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건 ‘무죄’ 판결문에 ‘우병우’ 이름 적힌 이유는?

입력 2020.02.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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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개입'은 위헌적 행동이라면서도,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법원.

그런데 이 사건 판결문에는 '무죄'라는 결론에 가려진,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중요한 판단들이 담겨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볼까요? 임성근 판사를 비롯해 '재판 개입'에 관여한 판사들은 그동안 재판에서 "선배로서 한 조언이었다",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준 것이다", "판결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려 했던 것이다"라고 변명해 왔습니다.

하지만 임성근 사건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주장을 전면 부정했습니다. 대법원장이든 법원장이든 간에 '사법지원'을 명목으로 참고자료를 전달하거나 조언을 하며 재판에 관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법관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재판에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사전에 그 오류를 시정하라고 요구할 수 없고, 오로지 상급심 재판을 통해서만 바로 잡을 수 있다고도 못박았습니다.

'사법농단 재판 개입'에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이, 사법농단에 맞서 '법관의 독립'을 수호하는 강력한 선언문으로도 읽히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검찰 수사와 기소 과정에서 보도됐던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법원행정처의 내통 의혹이, 재판을 거쳐 구체적으로 확인됐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특정 재판을 두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인 청와대와 법원행정처. 그 행적의 일부분을 기록해 둔 판결문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대통령이 피해자이고, 가토가 일본 언론인이라서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의 관심도 많은 사건이다. 국격을 드높일 수 있어야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 대통령이 모처에서 다른 남성을 만났다는 부분은 아주 치명적인 부분이고 국민들의 관심도 많은 사건이니, 이 부분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면 그 부분을 명확히 정리해주고 가는 것이 좋겠다." (임성근 1심 판결문 17쪽)

2014년 '세월호 7시간 의혹' 기사를 써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 재판장 이동근 판사는 재판 초반이던 2015년 2~3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을 맡았던 임성근 판사의 사무실에 불려가 '국격' 운운하는 당부를 들었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던 셈입니다.

같은 해 10월 19일, 가토 사건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최후변론을 듣고 재판 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판결문 작성에 본격 돌입하며 재판부가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 시기, 법원행정처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5년 11월 초, 임성근 판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통화 내용을 대화체로 재구성하면 이렇습니다.

- 임종헌: "가토 사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 임성근: "재판장이 법리 검토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당초 검찰 공소장에는 임성근 판사가 "무죄 선고가 불가피하고 재판장이 법리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으로 돼 있었습니다.)
- 임종헌: "재판장이 유무죄는 알아서 하겠지만, 판결 이유에서 '세월호 7시간' 기사 내용이 허위인 점은 분명히 밝혀줘야 합니다. 가토의 행위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 구체적인 사실 조사 없이 허위 기사를 작성한 게 문제라는 걸 (판결로)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 임성근: "네. 잘 알겠습니다."

"여성 대통령의 치명적인 부분"을 고려해, '세월호 7시간' 기사가 거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겁니다. 대통령을 특별 배려한 임 차장의 뜻이 임성근 판사를 거쳐 재판장과 주심 판사에게 전달되고, 결과적으로 판결문에까지 반영된 사실은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재판 개입' 사례입니다.

비슷한 시기 임 차장은 판사 출신의 곽병훈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가토 기사가 허위라는 점은 이미 밝혀졌기는 하지만, 언론의 자유의 측면에서 비방의 목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명예훼손 무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모욕한 기사를 쓴 일본 기자에 대해서 무죄 선고를 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나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가토에 대해 매우 엄중한 질책이 필요하다." (판결문 19쪽)

법원 행정처 간부가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민정수석의 눈치를 보면서,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에 청와대에 재판의 유력한 결론을 귀띔해준 것은 덤입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법원행정처 내부 보고서를 보면, 당시 상고법원 설립을 추진하던 행정처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처는 우 민정수석에 대해 "VIP(대통령)의 핵심 참모로서 주변에서 지근거리 보필"하는 인물이라면서, "검사 시절부터 형성된 사법부에 대한 견제 의식과 심정적 반감"으로 "상고법원안에 대한 (VIP의) 부정적 인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2015년 11월, 법원행정처 차장 명의로 작성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2015년 11월, 법원행정처 차장 명의로 작성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임 차장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곽 비서관은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가토가 무죄를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우 민정수석은 (곽 비서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언짢아하더니,) "대통령이 가토에 대해 처벌불원 의사(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법원행정처에 알아보라"고 지시합니다.

우 민정수석이 이런 지시를 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검찰이 재판 과정에서 제시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명예훼손은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1심 선고 전까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공소기각 판결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가토가 무죄가 날 가능성이 높다면 청와대 입장에선 실리도 명분도 챙길 게 없으니, 피해자인 박 대통령 측이 선제적으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해 차라리 유무죄 판단을 받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겠냐는 겁니다.

