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일본 ‘긴급 사태’ 성큼…정부 비판 무사할까?

입력 2020.03.13 (07:03) 수정 2020.03.13 (07:0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 12일 낮 12시, 일본 NHK 방송의 정오 뉴스가 시작됐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국 제한 발표, 일본 닛케이지수 폭락에 이은 세 번째 뉴스. 빨간색으로 '도쿠지'(独自) 자막이 내걸렸습니다. '도쿠지'는 우리 말로 하면 '단독 보도'입니다. 일본 정부 발표를 단순 전달하지 않고 언론사가 독자적으로 취재한 내용이란 뜻입니다. 공들인 '단독 취재물'을 오후 7시 메인뉴스가 아닌 정오뉴스 사이에 내보낸 건 이례적이었습니다.

하단 제목은 '감기라고 여겼다, 초기 증상만으로는 '감염 의심' 못 해', 2분 20초짜리 뉴스였습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晃)시에서 코로나19 감염이 확인돼 입원 치료 중인 20대 여성을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라이브 바' 종업원의 딸로, 60대 어머니는 그녀보다 이틀 빠른 지난 3일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80대 아버지 역시 확진자입니다. 어머니가 일하는 '라이브 바'에선 12일 현재 6명의 집단 감염이 확인된 상태입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인 20대 여성 환자와의 전화 인터뷰 화면(출처 : NHK 홈페이지)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인 20대 여성 환자와의 전화 인터뷰 화면(출처 : NHK 홈페이지)

"엄마가 목에 이상을 처음 느낀 건 지난달 26일이었어요. 동네 병원을 두 번 찾아 항생제 등을 처방받았는데 나아지지 않았죠. 엄마가 정부 보건소를 찾아 코로나19 검사 상담을 한 게 1일. 그 날 저도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가벼운 기침을 2, 3번 했어요. 열이 많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감기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엄마가 감염된 걸 알지 못했다면 저도 병원에는 가지 않았을 거예요."

한마디로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는 한 초기 증상만으로는 코로나19 감염을 의심할 수 없었을 거라는 설명입니다. 울먹이던 그녀는 확진 판정 후 병원에서 받고 있는 치료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격리된 병실 밖에 보통 감기에 쓰는 해열제를 두고 가요. 평소에 먹는 그 해열제요. (병원에서는)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치료하라. 이 방에서만 나가지 말라'는 식이에요."

중증으로 가지 않는 한 해열제 투여만 이뤄지는, '무기력한' 격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녀는 "감염 경위와 증상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정부도 대책 등에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육성 인터뷰가 눈에 띄는 건 일본 정부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려면 37.5도 이상 발열이나, 극도의 피로감 또는 호흡 이상 같은 폐렴 의심 증세가 나흘 이상 계속돼야 합니다. 또 그 나흘 사이에는 자가 격리를 하며 증세를 관찰해야 합니다.

무척 까다롭죠. 코로나19 검사 건수가 현저히 적고, 그래서 증상이 있어도 검사가 거절되는 이른바 '검사 난민'(檢査 難民)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감기 같은 가벼운 증상만으로도 코로나19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감염되고,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녀의 경험담은 일본 정부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미 마사히로 ‘의료 거버넌스 연구소’ 이사장(오른쪽) 등이 10일 오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참의원 예산위원회 중앙공청회에 출석했다(출처 : 교도=연합)가미 마사히로 ‘의료 거버넌스 연구소’ 이사장(오른쪽) 등이 10일 오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참의원 예산위원회 중앙공청회에 출석했다(출처 : 교도=연합)

오늘(13일) 일본에선 중요한 정치 일정이 있습니다. 2013년부터 시행 중인 '신종 인플루엔자 등 대책 특별조치법'에 코로나19를 추가하는 개정안의 국회(참의원) 처리가 시도될 예정입니다. 법이 통과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 전역에 외출·집회 자제와 휴교, 사람이 모이는 시설의 사용 제한 등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필요한 의약품이나 식품 등 물자를 판매하도록 강제할 수 있고, 임시 의료 시설을 정비하기 위해 토지나 건물을 소유자 동의 없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긴급 사태' 선언입니다.

