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아무 질문? 아는 질문!…아베의 ‘짜고 친’ 17분

입력 2020.03.0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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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적과의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정부 힘만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2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표정과 말투는 비장했습니다. 이틀 전 그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대책으로 전국 초·중·고교에 대한 임시 휴교를 전격 결정했습니다. "전문가 의견을 듣지 않은 독단적 결정", "맞벌이 부부와 교육 현장은 '멘붕'"이라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주말 저녁 회견을 다시 잡아야 할 만큼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 겁니다.

36분짜리 회견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회견문 읽는데 19분, '관저 기자클럽'(記者クラブ)의 질문 5개에 답하는데 17분이 쓰였습니다. '관저 기자클럽'은 우리로 치면 청와대 출입기자단입니다. 회견 전반부가 잘 짜인 각본을 토대로 한 '1인극'이라면, 후반부는 권력과 언론이 진검 들고 싸우는 '생쇼'에 가깝습니다. '연극'과 '생쇼' 가운데 어느 쪽이 흥미로운지는 다들 압니다. 드디어 첫 질문자, 아사히신문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기자 : 임시휴교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총리는 27일에 돌연 발표했지만, 정부의 자세한 설명이 없고, 학교·가정 등 사회 전반에 불안과 혼란을 불렀습니다.

총리 : 어머니들과 교육 관계자들에게 큰 부담을 줬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어린이 안전을 위해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제가 결정한 일, 총리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2일 인터넷에 공개한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2일 인터넷에 공개한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

탐사보도·팩트체크 전문 사이트인 '인팩트'(infact)의 타치와 요이치로(立岩陽一郎) 편집장은 이날 회견을 "총리와 기자가 벌인 일종의 '연극'"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문서 한 장을 올렸습니다.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회 질문(안)'이란 제목. 첫 질문의 '영광'을 누린 아사히신문 기자가 회견 전날에 '관저 기자클럽' 소속 언론사에 돌린 문서입니다. 그는 기자단의 간사, 일종의 대표입니다.

아사히신문 기자는 이 문서에 본인이 던질 질문 내용을 담았습니다. '임시 휴교' 외에도 ▲ 일본의 크루즈선 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 성사 여부 ▲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치를 수 있을지 등을 묻을 예정이라고 썼습니다. 그 밑에는 같은 계열 방송사인 TV아사히 기자의 질문 내용도 있었습니다.

왜 질문지를 돌렸을까요? 문서 밑에는 "의견 있으신 분은 28일 오전 9시까지 연락을 달라"고 돼 있습니다. 즉 간사는 회견 전날까지 뺄 질문, 더할 질문 등을 취합해 관저에 보냅니다. 이를 토대로 총리 답변서가 작성되고, 총리는 회견 때 이걸 그대로 읽습니다. 아베 총리의 답변은 대체로 사이키 고조(佐伯耕三·43) 총리비서관이 대신 쓰는 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017년 아베 총리의 '스피치 라이터'로 최연소 총리비서관이 된 인물입니다.

[관련 링크] 아베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영상을 보면 실제로 아사히신문 기자는 미리 돌렸던 질문지를 그대로 읊습니다. "마트에 가도 마스크나 화장지와 같은 생필품을 살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말을 조금 더 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총리가 미리 준비했을 답변을 흔들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이어진 NHK, 요미우리신문, AP통신 기자 질문에도 총리는 준비된 종이를 차분히 읽어나갔습니다. 역시 사전 질문지가 건네졌을 거로 보입니다.