다시 판결문으로 돌아오자면. 곽 비서관은 행정처에 민정수석의 뜻을 전달했고, 임종헌 차장은 박상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에게 관련 검토 보고서 작성을 지시합니다. (가토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 표시를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청와대 대변인이 대리해서 할 수 있는지 등 의사 표시자의 문제, 의사 표시 방법과 시기를 검토한 1장 짜리 간략한 보고서로 알려졌습니다.)

다음날 이 검토 보고서는 청와대로 '납품'돼 우병우 민정수석까지 보고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사건의 당사자(피해자)가 재판에 낼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름 아닌 법원행정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문했다는 점입니다. 행정처가 청와대 전용 법률자문기구였냐는 비아냥을 낳는 대목입니다.


한 달여 뒤인 2015년 12월, 우병우 민정수석은 곽병훈 비서관을 불러 가토 재판과 관련된 또 다른 지시를 내립니다.

"(가토 사건에서) 한일 외교 관계를 위하여 외교부가 최대한 노력을 했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외교부 측의 간절한 부탁이다. 외교부 장관의 탄원서 제출 사실이 법정에서 고지될 수 있도록 법원행정처에 반드시 이야기해달라." (판결문 23쪽)

가토 사건은 '국격'을 높여야 하는 사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외교부가 일본에 '티'를 내야하니, 외교부의 탄원서를 법정이라는 무대에 꼭 등장시켜 달라는 청와대 실세(우병우)의 강한 요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탄원서 관련 소식은 곽 비서관에서 임 차장을 거쳐 임성근 형사수석부장판사, 재판부에까지 전달됩니다.

"외교부의 공문이 올 건데, (가토에 대한) 양형 자료니까 법정에서 가토 다쓰야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면 좋겠다"라는 형사수석부장판사의 말을 듣고, 가토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이동근 판사는 2015년 12월 17일 판결을 선고하면서 외교부의 탄원서 내용을 고지했습니다.

임성근 판사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탄원서' 사건을 두고 "재판의 절차 진행에 간섭하는 재판 관여 행위"이자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판결문은 법원행정처 차장과 청와대 민정수석 역시 이 위헌적 행위의 공범이자 지시자였음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최근 잇따른 '사법농단' 무죄 판결은 많은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무력감을 불러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론이 무죄라고 해서 재판의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법농단'이 그저 의혹이 아니라 상당 부분 실재한 일이었다는 점이 재판을 거쳐 확인되고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 무거운 과거가 쉽게 잊히지 않게 하려면, '사법농단' 판결들을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는 동시에 또 다른 '책임 묻기'의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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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농단 사건 ‘무죄’ 판결문에 ‘우병우’ 이름 적힌 이유는?
    • 입력 2020-02-17 07:00:26
    취재K
'재판 개입'은 위헌적 행동이라면서도,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법원.

그런데 이 사건 판결문에는 '무죄'라는 결론에 가려진,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중요한 판단들이 담겨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볼까요? 임성근 판사를 비롯해 '재판 개입'에 관여한 판사들은 그동안 재판에서 "선배로서 한 조언이었다",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준 것이다", "판결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려 했던 것이다"라고 변명해 왔습니다.

하지만 임성근 사건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주장을 전면 부정했습니다. 대법원장이든 법원장이든 간에 '사법지원'을 명목으로 참고자료를 전달하거나 조언을 하며 재판에 관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법관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재판에 어떤 오류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사전에 그 오류를 시정하라고 요구할 수 없고, 오로지 상급심 재판을 통해서만 바로 잡을 수 있다고도 못박았습니다.

'사법농단 재판 개입'에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이, 사법농단에 맞서 '법관의 독립'을 수호하는 강력한 선언문으로도 읽히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검찰 수사와 기소 과정에서 보도됐던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법원행정처의 내통 의혹이, 재판을 거쳐 구체적으로 확인됐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특정 재판을 두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인 청와대와 법원행정처. 그 행적의 일부분을 기록해 둔 판결문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대통령이 피해자이고, 가토가 일본 언론인이라서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의 관심도 많은 사건이다. 국격을 드높일 수 있어야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 대통령이 모처에서 다른 남성을 만났다는 부분은 아주 치명적인 부분이고 국민들의 관심도 많은 사건이니, 이 부분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면 그 부분을 명확히 정리해주고 가는 것이 좋겠다." (임성근 1심 판결문 17쪽)

2014년 '세월호 7시간 의혹' 기사를 써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 재판장 이동근 판사는 재판 초반이던 2015년 2~3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을 맡았던 임성근 판사의 사무실에 불려가 '국격' 운운하는 당부를 들었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던 셈입니다.

같은 해 10월 19일, 가토 사건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최후변론을 듣고 재판 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판결문 작성에 본격 돌입하며 재판부가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 시기, 법원행정처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5년 11월 초, 임성근 판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통화 내용을 대화체로 재구성하면 이렇습니다.

