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은 느려, 우리가 나설게”…‘월급’ 받고 시위한 어버이연합

입력 2020.02.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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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행동하고 끝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해 줄게. 국정원은 뭐든지 다 느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국가정보원 방어팀원 박 모 씨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상부 지시를 받고 추 씨에게 시위를 부탁하러 간 박 씨는, 그 앞에서 쩔쩔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 씨가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윗선에서 질책을 당하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현금을 받고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시위'를 열었던 추 씨는 어제(14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4단독 홍준서 판사는 국정원법 위반과 집시법 위반,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추 씨에게 징역 1년 10개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습니다.

■ 어버이연합은 어떻게 국정원의 '발'이 됐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취임 직후인 2009년 2월부터 국정원 방어팀에 '정부나 국정원의 입장을 대변해 시위를 해 줄 수 있는 시민단체를 물색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나 정치단체를 '종북세력' 또는 '좌파'로 규정해, 이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직원들의 눈에 띈 게 '어버이연합'이었습니다. 정부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이른바 '보수단체'로서, 집회 시위 방법이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라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시위에 동원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이라, 시위 과정에서 폭력행위가 벌어져도 경찰 제재나 언론의 비난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결국 방어팀원 박 모 씨는 2009년 4월 추선희 씨를 찾아갔습니다. 확실한 자금지원을 약속하는 대신, 국정원 측이 요청하면 지속해서 시위를 열어달라 요청했습니다. 대상이나 방식, 시기나 장소도 모두 사전 협의해달라 했는데, 추 씨는 이를 거침없이 승낙했습니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섰다.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섰다.

■ 전단지 문구까지 정해준 원세훈…월급에 시위 성과급까지?

추선희 씨는 국정원으로부터 매달 최소 2백만 원에서 5백만 원 상당의 현금을 받고, 이슈마다 회원들을 동원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2009년 6월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의견을 표시한 이상돈 당시 중앙대 교수(현 바른미래당 의원)의 학교와 집 앞에서 규탄시위를 연 게 시작이었습니다.

시위를 거듭할수록 방식은 점차 과감해졌습니다. 2009년 9월엔 이른바 'DJ 부관참시 퍼포먼스'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며 고인의 국립현충원 안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0년 1월엔 MBC 'PD수첩'의 광우병 탐사보도 제작자가 무죄 판결을 받은 데 항의하기 위해,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 출근 차량에 달걀을 투척하고 판사들 얼굴 사진을 불태우는 이른바 '화형식 퍼포먼스'까지 동원했습니다.

배후에는 물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해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 발언을 한 송영길, 박지원 당시 야당 의원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각종 단체를 총동원해 온·오프라인 심리전 활동을 총력 전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추선희 씨는 여러 차례 두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관제시위를 개최했고 그 대가로 800만 원을 받아 챙겼습니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야권통합 운동을 하던 배우 문성근 씨에 대해서도 방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어버이연합과 협조해 문성근 씨의 종북 행적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전단지 문구까지 정해줬습니다. 원 전 원장이 직접 작성한 '죽창과 횃불로 민란을 선동하는 문성근을 즉시 구속하라'는 문구는 어버이연합의 시위에 몇 번이나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대가는 1,600만 원, 큰 금액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노무현 재단을 비방하는 시위, 박원순 서울시장을 규탄하는 시위 등 관제시위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계획 단계부터 결과보고까지, 국정원과 어버이연합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추 씨는 평소에도 국정원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집회마다 별도로 대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2009년 9월 국립현충원 정문 앞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진제공: 블로그 ‘미디어 몽구’2009년 9월 국립현충원 정문 앞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진제공: 블로그 ‘미디어 몽구’

■ 추선희 "노인복지기금인 줄 알았다"…재판부 "죄질 나빠"

추선희 씨는 그동안 국정원 지시에 따라 집회를 연 게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연 것이라며, 국정원의 정치 활동에 가담한 게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접촉했던 국정원 직원들이 국정원 소속인 줄 몰랐고, 받은 금품은 중소기업이 '노인복지기금'으로 지급한 돈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추 씨도 자신이 국정원의 지원을 받고 집회를 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판단한 겁니다. 추 씨가 동종 범행을 반복하고 있고, 죄질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재판부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추 씨에게 이런 관제시위를 지시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역시 지난 7일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당시 야권 정치인을 '제압'할 방안을 마련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민간영역의 인사들까지 무차별 사찰한 혐의 등이 모두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정치공작이 '반헌법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이 범행으로 국기기관의 위상이 실추되고 국가안전보장 기능도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겁니다. 불법적인 지시는 어버이연합 같은 민간단체에까지 차례로 전달됐고, 결론적으로 다수의 시민이 국가적 정치공작에 동원됐습니다. 반복돼서는 안 될, 국가기관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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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원은 느려, 우리가 나설게”…‘월급’ 받고 시위한 어버이연합
    • 입력 2020-02-15 13:11:21
    취재K
"선제행동하고 끝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해 줄게. 국정원은 뭐든지 다 느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국가정보원 방어팀원 박 모 씨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상부 지시를 받고 추 씨에게 시위를 부탁하러 간 박 씨는, 그 앞에서 쩔쩔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 씨가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윗선에서 질책을 당하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현금을 받고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시위'를 열었던 추 씨는 어제(14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4단독 홍준서 판사는 국정원법 위반과 집시법 위반,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추 씨에게 징역 1년 10개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습니다.