각본대로이니 긴박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총리 답변이 명확하지 않아도 기자들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쏘지 않았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손을 들어주십시오", "예정된 시간을 많이 넘겨 추가 질문이 어렵겠습니다"는 관저 공보관의 말은 우습기까지 했습니다. 회견에 '생생함'을 불어넣으려는 것이겠지만, 질문과 답변 분량, 문답 종료 시간 등은 미리 조율됐을 텐데 말이죠.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0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요청하는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1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0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요청하는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사실 이런 회견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의 언론, 취재 환경을 그대로 이식해 온 탓이겠죠.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기자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SNS에 청와대 기자들의 질문지가 돈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뤄진 질의·응답과 내용도 대동소이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냉소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 회견은 '각본'을 없앴습니다. 초반(100일 취임기자회견)엔 사회자가 질문자를 지목하는 방식(각 분야별)에서 대통령이 직접 질문자를 지명하도록 형식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일단은 누가 어떤 내용으로 질문할지 몰라 대통령의 국정 운영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됐습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견은 지구 최강의 권력자와 견제자가 벌이는 '진검승부의 장'처럼 느껴집니다. 질문은 독하고, 답변은 과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를 못 참고 "너는 무례한 놈", "너를 고용한 언론사가 부끄럽다.", "가짜뉴스나 만드는 CNN"이라며 백악관 기자단과 입씨름하는 모습은 이제 흔하디흔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일본은 왜 이렇게 '훌륭한 연기' 회견을 고집할까요? 관저와 기자클럽 설명을 들어보면 사전에 질문 순서를 정한 덕분에 회견이 어수선하지 않게 차분히 진행됐을 수도 있다고 변명합니다. 또 기자들이 사전에 질문을 잘 조율해서 질문들이 겹치지 않게 잘 정리됐고, 질문 내용을 미리 알아서 총리가 더 충실한 답변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일본의 '기자클럽'은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관저 기자클럽' 소속이 아닌 KBS 일본지국은 총리 회견장에 사실상 갈 수 없습니다. '기자클럽' 모든 소속사의 동의를 일일이 얻어 설사 회견장에 가더라도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려면 기자단 허락을 또 받아야 합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비단 관저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 부처나 정부 산하기관, 광역자치단체도 대체로 비슷한 '진입 장벽'을 두고 있습니다.

타치와 편집장은 이런 식의 회견을 계속하려면 조건 하나를 붙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 기자회견을 기자회견이라 불러선 안 된다. 기자클럽 주최 '총리 연설회'로 이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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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아무 질문? 아는 질문!…아베의 ‘짜고 친’ 17분
    • 입력 2020-03-04 11:29:17
    특파원 리포트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적과의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정부 힘만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2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표정과 말투는 비장했습니다. 이틀 전 그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대책으로 전국 초·중·고교에 대한 임시 휴교를 전격 결정했습니다. "전문가 의견을 듣지 않은 독단적 결정", "맞벌이 부부와 교육 현장은 '멘붕'"이라는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주말 저녁 회견을 다시 잡아야 할 만큼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 겁니다.

36분짜리 회견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회견문 읽는데 19분, '관저 기자클럽'(記者クラブ)의 질문 5개에 답하는데 17분이 쓰였습니다. '관저 기자클럽'은 우리로 치면 청와대 출입기자단입니다. 회견 전반부가 잘 짜인 각본을 토대로 한 '1인극'이라면, 후반부는 권력과 언론이 진검 들고 싸우는 '생쇼'에 가깝습니다. '연극'과 '생쇼' 가운데 어느 쪽이 흥미로운지는 다들 압니다. 드디어 첫 질문자, 아사히신문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기자 : 임시휴교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총리는 27일에 돌연 발표했지만, 정부의 자세한 설명이 없고, 학교·가정 등 사회 전반에 불안과 혼란을 불렀습니다.

총리 : 어머니들과 교육 관계자들에게 큰 부담을 줬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어린이 안전을 위해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제가 결정한 일, 총리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타치와 요이치로 '인팩트' 편집장이 2일 인터넷에 공개한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단 질문(안
탐사보도·팩트체크 전문 사이트인 '인팩트'(infact)의 타치와 요이치로(立岩陽一郎) 편집장은 이날 회견을 "총리와 기자가 벌인 일종의 '연극'"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문서 한 장을 올렸습니다.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의 간사회 질문(안)'이란 제목. 첫 질문의 '영광'을 누린 아사히신문 기자가 회견 전날에 '관저 기자클럽' 소속 언론사에 돌린 문서입니다. 그는 기자단의 간사, 일종의 대표입니다.

