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日 대지진·쓰나미 9주기…“그날 이후 웃어본 적 없다”

입력 2020.03.1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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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福島)현 도미오카(富岡) 마을에는 '요노모리'(夜ノ森·밤의 숲)라는 작은 기차역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승강장 양쪽에 심어진 철쭉 6천 주가 활짝 피는 명소입니다. 꽃이 만개하면 특급열차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승객들 눈을 즐겁게 해 줬다고 합니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이 있던 2011년 3월 11일 이전 이야기입니다. 원전 사고가 난 뒤 도쿄전력은 제염 작업을 위해 철쭉을 뿌리만 남기고 모두 벌채했습니다.

'요노모리역'이 동일본 대지진 9주기를 앞둔 어제(10일)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년 만입니다. 이 역을 포함해 인근 마을 1.1km에 대한 피난 지시가 해제된 덕분입니다. 일본 정부는 오는 26일 후쿠시마 'J-빌리지'에서 출발하는 도쿄올림픽 성화 봉송을 앞두고 후쿠시마 내륙을 관통하는 JR조반(常磐)선 전 노선의 운행 재개를 추진해 왔습니다. 철쭉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 봄, '아베의 부흥'은 이렇게 또 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리히터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본 동북 지역을 뒤흔들었습니다. '쓰나미'(지진해일)는 진격해 오는 거인처럼 후쿠시마와 이와테(岩手), 미야기(宮城)현 마을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쿠시마 제1 원전은 옛 소련의 체르노빌 이후 최악의 원전 사고를 냈습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1만 5,899명에 2,529명은 아직 실종 상태입니다. 3개 피해 지역에선 아직도 경찰의 시신 수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 공식 집계(4만 5천여 명)에 잡히지 않는 많은 이재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떠나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진 전, 도미오카 마을에서도 1만 5,380명이 살았습니다. 9년이 지난 3월 1일 현재 거주자는 1,212명입니다. 10분의 1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나마 이 숫자도 지난 1년간 335명이 귀환한 덕분입니다. 젊은 층은 더 심각합니다. 지난해 일본 부흥청이 29세 이하 주민(2,922세대)에게 '귀향 의견'을 물었더니 55%는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13.3%는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10명 중 7명이 이미 '출향'(出鄕)과 '탈향'(脫鄕)을 결심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부흥'을 외치는데 마을엔 사람도, 삶도, 미래마저도 없어 보입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날, 마을에 철분 냄새가 퍼졌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는 눈이 됐습니다. 눈은 검은색이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후쿠시마 취재 중 만난 안자이 도오루 씨. 그의 집은 원전에서 35km 떨어진 이이다테무라((飯舘村)에 있었습니다. '검은 눈'은 불길한 공포였고, 두려움은 현실이 됐습니다. 몸 곳곳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던 그에게 후쿠시마현은 지난해 3월 주택 보조금마저 끊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방사성 오염 지역으로 다시 내몰고 있다"며 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전 폭발 재앙 이전, 이이타테 마을에도 6천 3백여 명이 살았습니다. 지금 주민은 9백여 명 수준입니다. 대다수가 60세 이상 노인입니다.

"고향에는 거대한 방사능 포대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림은 (방사능) 제염이 안 됐어요. 비가 오면 산에서 물이 내려와서 아래는 오염이 높아집니다. 동사무소에서는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데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든요.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지 받아요." (안자이 씨)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이런 목소리는 일본 언론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9주기를 하루 앞둔 10일, 일본 언론들은 각종 여론조사를 앞다퉈 냈습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친(親)아베 성향의 산케이(産経)신문 조사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산케이신문이 후쿠시마, 이와테, 미야기 등 피해 지역 3개 현의 42개 시정촌(市町村·기초자치단체)장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약 90%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부흥 올림픽'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히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이 '의외'의 결과가 일본 정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의도'된 결과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후쿠시마의 부흥'을 약속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내년 9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자신의 업적을 포장하기 위해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지우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우려 확산에도 도쿄올림픽 개최를 고집합니다. 그는 지난 7일 후쿠시마 피해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민 복귀를 독려하기 위해 이주민들에게 이주지원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관광 산업을 키우겠다"고도 말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3월 11일 열린 ‘동일본 대지진 8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3월 11일 열린 ‘동일본 대지진 8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

벌써 9년, 올해도 어김없이 3월 11일이 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해마다 이날이면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총리와 유족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동일본 대지진 추도식'을 열어 왔습니다. 올해 9주기 추도식은 없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려는 조치라는 설명입니다. 대신에 오후 2시 46분에 총리관저에서 장관들과 별도로 헌화식을 치르고, 묵념할 예정입니다.

