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관장에게 맞아 숨진 수련생 수첩엔?…“절대 00하면 안 돼!”

입력 2020.02.2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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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전통무예도장. 이 도장의 수련생이었던 32살 여성 A 씨는, '법문강의' 도중 휴대전화를 진동에서 무음 상태로 조정하기 위해 만지작거렸다는 이유로 관장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관장은 A 씨에게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린다", "복도로 나가 머리를 박으라"며 화를 내더니, 급기야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 관장은 70cm 길이의 목검으로 A 씨의 머리와 등, 종아리 등을 39차례 때렸습니다. A 씨는 고통스러워 하며 신음했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날 수련생 A 씨의 수첩엔 이런 내용이 담겼습니다.

"핸드폰 무음설정(법문 시작 시) 잔머리 굴리는 것. 그렇게 살면 안 됨. 몇 시에 끝날 줄 알고??!
▷ 나의 생각: 애초에 핸드폰 쓸 일이 없는데 괜히 애착으로 챙긴 것이 잘못" (2018.5.5.)

관장이 질책한 내용은 물론, 스스로 자책하며 반성하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A 씨가 관장에게 폭행을 당한 건 이 날 뿐만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A 씨는 자신을 탓했습니다. 관장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복종했던 A 씨는, 결국 같은 해 9월 16일 무예도장에서 목검으로 폭행을 당해 숨졌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특수폭행치사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관장 B 씨에게 지난 18일 징역 7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재판부는 "범행 당일 영상에 의하면 피해자에 대해 목검에 의한 폭행이 있었던 건 명백하다"며 "피해자가 작성한 수첩 등에 의하면 A 씨가 피해자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 수련생 '수첩'에 담긴 그 날의 전말…무예도장서 무슨 일이

숨진 수련생 A 씨는 평소 자신의 수첩에 무예도장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일들과 일상적인 소회 등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두었습니다. 이 수첩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관장 B 씨의 폭행 사실을 증명하는 주요 증거가 됐습니다. A 씨의 계좌 송금 내역과 카드 사용 내역, 무예도장 외장하드에 저장된 동영상 등도 A 씨 죽음의 전말을 밝히는 데 중요하게 활용됐습니다.

수첩 등을 토대로 보면, A 씨는 관장 B 씨를 '스승님'으로 부르며 절대적으로 따랐습니다. 매월 100만 원이 넘는 돈을 B 씨에게 '회비' 명목으로 입금하는가 하면, B 씨가 가르친 '법문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일과시간은 물론 주말까지 투자했습니다. A 씨가 영어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학생들 대상으로 과외교습을 하는 등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번역을 맡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A 씨 사망 당일의 폭행은 이 번역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 A 씨 직장 동료와 가족들도 문제의 번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A 씨가 관장에게 수시로 고성과 욕설이 섞인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 사망에 근접한 일자에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무예도장 법문을 철저하게, 그리고 시한 내에 번역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며 "피해자는 사망 당일 저녁까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독촉을 받고, 그 작업을 하다가 도장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관장 B 씨의 질책이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고 지적했습니다. B 씨는 수사 초기부터 재판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해왔지만, A 씨가 관장에게 목검으로 폭행을 당해 숨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입니다.

■ 재판부 "절대적 복종 요구…피해자 심신 상태 지극히 참혹"

재판부는 관장 B 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며 "피해자와의 관계 등에 비춰 그 죄질이 극히 무겁다"고 질타했습니다. 특히 관장이 해당 무예도장의 창시자로서 수련생인 A 씨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고, A 씨 수첩과 부검 결과 등을 볼 때 사망 직전 A 씨의 심신 상태가 "지극히 참혹했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매주 세 번씩 무예도장을 찾았던 A 씨는 '수련'과 '훈육'을 빙자한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됐습니다. 심한 매를 맞고도, 관장을 탓하기는커녕 반성만 거듭했습니다. 관장은 A 씨에게 '스승님을 그냥 따르라, 스승님이 시키시는 일은 제때에 꼭 해야 한다'는 취지로 교육했고, A 씨 수첩에선 "스승님이 시키시는 것 뭐든지 하겠다", "지난 세월 스승님과 한 약속은 빠르면 한 달, 길면 일 년 이내에 지켜라"라는 메모도 발견됐습니다.

