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금고 속 43억 원짜리 무기명 예금증서…누나가 훔쳤다

입력 2020.02.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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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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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남] 금고 속 43억 원짜리 무기명 예금증서…누나가 훔쳤다
    • 입력 2020-02-08 15:43:39
    취재K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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