아베 총리는 더 나아가 내년을 마지막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추도식을 중단한다는 결정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10년은 어떤 의미로 보면 하나의 단락을 짓는 시점"(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란 설명을 내놨습니다. 일본 지지통신은 이를 두고 아베 총리가 내년 9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후쿠시마 지역에 '부흥'을 이뤘다는 '구분'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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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日 대지진·쓰나미 9주기…“그날 이후 웃어본 적 없다”
    • 입력 2020-03-11 07:05:59
    특파원 리포트
일본 후쿠시마(福島)현 도미오카(富岡) 마을에는 '요노모리'(夜ノ森·밤의 숲)라는 작은 기차역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승강장 양쪽에 심어진 철쭉 6천 주가 활짝 피는 명소입니다. 꽃이 만개하면 특급열차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승객들 눈을 즐겁게 해 줬다고 합니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이 있던 2011년 3월 11일 이전 이야기입니다. 원전 사고가 난 뒤 도쿄전력은 제염 작업을 위해 철쭉을 뿌리만 남기고 모두 벌채했습니다.

'요노모리역'이 동일본 대지진 9주기를 앞둔 어제(10일)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9년 만입니다. 이 역을 포함해 인근 마을 1.1km에 대한 피난 지시가 해제된 덕분입니다. 일본 정부는 오는 26일 후쿠시마 'J-빌리지'에서 출발하는 도쿄올림픽 성화 봉송을 앞두고 후쿠시마 내륙을 관통하는 JR조반(常磐)선 전 노선의 운행 재개를 추진해 왔습니다. 철쭉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 봄, '아베의 부흥'은 이렇게 또 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리히터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본 동북 지역을 뒤흔들었습니다. '쓰나미'(지진해일)는 진격해 오는 거인처럼 후쿠시마와 이와테(岩手), 미야기(宮城)현 마을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쿠시마 제1 원전은 옛 소련의 체르노빌 이후 최악의 원전 사고를 냈습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1만 5,899명에 2,529명은 아직 실종 상태입니다. 3개 피해 지역에선 아직도 경찰의 시신 수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 공식 집계(4만 5천여 명)에 잡히지 않는 많은 이재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떠나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진 전, 도미오카 마을에서도 1만 5,380명이 살았습니다. 9년이 지난 3월 1일 현재 거주자는 1,212명입니다. 10분의 1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나마 이 숫자도 지난 1년간 335명이 귀환한 덕분입니다. 젊은 층은 더 심각합니다. 지난해 일본 부흥청이 29세 이하 주민(2,922세대)에게 '귀향 의견'을 물었더니 55%는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13.3%는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10명 중 7명이 이미 '출향'(出鄕)과 '탈향'(脫鄕)을 결심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부흥'을 외치는데 마을엔 사람도, 삶도, 미래마저도 없어 보입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날, 마을에 철분 냄새가 퍼졌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는 눈이 됐습니다. 눈은 검은색이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후쿠시마 취재 중 만난 안자이 도오루 씨. 그의 집은 원전에서 35km 떨어진 이이다테무라((飯舘村)에 있었습니다. '검은 눈'은 불길한 공포였고, 두려움은 현실이 됐습니다. 몸 곳곳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던 그에게 후쿠시마현은 지난해 3월 주택 보조금마저 끊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방사성 오염 지역으로 다시 내몰고 있다"며 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전 폭발 재앙 이전, 이이타테 마을에도 6천 3백여 명이 살았습니다. 지금 주민은 9백여 명 수준입니다. 대다수가 60세 이상 노인입니다.

"고향에는 거대한 방사능 포대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림은 (방사능) 제염이 안 됐어요. 비가 오면 산에서 물이 내려와서 아래는 오염이 높아집니다. 동사무소에서는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데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든요.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지 받아요." (안자이 씨)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이런 목소리는 일본 언론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9주기를 하루 앞둔 10일, 일본 언론들은 각종 여론조사를 앞다퉈 냈습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친(親)아베 성향의 산케이(産経)신문 조사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산케이신문이 후쿠시마, 이와테, 미야기 등 피해 지역 3개 현의 42개 시정촌(市町村·기초자치단체)장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약 90%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부흥 올림픽'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히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이 '의외'의 결과가 일본 정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의도'된 결과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후쿠시마의 부흥'을 약속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내년 9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자신의 업적을 포장하기 위해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지우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우려 확산에도 도쿄올림픽 개최를 고집합니다. 그는 지난 7일 후쿠시마 피해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민 복귀를 독려하기 위해 이주민들에게 이주지원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관광 산업을 키우겠다"고도 말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3월 11일 열린 ‘동일본 대지진 8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
벌써 9년, 올해도 어김없이 3월 11일이 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해마다 이날이면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총리와 유족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동일본 대지진 추도식'을 열어 왔습니다. 올해 9주기 추도식은 없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려는 조치라는 설명입니다. 대신에 오후 2시 46분에 총리관저에서 장관들과 별도로 헌화식을 치르고, 묵념할 예정입니다.

아베 총리는 더 나아가 내년을 마지막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추도식을 중단한다는 결정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10년은 어떤 의미로 보면 하나의 단락을 짓는 시점"(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란 설명을 내놨습니다. 일본 지지통신은 이를 두고 아베 총리가 내년 9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후쿠시마 지역에 '부흥'을 이뤘다는 '구분'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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