군(軍)이 개입하지 않을 뿐, 어찌 보면 소극적 의미의 '계엄령'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긴급 사태'는 한 번 시행되면 2년 간(1년 연장 가능) 유지됩니다. 개정안은 개인의 기본권 일부만 예외조치로 하지 않습니다. '지정 공공기관'으로서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사 NHK도 영향권 아래 두게 됩니다. 정부는 NHK의 코로나19 관련 보도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할 경우 '필요한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의적 해석의 주체는 바로 아베 총리. 20대 여성 확진자의 인터뷰처럼 불편한 뉴스가 무사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일본 헌법 연구자와 변호사들이 지난 9일 특별조치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출처 : 주간 금요일)일본 헌법 연구자와 변호사들이 지난 9일 특별조치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출처 : 주간 금요일)

우자키 마사히로(右崎正博) 일본 돗쿄(獨協)대학 명예교수 등 헌법 연구자와 변호사 10여 명은 9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가뜩이나 전문가 의견에 귀를 막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 브레이크 없는 권력이 집중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NHK 등에 대해선 "정부 정책 비판이 봉쇄되는 등 언론 자유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코로나19 검사를 확대하면 자연히 감염자 수도 증가해 도쿄올림픽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안도 확산하는데 이를 차단하려는 목적 아니냐"고 강조했습니다. '긴급 사태' 선언을 막기 위한 '긴급 성명'이었습니다.

▶ ‘ 코로나19 확산 우려’ 최신 기사 보기
http://news.kbs.co.kr/news/list.do?icd=19588
▶ ‘코로나19 팩트체크’ 제대로 알아야 이긴다 바로가기
http://news.kbs.co.kr/issue/IssueView.do?icd=19589
▶ ‘ 코로나19 현황과 대응’ 최신 기사 보기
http://news.kbs.co.kr/news/list.do?icd=19588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리포트] 일본 ‘긴급 사태’ 성큼…정부 비판 무사할까?
    • 입력 2020-03-13 07:03:38
    • 수정2020-03-13 07:04:29
    특파원 리포트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 12일 낮 12시, 일본 NHK 방송의 정오 뉴스가 시작됐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국 제한 발표, 일본 닛케이지수 폭락에 이은 세 번째 뉴스. 빨간색으로 '도쿠지'(独自) 자막이 내걸렸습니다. '도쿠지'는 우리 말로 하면 '단독 보도'입니다. 일본 정부 발표를 단순 전달하지 않고 언론사가 독자적으로 취재한 내용이란 뜻입니다. 공들인 '단독 취재물'을 오후 7시 메인뉴스가 아닌 정오뉴스 사이에 내보낸 건 이례적이었습니다.

하단 제목은 '감기라고 여겼다, 초기 증상만으로는 '감염 의심' 못 해', 2분 20초짜리 뉴스였습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晃)시에서 코로나19 감염이 확인돼 입원 치료 중인 20대 여성을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라이브 바' 종업원의 딸로, 60대 어머니는 그녀보다 이틀 빠른 지난 3일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80대 아버지 역시 확진자입니다. 어머니가 일하는 '라이브 바'에선 12일 현재 6명의 집단 감염이 확인된 상태입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인 20대 여성 환자와의 전화 인터뷰 화면(출처 : NHK 홈페이지)
"엄마가 목에 이상을 처음 느낀 건 지난달 26일이었어요. 동네 병원을 두 번 찾아 항생제 등을 처방받았는데 나아지지 않았죠. 엄마가 정부 보건소를 찾아 코로나19 검사 상담을 한 게 1일. 그 날 저도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가벼운 기침을 2, 3번 했어요. 열이 많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감기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엄마가 감염된 걸 알지 못했다면 저도 병원에는 가지 않았을 거예요."

