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59년 만의 ‘문전박대’…日은 왜 크루즈선을 버렸나?

입력 2020.02.16 (07:01) 수정 2020.02.1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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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도쿄 총리 관저.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관방부장관과 이마이 나오야(今井尚哉) 총리 비서관,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국가안전보장국장 등이 모였습니다. 회의 주제는 대형 크루즈선인 '웨스테르담'을 받아줄 거냐, 말거냐였습니다. 이틀 뒤 이 배는 일본 입항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회의 시작 전, "'웨스테르담'에 코로나19 감염 의심자가 타고 있다"는 정보가 일본 정부에 들어왔습니다. 대만과 필리핀이 입항을 금지할 거란 정보도 입수됐습니다. 이들이 4시간여 만에 내린 결론은 "홍콩발 선박, 웨스테르담에 승선한 외국인은 일본 땅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이례적인 조치"라고 평했습니다.

크르즈선 ‘웨스테르담’에 대한 입항 거부를 알리는 일본 언론 기사 <출처=NHK>크르즈선 ‘웨스테르담’에 대한 입항 거부를 알리는 일본 언론 기사 <출처=NHK>

日 언론, "입항 금지는 이례적"

어째서 이례적이라 했을까요? 입항 금지의 근거는 '일본 출입국관리법 5조 1항 14호'였습니다. "'일본의 이익이나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는 입국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법의 나머지 1호부터 13호까지는 ▲감염증 소견이 있는 자 ▲일본 법령을 위반해 1년 이상 징역, 금고 등의 형을 받은 자 등 입국 거부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14호는 정부 판단에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일본 역대 정부는 이 조항을 사실상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인권 침해' 논란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본 출입국재류관리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14호가 적용된 사례는 1961년 딱 1건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내각이 공산당 전국대회에 참가하려던 특정 외국인 입국을 거부한 일입니다. '14호 카드'를 꺼내 든 건 무려 59년 만입니다.

일본의 한 변호사는 KBS와의 통화에서 "출입국관리법이 입국 거부 대상자로 '감염증 소견이 있는 자'를 명시해 놓은 건 반대로 '의심'만으로는 입국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정치적 판단에 14호를 동원한 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웨스테르담'에는 일본인 5명이 타고 있었고, '평화의 제전' 도쿄올림픽은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교도통신>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교도통신>

입항 금지는 아베 총리 '작품'

결정은 아베 총리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인터넷판은 8일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총리는 코로나19를 둘러싸고 '미즈기와(水際·물가) 방역 대책'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전했습니다. '미즈기와 작전'은 해상으로 공격해오는 적이 육지에 발을 들이기 전에 섬멸해야 한다, 즉 '해상 원천 봉쇄'입니다.

사면이 바다로 막힌 섬나라, 일본은 이 방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즐겨 써 왔습니다. 자국민에 득 될 게 없는 건 공항·항구 등에서부터 물샐 틈 없이 막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 국민과 언론들도 대체로 정부 방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왔습니다. 그게 병원균이건, 마약이건, 유해 생물이건, 테러 집단이건 상관없이 말이죠. 이번엔 그 대상이 '크루즈선'이 됐을 뿐입니다.


'해상 원천 봉쇄' 미즈기와 작전

홍콩인 코로나19 감염자가 타고 있었던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배는 2주 항해를 마치고 지난 3일, 출발지였던 요코하마((橫浜) 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입항을 막았고, 오는 19일까지 해상 격리를 이어갈 태세입니다. 결정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역시 '미즈기와 작전', 즉 선제적 차단 대책의 일환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배가 도착하고 탑승객 3,711명에 대한 전수조사, 탑승객 관리, 하선 시점을 놓고 갑론을박만 계속했습니다. 항구 도착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15일 현재까지 감염자는 무려 285명 나왔습니다. 검사 대상자 930명 중 약 30%가 확진, 10명 중 3명꼴입니다. 이 비율을 전체 승선자에 단순 적용해도 확진자 1천 명이 넘습니다. 상상조차 끔찍합니다.

많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감염의 공포는 크루즈선을 벗어나 결국 열도에 상륙했습니다. 지난 1일 기항했던 일본 남동쪽 오키나와(沖繩)에서도 60대 여성 택시 기사가 코로나19에 감염됐습니다. 보다 못한 러시아와 이스라엘 등이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고, 미국은 자국민 360여 명을 구출하기 위해 전세기 2대를 급파했습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13일 시나우크빌항에 입항한 ‘웨스테르담’ 승무원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13일 시나우크빌항에 입항한 ‘웨스테르담’ 승무원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두 번째 '문전박대' 웨스테르담

일본 역사상 '출입국관리법 14호'의 두 번째 희생양이 됐던 '웨스테르담'. 일본을 포함해 모두 5개 나라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2,257명(승객 1,455명·승무원 802명)을 태운 채 2주 동안 바다 위 '떠돌이 신세'였던 이 배는 13일 극적으로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항에 입항했습니다. 코로나19 감염 여부 확인은 신속했고, 승객들은 하루 만에 하선했습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마스크 없이 선착장에 나왔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에게 꽃다발을 건넸고, 일부 승객과는 악수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습니다. 각국 언론은 이를 감동과 환희로 묘사했습니다. 훈센 총리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진짜 질병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위급한 시기엔 인도주의적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日은 '웨스테르담' 어떻게 볼까?

'웨스테르담' 승객과 승무원들은 지금도 해상 격리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을 '문전박대'해 준 일본 정부를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진 않을까요. 반대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승객 승무원들은, 특히 일본 정부는 '웨스테르담'과 캄보디아가 보여준 환희와 기쁨을 보며 뭘 느끼고 있을까요.

