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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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남] 금고 속 43억 원짜리 무기명 예금증서…누나가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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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0-02-08 15:43:39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아시나요? 이건 '은행이 예금을 맡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인데요, 예금 만기에 이 증서를 은행에 가져가면 은행은 그 증서를 '가져온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줍니다. 이 증서엔 명의인의 이름이 없기 때문(무기명)입니다. 어찌보면 수표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A 씨가 '1년 뒤 1억 원'이라고 적힌 예금증서를 제게 줬고, 제가 1년 후 은행에 들고 가면 은행은 제게 1억 원을 주는 식입니다. 제3자에게 양도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 때문에 '양도성' 예금증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된 실물 예금증서를 부자들이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돈이 세탁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양도성 예금증서에 관련된 판례를 소개해드립니다.
■ 43억 상당 양도성 예금증서, 누나가 몰래 금고 열어 훔쳐가
A 씨는 2007년부터 모친 B 씨와 함께 살면서 B 씨의 재산관리를 담당해 왔습니다. B 씨의 재산 가운데엔 시중은행 잠실역지점에서 발행한 수십 장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43억 원 상당)가 있었는데요.
A 씨는 2009년 1월 튼튼한 금고를 샀고, 은행에 보관돼 있던 이 증서들을 금고에 옮겨 집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하던가요, 예금증서를 보고 욕심이 난 누나는 2009년 1월 그만 이 증서들을 훔쳤습니다.
이를 알게 된 A 씨는 2010년 누나를 상대로 예금증서를 돌려달라는 인도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4년 누나가 A 씨에게 훔쳐간 증서들을 돌려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누나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법에서 2015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집에 증서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집행관들이 오면 누나는 자리를 비우기도 헀고, 결국 A 씨는 누나에게서 예금증서들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A 씨는 어쩔 수 없이 예금증서를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소지를 상실했다며 공시최고절차를 거쳐 예금증서에 대해 '제권판결'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기존에 발행된 어음이나 수표, 양도성예금증서 등 유가증권의 효력이 없음을 선고하고, 이를 잃어버린 신청인이 증권 또는 증서에 따라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증권 또는 증서에 따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고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B 씨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누군가 갖고 있더라도 그 종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판결해달라는 겁니다.
■ '예금증서 효력 없다' 선고받자, 조카 손에서 나온 예금증서
2017년 6월 A 씨는 법원에서 제권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누군가 모친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갖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은행에 돈을 달라고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증서는 단순한 종이조각이 된 것이고, 제권판결을 신청해 선고받은 A 씨가 은행에 돈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해당 증서는 A 씨의 누나가 몰래 숨겨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A 씨의 누나는 제권판결이 선고되자 이에 대해 불복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만 A 씨의 누나는 소송을 내자마자 별세했고 이 증서를 물려받은 A 씨의 조카들이 소송을 이어 진행했습니다. A 씨의 조카들은 "증서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제권판결이 잘못된 절차를 거쳐 선고됐다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A 씨는 증서 현 소지자가 누나임을 알고 이를 전제로 인도청구소송을 낸 이상 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제권판결을 선고받은 만큼 이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권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카들은 이어 "공시최고를 신청할 수 있는 자는 증서 최종소지인으로, 최종소지인은 그 증권이나 증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증서 권리자는 모친이었으므로 A 씨는 최종소지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제권판결 문제 없어"…43억 원어치 증서 휴지조각으로
법원은 그러나 조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 씨는 공시최고신청을 하면서 A 씨 누나를 상대로 인도판결을 받았음에도 증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집행불능이 됐음을 이유로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시최고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증서에 대한 인도청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주거지에 증서가 없거나 아무도 없어 집행불능이 된 점 △이후로도 A 씨의 누나는 증서의 권리 귀속여부를 다투며 인도를 거부한 점 △A 씨의 조카들이 증서를 A 씨 누나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기 전까지 A 씨는 증서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A 씨가 증서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위로 공시최고신청을 해 제권판결을 받았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단 겁니다.
아울러 법원은 "무기명증권의 최종소지인은 결국 증서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증서상 권리의 실질적 귀속자가 아니라 상실 당시 그 증서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형식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며 "A 씨는 그 누나가 증서를 훔칠 당시 증서의 실질적 권리자인 모친과 공동으로 점유하거나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며 A 씨가 증서의 최종 소지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없다며 조카들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조카들은 지난해 12월 항소장을 제출했고,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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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성 기자 isbae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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