재판부는 "A 씨 수첩에 기재된 것보다 B 씨의 폭행 횟수가 많고, 훈육의 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일상적이었으며, 피해자도 '자신이 잘못했으므로 맞은 것'이라는 심리상태에 있었다"고 봤습니다. 신체적 폭행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A 씨는 끝내 폭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끔찍한 범죄에 1심 법원은 엄벌을 내렸지만, 관장 B 씨는 지난 20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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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예관장에게 맞아 숨진 수련생 수첩엔?…“절대 00하면 안 돼!”
    • 입력 2020-02-22 07:06:44
    취재K
2018년 5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전통무예도장. 이 도장의 수련생이었던 32살 여성 A 씨는, '법문강의' 도중 휴대전화를 진동에서 무음 상태로 조정하기 위해 만지작거렸다는 이유로 관장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관장은 A 씨에게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린다", "복도로 나가 머리를 박으라"며 화를 내더니, 급기야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 관장은 70cm 길이의 목검으로 A 씨의 머리와 등, 종아리 등을 39차례 때렸습니다. A 씨는 고통스러워 하며 신음했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날 수련생 A 씨의 수첩엔 이런 내용이 담겼습니다.

"핸드폰 무음설정(법문 시작 시) 잔머리 굴리는 것. 그렇게 살면 안 됨. 몇 시에 끝날 줄 알고??!
▷ 나의 생각: 애초에 핸드폰 쓸 일이 없는데 괜히 애착으로 챙긴 것이 잘못" (2018.5.5.)

관장이 질책한 내용은 물론, 스스로 자책하며 반성하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A 씨가 관장에게 폭행을 당한 건 이 날 뿐만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A 씨는 자신을 탓했습니다. 관장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복종했던 A 씨는, 결국 같은 해 9월 16일 무예도장에서 목검으로 폭행을 당해 숨졌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특수폭행치사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관장 B 씨에게 지난 18일 징역 7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재판부는 "범행 당일 영상에 의하면 피해자에 대해 목검에 의한 폭행이 있었던 건 명백하다"며 "피해자가 작성한 수첩 등에 의하면 A 씨가 피해자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 수련생 '수첩'에 담긴 그 날의 전말…무예도장서 무슨 일이

숨진 수련생 A 씨는 평소 자신의 수첩에 무예도장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일들과 일상적인 소회 등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두었습니다. 이 수첩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관장 B 씨의 폭행 사실을 증명하는 주요 증거가 됐습니다. A 씨의 계좌 송금 내역과 카드 사용 내역, 무예도장 외장하드에 저장된 동영상 등도 A 씨 죽음의 전말을 밝히는 데 중요하게 활용됐습니다.

수첩 등을 토대로 보면, A 씨는 관장 B 씨를 '스승님'으로 부르며 절대적으로 따랐습니다. 매월 100만 원이 넘는 돈을 B 씨에게 '회비' 명목으로 입금하는가 하면, B 씨가 가르친 '법문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일과시간은 물론 주말까지 투자했습니다. A 씨가 영어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학생들 대상으로 과외교습을 하는 등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번역을 맡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A 씨 사망 당일의 폭행은 이 번역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 A 씨 직장 동료와 가족들도 문제의 번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A 씨가 관장에게 수시로 고성과 욕설이 섞인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 사망에 근접한 일자에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무예도장 법문을 철저하게, 그리고 시한 내에 번역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며 "피해자는 사망 당일 저녁까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독촉을 받고, 그 작업을 하다가 도장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관장 B 씨의 질책이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고 지적했습니다. B 씨는 수사 초기부터 재판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해왔지만, A 씨가 관장에게 목검으로 폭행을 당해 숨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입니다.

■ 재판부 "절대적 복종 요구…피해자 심신 상태 지극히 참혹"

재판부는 관장 B 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며 "피해자와의 관계 등에 비춰 그 죄질이 극히 무겁다"고 질타했습니다. 특히 관장이 해당 무예도장의 창시자로서 수련생인 A 씨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고, A 씨 수첩과 부검 결과 등을 볼 때 사망 직전 A 씨의 심신 상태가 "지극히 참혹했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매주 세 번씩 무예도장을 찾았던 A 씨는 '수련'과 '훈육'을 빙자한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됐습니다. 심한 매를 맞고도, 관장을 탓하기는커녕 반성만 거듭했습니다. 관장은 A 씨에게 '스승님을 그냥 따르라, 스승님이 시키시는 일은 제때에 꼭 해야 한다'는 취지로 교육했고, A 씨 수첩에선 "스승님이 시키시는 것 뭐든지 하겠다", "지난 세월 스승님과 한 약속은 빠르면 한 달, 길면 일 년 이내에 지켜라"라는 메모도 발견됐습니다.

재판부는 "A 씨 수첩에 기재된 것보다 B 씨의 폭행 횟수가 많고, 훈육의 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일상적이었으며, 피해자도 '자신이 잘못했으므로 맞은 것'이라는 심리상태에 있었다"고 봤습니다. 신체적 폭행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A 씨는 끝내 폭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끔찍한 범죄에 1심 법원은 엄벌을 내렸지만, 관장 B 씨는 지난 20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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