것 같다면서요. 아니나 다를까, 역기며 덤벨이며 여러 운동기구들이 거실에 놓여있었습니다. '아, 건강관리를 참 열심히 하는 어르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연관기사] 기억은 흐려져도…“‘눈이 부시게’ 살아가고 사랑합니다”(KBS 1TV '뉴스9' 2020.02.01)


"소영이 아빠, 우리 이혼해요"…치매 환자가 된 아내

아버님은 치매에 걸린 아내 김경순 어머님을 7년째 돌보고 있습니다. 두 분의 나이 차이는 8살로 아버님이 더 많습니다. 어머님이 치매 진단을 받은 건 지난 2013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님이 아버님에게 '소영(장녀 이름)이 아빠 우리 이혼해요' 했답니다. 놀란 아버님이 이유를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점심을 먹자며 생긋 웃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찾아간 병원에서 어머님은 경증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님이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아버님은 50년 넘게 해오던 페인트 도장일을 그만뒀습니다. 아내를 위해 시간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식들 키우느라, 먹고 살기 바빠 그동안 애정을 주지 못했던 죄책감도 한편에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금천구치매안심센터를 3년간 다니면서 치매 진행을 늦추는 여러 수업을 받았는데, 몇 시간씩 진행되는 수업임에도 아버님은 늘 바깥에서 어머님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치매센터에서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도 아버님은 어머님의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신문이며 성경이며 필사하는 걸 돕고 여러 놀이 활동, 산책, 운동 등 치매 예방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곁에서 돌보고 계셨습니다.


남편의 애틋한 돌봄…아내의 치매 진행 늦춰

금천구치매안심센터의 한 관계자는 어머님이 처음 센터에 왔을 때는 다소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고, 불안정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센터에서의 교육과 함께 아버님의 애틋한 돌봄이 몇 해동안 계속되며 상태가 나아졌고, 기자가 만났을 때도 마음 따뜻한 어르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센터 관계자는 치매가 악화하지 않고 진행을 늦출 수 있던 데는 아버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버님은 치매는 고약한 치매와 '예쁜 치매'가 있는데, 어머님은 예쁜 치매라고 소개했습니다. 어머님은 현재 했던 말을 몇 번씩 반복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잊는 등의 증상은 있지만, 겉보기에는 치매환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입니다.


"집사람보다 3일만 더 살고 저세상 갔으면…"

그럼에도 아버님은 혹시 모를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치매가 완치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인터뷰를 통해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힘든 게 물어본 말을 계속 물어볼 때, 나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어서 항상 좋은 말로만 나갈 수는 없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크게 반성해요, 이래선 안 된다고. 내가 보듬어주고 안심시켜주고, 내가 흔들리면 집사람도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62kg이고 집사람이 50kg 예요. 제가 60kg짜리 기구를 들려면 약간 무리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그걸 이를 악물고 들어요. 왜냐면 지금은 괜찮지만, 이 병이 계속 악화되서 아내가 와상이 되면, 제가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고, 수발해야 하는데 그때 아내를 들려면 내가 힘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체력관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일 소원은 우리 집사람보다 3일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끝까지 내가 수발을 하면서 그 뒤에 장사도 지내야 하고 그러니까. 그러고 나서 제가 저세상에 간다면.."


'치매안심국가'…국가는 아버님보다 더 준비됐나?

아버님이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셨던 이유,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며 눈 감는 날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겁니다.

2018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70만 명이 치매 환자입니다. 어르신 10명 중 1명꼴입니다. 보건복지부는 고령화가 빨라지며 2050년엔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치매 환자가 3백만 명 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완치는 어렵지만, 조기발견과 적극적인 치료로 치매의 진행속도는 얼마든지 늦출 수 있습니다.

정부도 '치매 국가책임제'를 통해 예방부터 치료까지 치매를 개별 가정 차원이 아닌 국가 돌봄 차원으로 해결하겠다는 목표로 관련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치매를 개인에게 맡기는 건 큰 희생을 강요하는 일인 만큼, 국가가 돌본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리고 떠오른 한 가지. 김경순 어머님이 이용했던 금천구치매안심센터의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천만 원 줄었다고 합니다. 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의 치매센터 예산이 줄었다고 전하며, 김 어머님도 오랫동안 센터를 이용해 이제 지원대상이 아닌데, 이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관련 시설과 전문 인력은 늘지 않았는데, 치매 환자가 늘어 수용력에 한계가 생긴 겁니다. 이 센터, 지난해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다녀갔고, 그 자리에 김 어머님과 백 아버님도 함께했습니다. 다른 치매센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치매안심국가', 국가는 정말 아버님보다 더 준비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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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아버님을 처음 뵀을 땐, 건강관리 잘하는 어르신으로만 알았습니다
    • 입력 2020-02-02 13:18:51
    • 수정2020-02-02 13:36:48
    취재후·사건후
아버님을 처음 뵀을 땐, 건강관리 잘하는 어르신으로만 알았습니다