한마디로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는 한 초기 증상만으로는 코로나19 감염을 의심할 수 없었을 거라는 설명입니다. 울먹이던 그녀는 확진 판정 후 병원에서 받고 있는 치료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격리된 병실 밖에 보통 감기에 쓰는 해열제를 두고 가요. 평소에 먹는 그 해열제요. (병원에서는)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치료하라. 이 방에서만 나가지 말라'는 식이에요."

중증으로 가지 않는 한 해열제 투여만 이뤄지는, '무기력한' 격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녀는 "감염 경위와 증상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정부도 대책 등에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육성 인터뷰가 눈에 띄는 건 일본 정부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려면 37.5도 이상 발열이나, 극도의 피로감 또는 호흡 이상 같은 폐렴 의심 증세가 나흘 이상 계속돼야 합니다. 또 그 나흘 사이에는 자가 격리를 하며 증세를 관찰해야 합니다.

무척 까다롭죠. 코로나19 검사 건수가 현저히 적고, 그래서 증상이 있어도 검사가 거절되는 이른바 '검사 난민'(檢査 難民)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감기 같은 가벼운 증상만으로도 코로나19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감염되고,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녀의 경험담은 일본 정부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미 마사히로 ‘의료 거버넌스 연구소’ 이사장(오른쪽) 등이 10일 오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참의원 예산위원회 중앙공청회에 출석했다(출처 : 교도=연합)
오늘(13일) 일본에선 중요한 정치 일정이 있습니다. 2013년부터 시행 중인 '신종 인플루엔자 등 대책 특별조치법'에 코로나19를 추가하는 개정안의 국회(참의원) 처리가 시도될 예정입니다. 법이 통과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 전역에 외출·집회 자제와 휴교, 사람이 모이는 시설의 사용 제한 등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필요한 의약품이나 식품 등 물자를 판매하도록 강제할 수 있고, 임시 의료 시설을 정비하기 위해 토지나 건물을 소유자 동의 없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긴급 사태' 선언입니다.

군(軍)이 개입하지 않을 뿐, 어찌 보면 소극적 의미의 '계엄령'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긴급 사태'는 한 번 시행되면 2년 간(1년 연장 가능) 유지됩니다. 개정안은 개인의 기본권 일부만 예외조치로 하지 않습니다. '지정 공공기관'으로서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사 NHK도 영향권 아래 두게 됩니다. 정부는 NHK의 코로나19 관련 보도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할 경우 '필요한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의적 해석의 주체는 바로 아베 총리. 20대 여성 확진자의 인터뷰처럼 불편한 뉴스가 무사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일본 헌법 연구자와 변호사들이 지난 9일 특별조치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출처 : 주간 금요일)
우자키 마사히로(右崎正博) 일본 돗쿄(獨協)대학 명예교수 등 헌법 연구자와 변호사 10여 명은 9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가뜩이나 전문가 의견에 귀를 막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 브레이크 없는 권력이 집중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NHK 등에 대해선 "정부 정책 비판이 봉쇄되는 등 언론 자유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코로나19 검사를 확대하면 자연히 감염자 수도 증가해 도쿄올림픽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안도 확산하는데 이를 차단하려는 목적 아니냐"고 강조했습니다. '긴급 사태' 선언을 막기 위한 '긴급 성명'이었습니다.

▶ ‘ 코로나19 확산 우려’ 최신 기사 보기
http://news.kbs.co.kr/news/list.do?icd=19588
▶ ‘코로나19 팩트체크’ 제대로 알아야 이긴다 바로가기
http://news.kbs.co.kr/issue/IssueView.do?icd=19589
▶ ‘ 코로나19 현황과 대응’ 최신 기사 보기
http://news.kbs.co.kr/news/list.do?icd=19588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