- 임종헌: "가토 사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 임성근: "재판장이 법리 검토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당초 검찰 공소장에는 임성근 판사가 "무죄 선고가 불가피하고 재판장이 법리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으로 돼 있었습니다.)
- 임종헌: "재판장이 유무죄는 알아서 하겠지만, 판결 이유에서 '세월호 7시간' 기사 내용이 허위인 점은 분명히 밝혀줘야 합니다. 가토의 행위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 구체적인 사실 조사 없이 허위 기사를 작성한 게 문제라는 걸 (판결로)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 임성근: "네. 잘 알겠습니다."

"여성 대통령의 치명적인 부분"을 고려해, '세월호 7시간' 기사가 거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겁니다. 대통령을 특별 배려한 임 차장의 뜻이 임성근 판사를 거쳐 재판장과 주심 판사에게 전달되고, 결과적으로 판결문에까지 반영된 사실은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재판 개입' 사례입니다.

비슷한 시기 임 차장은 판사 출신의 곽병훈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가토 기사가 허위라는 점은 이미 밝혀졌기는 하지만, 언론의 자유의 측면에서 비방의 목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명예훼손 무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모욕한 기사를 쓴 일본 기자에 대해서 무죄 선고를 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나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가토에 대해 매우 엄중한 질책이 필요하다." (판결문 19쪽)

법원 행정처 간부가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민정수석의 눈치를 보면서,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에 청와대에 재판의 유력한 결론을 귀띔해준 것은 덤입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법원행정처 내부 보고서를 보면, 당시 상고법원 설립을 추진하던 행정처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처는 우 민정수석에 대해 "VIP(대통령)의 핵심 참모로서 주변에서 지근거리 보필"하는 인물이라면서, "검사 시절부터 형성된 사법부에 대한 견제 의식과 심정적 반감"으로 "상고법원안에 대한 (VIP의) 부정적 인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2015년 11월, 법원행정처 차장 명의로 작성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임 차장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곽 비서관은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가토가 무죄를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우 민정수석은 (곽 비서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언짢아하더니,) "대통령이 가토에 대해 처벌불원 의사(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법원행정처에 알아보라"고 지시합니다.

우 민정수석이 이런 지시를 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검찰이 재판 과정에서 제시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명예훼손은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1심 선고 전까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공소기각 판결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가토가 무죄가 날 가능성이 높다면 청와대 입장에선 실리도 명분도 챙길 게 없으니, 피해자인 박 대통령 측이 선제적으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해 차라리 유무죄 판단을 받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겠냐는 겁니다.

다시 판결문으로 돌아오자면. 곽 비서관은 행정처에 민정수석의 뜻을 전달했고, 임종헌 차장은 박상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에게 관련 검토 보고서 작성을 지시합니다. (가토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 표시를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청와대 대변인이 대리해서 할 수 있는지 등 의사 표시자의 문제, 의사 표시 방법과 시기를 검토한 1장 짜리 간략한 보고서로 알려졌습니다.)

다음날 이 검토 보고서는 청와대로 '납품'돼 우병우 민정수석까지 보고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사건의 당사자(피해자)가 재판에 낼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름 아닌 법원행정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문했다는 점입니다. 행정처가 청와대 전용 법률자문기구였냐는 비아냥을 낳는 대목입니다.


한 달여 뒤인 2015년 12월, 우병우 민정수석은 곽병훈 비서관을 불러 가토 재판과 관련된 또 다른 지시를 내립니다.

"(가토 사건에서) 한일 외교 관계를 위하여 외교부가 최대한 노력을 했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외교부 측의 간절한 부탁이다. 외교부 장관의 탄원서 제출 사실이 법정에서 고지될 수 있도록 법원행정처에 반드시 이야기해달라." (판결문 23쪽)

가토 사건은 '국격'을 높여야 하는 사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외교부가 일본에 '티'를 내야하니, 외교부의 탄원서를 법정이라는 무대에 꼭 등장시켜 달라는 청와대 실세(우병우)의 강한 요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탄원서 관련 소식은 곽 비서관에서 임 차장을 거쳐 임성근 형사수석부장판사, 재판부에까지 전달됩니다.

"외교부의 공문이 올 건데, (가토에 대한) 양형 자료니까 법정에서 가토 다쓰야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면 좋겠다"라는 형사수석부장판사의 말을 듣고, 가토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이동근 판사는 2015년 12월 17일 판결을 선고하면서 외교부의 탄원서 내용을 고지했습니다.

임성근 판사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탄원서' 사건을 두고 "재판의 절차 진행에 간섭하는 재판 관여 행위"이자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판결문은 법원행정처 차장과 청와대 민정수석 역시 이 위헌적 행위의 공범이자 지시자였음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최근 잇따른 '사법농단' 무죄 판결은 많은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무력감을 불러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론이 무죄라고 해서 재판의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법농단'이 그저 의혹이 아니라 상당 부분 실재한 일이었다는 점이 재판을 거쳐 확인되고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 무거운 과거가 쉽게 잊히지 않게 하려면, '사법농단' 판결들을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는 동시에 또 다른 '책임 묻기'의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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