주말에 방송될 기획뉴스를 촬영하기 위해 서울 금천구에 사시는 백경택 아버님을 처음 보고 받은 인상입니다. 백 아버님은 1939년생으로 올해 연세가 82살입니다. 백 아버님은 체구는 작지만, 몸은 딴딴해 보였습니다. 촬영에 앞서 일상생활을 여쭤봤는데 아침 6시에는 항상 동네 헬스장에 나가신다고 했습니다. 그 헬스장에서 나이 많은 순서로 제일 앞에 있을 것 같다면서요. 아니나 다를까, 역기며 덤벨이며 여러 운동기구들이 거실에 놓여있었습니다. '아, 건강관리를 참 열심히 하는 어르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연관기사] 기억은 흐려져도…“‘눈이 부시게’ 살아가고 사랑합니다”(KBS 1TV '뉴스9' 2020.02.01)


"소영이 아빠, 우리 이혼해요"…치매 환자가 된 아내

아버님은 치매에 걸린 아내 김경순 어머님을 7년째 돌보고 있습니다. 두 분의 나이 차이는 8살로 아버님이 더 많습니다. 어머님이 치매 진단을 받은 건 지난 2013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님이 아버님에게 '소영(장녀 이름)이 아빠 우리 이혼해요' 했답니다. 놀란 아버님이 이유를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점심을 먹자며 생긋 웃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찾아간 병원에서 어머님은 경증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님이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아버님은 50년 넘게 해오던 페인트 도장일을 그만뒀습니다. 아내를 위해 시간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식들 키우느라, 먹고 살기 바빠 그동안 애정을 주지 못했던 죄책감도 한편에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금천구치매안심센터를 3년간 다니면서 치매 진행을 늦추는 여러 수업을 받았는데, 몇 시간씩 진행되는 수업임에도 아버님은 늘 바깥에서 어머님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치매센터에서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도 아버님은 어머님의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신문이며 성경이며 필사하는 걸 돕고 여러 놀이 활동, 산책, 운동 등 치매 예방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곁에서 돌보고 계셨습니다.


남편의 애틋한 돌봄…아내의 치매 진행 늦춰

금천구치매안심센터의 한 관계자는 어머님이 처음 센터에 왔을 때는 다소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고, 불안정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센터에서의 교육과 함께 아버님의 애틋한 돌봄이 몇 해동안 계속되며 상태가 나아졌고, 기자가 만났을 때도 마음 따뜻한 어르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센터 관계자는 치매가 악화하지 않고 진행을 늦출 수 있던 데는 아버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버님은 치매는 고약한 치매와 '예쁜 치매'가 있는데, 어머님은 예쁜 치매라고 소개했습니다. 어머님은 현재 했던 말을 몇 번씩 반복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잊는 등의 증상은 있지만, 겉보기에는 치매환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입니다.


"집사람보다 3일만 더 살고 저세상 갔으면…"

그럼에도 아버님은 혹시 모를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치매가 완치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인터뷰를 통해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힘든 게 물어본 말을 계속 물어볼 때, 나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어서 항상 좋은 말로만 나갈 수는 없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크게 반성해요, 이래선 안 된다고. 내가 보듬어주고 안심시켜주고, 내가 흔들리면 집사람도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62kg이고 집사람이 50kg 예요. 제가 60kg짜리 기구를 들려면 약간 무리를 해야 하는데, 그래도 그걸 이를 악물고 들어요. 왜냐면 지금은 괜찮지만, 이 병이 계속 악화되서 아내가 와상이 되면, 제가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고, 수발해야 하는데 그때 아내를 들려면 내가 힘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체력관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일 소원은 우리 집사람보다 3일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끝까지 내가 수발을 하면서 그 뒤에 장사도 지내야 하고 그러니까. 그러고 나서 제가 저세상에 간다면.."


'치매안심국가'…국가는 아버님보다 더 준비됐나?

아버님이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셨던 이유,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며 눈 감는 날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겁니다.

2018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70만 명이 치매 환자입니다. 어르신 10명 중 1명꼴입니다. 보건복지부는 고령화가 빨라지며 2050년엔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치매 환자가 3백만 명 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완치는 어렵지만, 조기발견과 적극적인 치료로 치매의 진행속도는 얼마든지 늦출 수 있습니다.

정부도 '치매 국가책임제'를 통해 예방부터 치료까지 치매를 개별 가정 차원이 아닌 국가 돌봄 차원으로 해결하겠다는 목표로 관련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치매를 개인에게 맡기는 건 큰 희생을 강요하는 일인 만큼, 국가가 돌본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리고 떠오른 한 가지. 김경순 어머님이 이용했던 금천구치매안심센터의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천만 원 줄었다고 합니다. 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의 치매센터 예산이 줄었다고 전하며, 김 어머님도 오랫동안 센터를 이용해 이제 지원대상이 아닌데, 이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관련 시설과 전문 인력은 늘지 않았는데, 치매 환자가 늘어 수용력에 한계가 생긴 겁니다. 이 센터, 지난해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다녀갔고, 그 자리에 김 어머님과 백 아버님도 함께했습니다. 다른 치매센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치매안심국가', 국가는 정말 아버님보다 더 준비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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