■ 어버이연합은 어떻게 국정원의 '발'이 됐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취임 직후인 2009년 2월부터 국정원 방어팀에 '정부나 국정원의 입장을 대변해 시위를 해 줄 수 있는 시민단체를 물색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나 정치단체를 '종북세력' 또는 '좌파'로 규정해, 이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직원들의 눈에 띈 게 '어버이연합'이었습니다. 정부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이른바 '보수단체'로서, 집회 시위 방법이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라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시위에 동원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이라, 시위 과정에서 폭력행위가 벌어져도 경찰 제재나 언론의 비난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결국 방어팀원 박 모 씨는 2009년 4월 추선희 씨를 찾아갔습니다. 확실한 자금지원을 약속하는 대신, 국정원 측이 요청하면 지속해서 시위를 열어달라 요청했습니다. 대상이나 방식, 시기나 장소도 모두 사전 협의해달라 했는데, 추 씨는 이를 거침없이 승낙했습니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섰다.
■ 전단지 문구까지 정해준 원세훈…월급에 시위 성과급까지?

추선희 씨는 국정원으로부터 매달 최소 2백만 원에서 5백만 원 상당의 현금을 받고, 이슈마다 회원들을 동원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2009년 6월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의견을 표시한 이상돈 당시 중앙대 교수(현 바른미래당 의원)의 학교와 집 앞에서 규탄시위를 연 게 시작이었습니다.

시위를 거듭할수록 방식은 점차 과감해졌습니다. 2009년 9월엔 이른바 'DJ 부관참시 퍼포먼스'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며 고인의 국립현충원 안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0년 1월엔 MBC 'PD수첩'의 광우병 탐사보도 제작자가 무죄 판결을 받은 데 항의하기 위해,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 출근 차량에 달걀을 투척하고 판사들 얼굴 사진을 불태우는 이른바 '화형식 퍼포먼스'까지 동원했습니다.

배후에는 물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해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 발언을 한 송영길, 박지원 당시 야당 의원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각종 단체를 총동원해 온·오프라인 심리전 활동을 총력 전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추선희 씨는 여러 차례 두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관제시위를 개최했고 그 대가로 800만 원을 받아 챙겼습니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야권통합 운동을 하던 배우 문성근 씨에 대해서도 방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어버이연합과 협조해 문성근 씨의 종북 행적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전단지 문구까지 정해줬습니다. 원 전 원장이 직접 작성한 '죽창과 횃불로 민란을 선동하는 문성근을 즉시 구속하라'는 문구는 어버이연합의 시위에 몇 번이나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대가는 1,600만 원, 큰 금액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노무현 재단을 비방하는 시위, 박원순 서울시장을 규탄하는 시위 등 관제시위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계획 단계부터 결과보고까지, 국정원과 어버이연합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추 씨는 평소에도 국정원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집회마다 별도로 대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2009년 9월 국립현충원 정문 앞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진제공: 블로그 ‘미디어 몽구’
■ 추선희 "노인복지기금인 줄 알았다"…재판부 "죄질 나빠"

추선희 씨는 그동안 국정원 지시에 따라 집회를 연 게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연 것이라며, 국정원의 정치 활동에 가담한 게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접촉했던 국정원 직원들이 국정원 소속인 줄 몰랐고, 받은 금품은 중소기업이 '노인복지기금'으로 지급한 돈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추 씨도 자신이 국정원의 지원을 받고 집회를 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판단한 겁니다. 추 씨가 동종 범행을 반복하고 있고, 죄질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재판부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추 씨에게 이런 관제시위를 지시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역시 지난 7일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당시 야권 정치인을 '제압'할 방안을 마련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민간영역의 인사들까지 무차별 사찰한 혐의 등이 모두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정치공작이 '반헌법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이 범행으로 국기기관의 위상이 실추되고 국가안전보장 기능도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겁니다. 불법적인 지시는 어버이연합 같은 민간단체에까지 차례로 전달됐고, 결론적으로 다수의 시민이 국가적 정치공작에 동원됐습니다. 반복돼서는 안 될, 국가기관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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