일본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후생노동상은 15일 저녁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서 67명이 추가 확진된 일을 공개하면서 "감염 경로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인정한다"라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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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6 07:01:56
    • 수정2020-02-16 07:49:50
    특파원 리포트
지난 6일 오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도쿄 총리 관저.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관방부장관과 이마이 나오야(今井尚哉) 총리 비서관,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국가안전보장국장 등이 모였습니다. 회의 주제는 대형 크루즈선인 '웨스테르담'을 받아줄 거냐, 말거냐였습니다. 이틀 뒤 이 배는 일본 입항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회의 시작 전, "'웨스테르담'에 코로나19 감염 의심자가 타고 있다"는 정보가 일본 정부에 들어왔습니다. 대만과 필리핀이 입항을 금지할 거란 정보도 입수됐습니다. 이들이 4시간여 만에 내린 결론은 "홍콩발 선박, 웨스테르담에 승선한 외국인은 일본 땅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이례적인 조치"라고 평했습니다.

크르즈선 ‘웨스테르담’에 대한 입항 거부를 알리는 일본 언론 기사 <출처=NHK>
日 언론, "입항 금지는 이례적"

어째서 이례적이라 했을까요? 입항 금지의 근거는 '일본 출입국관리법 5조 1항 14호'였습니다. "'일본의 이익이나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는 입국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법의 나머지 1호부터 13호까지는 ▲감염증 소견이 있는 자 ▲일본 법령을 위반해 1년 이상 징역, 금고 등의 형을 받은 자 등 입국 거부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14호는 정부 판단에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일본 역대 정부는 이 조항을 사실상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인권 침해' 논란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본 출입국재류관리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14호가 적용된 사례는 1961년 딱 1건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내각이 공산당 전국대회에 참가하려던 특정 외국인 입국을 거부한 일입니다. '14호 카드'를 꺼내 든 건 무려 59년 만입니다.

일본의 한 변호사는 KBS와의 통화에서 "출입국관리법이 입국 거부 대상자로 '감염증 소견이 있는 자'를 명시해 놓은 건 반대로 '의심'만으로는 입국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정치적 판단에 14호를 동원한 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웨스테르담'에는 일본인 5명이 타고 있었고, '평화의 제전' 도쿄올림픽은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교도통신>
입항 금지는 아베 총리 '작품'

결정은 아베 총리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인터넷판은 8일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총리는 코로나19를 둘러싸고 '미즈기와(水際·물가) 방역 대책'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전했습니다. '미즈기와 작전'은 해상으로 공격해오는 적이 육지에 발을 들이기 전에 섬멸해야 한다, 즉 '해상 원천 봉쇄'입니다.

사면이 바다로 막힌 섬나라, 일본은 이 방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즐겨 써 왔습니다. 자국민에 득 될 게 없는 건 공항·항구 등에서부터 물샐 틈 없이 막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 국민과 언론들도 대체로 정부 방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왔습니다. 그게 병원균이건, 마약이건, 유해 생물이건, 테러 집단이건 상관없이 말이죠. 이번엔 그 대상이 '크루즈선'이 됐을 뿐입니다.


'해상 원천 봉쇄' 미즈기와 작전

홍콩인 코로나19 감염자가 타고 있었던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배는 2주 항해를 마치고 지난 3일, 출발지였던 요코하마((橫浜) 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입항을 막았고, 오는 19일까지 해상 격리를 이어갈 태세입니다. 결정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역시 '미즈기와 작전', 즉 선제적 차단 대책의 일환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배가 도착하고 탑승객 3,711명에 대한 전수조사, 탑승객 관리, 하선 시점을 놓고 갑론을박만 계속했습니다. 항구 도착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15일 현재까지 감염자는 무려 285명 나왔습니다. 검사 대상자 930명 중 약 30%가 확진, 10명 중 3명꼴입니다. 이 비율을 전체 승선자에 단순 적용해도 확진자 1천 명이 넘습니다. 상상조차 끔찍합니다.

많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감염의 공포는 크루즈선을 벗어나 결국 열도에 상륙했습니다. 지난 1일 기항했던 일본 남동쪽 오키나와(沖繩)에서도 60대 여성 택시 기사가 코로나19에 감염됐습니다. 보다 못한 러시아와 이스라엘 등이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고, 미국은 자국민 360여 명을 구출하기 위해 전세기 2대를 급파했습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13일 시나우크빌항에 입항한 ‘웨스테르담’ 승무원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두 번째 '문전박대' 웨스테르담

일본 역사상 '출입국관리법 14호'의 두 번째 희생양이 됐던 '웨스테르담'. 일본을 포함해 모두 5개 나라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2,257명(승객 1,455명·승무원 802명)을 태운 채 2주 동안 바다 위 '떠돌이 신세'였던 이 배는 13일 극적으로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항에 입항했습니다. 코로나19 감염 여부 확인은 신속했고, 승객들은 하루 만에 하선했습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마스크 없이 선착장에 나왔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에게 꽃다발을 건넸고, 일부 승객과는 악수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습니다. 각국 언론은 이를 감동과 환희로 묘사했습니다. 훈센 총리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진짜 질병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위급한 시기엔 인도주의적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日은 '웨스테르담' 어떻게 볼까?

'웨스테르담' 승객과 승무원들은 지금도 해상 격리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을 '문전박대'해 준 일본 정부를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진 않을까요. 반대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승객 승무원들은, 특히 일본 정부는 '웨스테르담'과 캄보디아가 보여준 환희와 기쁨을 보며 뭘 느끼고 있을까요.

일본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후생노동상은 15일 저녁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서 67명이 추가 확진된 일을 공개하면서 "감염 경로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인정한다"라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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