아사히신문 기자는 이 문서에 본인이 던질 질문 내용을 담았습니다. '임시 휴교' 외에도 ▲ 일본의 크루즈선 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 성사 여부 ▲ 도쿄올림픽을 예정대로 치를 수 있을지 등을 묻을 예정이라고 썼습니다. 그 밑에는 같은 계열 방송사인 TV아사히 기자의 질문 내용도 있었습니다.

왜 질문지를 돌렸을까요? 문서 밑에는 "의견 있으신 분은 28일 오전 9시까지 연락을 달라"고 돼 있습니다. 즉 간사는 회견 전날까지 뺄 질문, 더할 질문 등을 취합해 관저에 보냅니다. 이를 토대로 총리 답변서가 작성되고, 총리는 회견 때 이걸 그대로 읽습니다. 아베 총리의 답변은 대체로 사이키 고조(佐伯耕三·43) 총리비서관이 대신 쓰는 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017년 아베 총리의 '스피치 라이터'로 최연소 총리비서관이 된 인물입니다.

[관련 링크] 아베 내각총리대신 기자회견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영상을 보면 실제로 아사히신문 기자는 미리 돌렸던 질문지를 그대로 읊습니다. "마트에 가도 마스크나 화장지와 같은 생필품을 살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말을 조금 더 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총리가 미리 준비했을 답변을 흔들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이어진 NHK, 요미우리신문, AP통신 기자 질문에도 총리는 준비된 종이를 차분히 읽어나갔습니다. 역시 사전 질문지가 건네졌을 거로 보입니다.

각본대로이니 긴박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총리 답변이 명확하지 않아도 기자들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쏘지 않았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손을 들어주십시오", "예정된 시간을 많이 넘겨 추가 질문이 어렵겠습니다"는 관저 공보관의 말은 우습기까지 했습니다. 회견에 '생생함'을 불어넣으려는 것이겠지만, 질문과 답변 분량, 문답 종료 시간 등은 미리 조율됐을 텐데 말이죠.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0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요청하는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사실 이런 회견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의 언론, 취재 환경을 그대로 이식해 온 탓이겠죠.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기자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SNS에 청와대 기자들의 질문지가 돈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뤄진 질의·응답과 내용도 대동소이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냉소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 회견은 '각본'을 없앴습니다. 초반(100일 취임기자회견)엔 사회자가 질문자를 지목하는 방식(각 분야별)에서 대통령이 직접 질문자를 지명하도록 형식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일단은 누가 어떤 내용으로 질문할지 몰라 대통령의 국정 운영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됐습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견은 지구 최강의 권력자와 견제자가 벌이는 '진검승부의 장'처럼 느껴집니다. 질문은 독하고, 답변은 과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를 못 참고 "너는 무례한 놈", "너를 고용한 언론사가 부끄럽다.", "가짜뉴스나 만드는 CNN"이라며 백악관 기자단과 입씨름하는 모습은 이제 흔하디흔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일본은 왜 이렇게 '훌륭한 연기' 회견을 고집할까요? 관저와 기자클럽 설명을 들어보면 사전에 질문 순서를 정한 덕분에 회견이 어수선하지 않게 차분히 진행됐을 수도 있다고 변명합니다. 또 기자들이 사전에 질문을 잘 조율해서 질문들이 겹치지 않게 잘 정리됐고, 질문 내용을 미리 알아서 총리가 더 충실한 답변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일본의 '기자클럽'은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관저 기자클럽' 소속이 아닌 KBS 일본지국은 총리 회견장에 사실상 갈 수 없습니다. '기자클럽' 모든 소속사의 동의를 일일이 얻어 설사 회견장에 가더라도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려면 기자단 허락을 또 받아야 합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비단 관저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 부처나 정부 산하기관, 광역자치단체도 대체로 비슷한 '진입 장벽'을 두고 있습니다.

타치와 편집장은 이런 식의 회견을 계속하려면 조건 하나를 붙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 기자회견을 기자회견이라 불러선 안 된다. 기자클럽 주최 '총리 연설회'로 이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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