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임금 달랬더니 “너네 나라로 돌아갈래?”

입력 2020.03.2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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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 체류 알고 고용했으면서"

태국 국적의 수지 씨는 2016년부터 1년여간 충남 천안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일했습니다. 취업비자가 없는 미등록 노동자, 즉 '불법체류' 상태였습니다. 본인의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웠지만, 사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수지 씨는 "손님이 저에게 불법체류자가 아니냐고 물을 때면, 사장님은 비자가 있다고 답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손님들이 출입국 사무소에 신고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수지 씨는 1년 만에 일을 그만뒀습니다. 한 달에 3번으로 약속했던 휴무일은 지켜지지 않았고 임금 지급은 계속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누락되는 금액도 많아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수지 씨는 밀린 임금 8백여만 원과 퇴직금 220만 원에 대해 천안노동지청에 진정을 냈습니다.

한숨 돌리나 했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노동청 조사를 받은 업주는 이 지역 일대에 남아 있는 수지 씨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수지 씨의 연락처를 내놓아라, 태국에 있는 수지 씨에게 진정을 취하하라고 전달하라고 말했습니다. 수지 씨의 지인들은 "우리를 경찰인지 출입국사무소인지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질렀다"며 "평소 교통사고 같은 큰일이 생겨도 119나 경찰을 부르지 못하고 도망가는 게 먼저인 상황"이라 떨고만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업주는 수지 씨가 불법 체류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다며, 취재진에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 일대의 불법 체류 외국인노동자를 모두 신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성추행 못 견디고 퇴사… "불법이니 준비하라"

20대 불법 체류 태국인 노동자 A 씨도 최근 1달 만에 일하던 슈퍼마켓을 그만뒀습니다. 사장의 성추행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습니다.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장은 "하면 왜 안 돼?"라며 다시 다가왔고, 밀린 임금을 달라고 말하자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내쫓았습니다.

이후 사장은 "불법이더라? 준비해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해고 통보만으로 막막했던 A 씨에게 불법 체류 신고를 암시하는 메시지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A 씨는 애초 불법 체류 신분인 걸 알고도 고용한 사장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 것에 분노하며, 본인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 최근 노동청에 임금 체불을 진정했습니다.

사장의 성추행에 시달리던 A 씨는 해고 이후 사장으로부터 이 같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사장의 성추행에 시달리던 A 씨는 해고 이후 사장으로부터 이 같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수지 씨나 A 씨의 경우 해당 사건을 노동청에 진정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서입니다. 출입국관리법은 공무원이 직무 수행 중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을 발견하면 그 사실을 지체 없이 출입국사무소에 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만 범죄피해나 인권침해 상황에 처해 피해구제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는데,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고 해서, 업주의 불법이 불법이 아닌 것은 아냐"

이 때문에 업주가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일에는 한 외국인 노동자가 임금체불과 관련해 노동지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이 출동해 체포하려고 시도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함께 있었던 장혜진 노무사는 "사용자가 조사를 받으러 나오면서 진정인을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신고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수년간 꾸준히 늘어 이제 4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단속도 중요하지만, 해당 외국인이 불법 체류 상태인 것을 알고 고용한 뒤 이를 악용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신분이 불법 체류자라고 해서, 사용자의 불법이 불법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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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린 임금 달랬더니 “너네 나라로 돌아갈래?”
    • 입력 2020-03-23 12:10:39
    취재K
■ "불법 체류 알고 고용했으면서"

태국 국적의 수지 씨는 2016년부터 1년여간 충남 천안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일했습니다. 취업비자가 없는 미등록 노동자, 즉 '불법체류' 상태였습니다. 본인의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웠지만, 사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수지 씨는 "손님이 저에게 불법체류자가 아니냐고 물을 때면, 사장님은 비자가 있다고 답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손님들이 출입국 사무소에 신고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수지 씨는 1년 만에 일을 그만뒀습니다. 한 달에 3번으로 약속했던 휴무일은 지켜지지 않았고 임금 지급은 계속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누락되는 금액도 많아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수지 씨는 밀린 임금 8백여만 원과 퇴직금 220만 원에 대해 천안노동지청에 진정을 냈습니다.

한숨 돌리나 했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노동청 조사를 받은 업주는 이 지역 일대에 남아 있는 수지 씨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수지 씨의 연락처를 내놓아라, 태국에 있는 수지 씨에게 진정을 취하하라고 전달하라고 말했습니다. 수지 씨의 지인들은 "우리를 경찰인지 출입국사무소인지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질렀다"며 "평소 교통사고 같은 큰일이 생겨도 119나 경찰을 부르지 못하고 도망가는 게 먼저인 상황"이라 떨고만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업주는 수지 씨가 불법 체류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다며, 취재진에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 일대의 불법 체류 외국인노동자를 모두 신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성추행 못 견디고 퇴사… "불법이니 준비하라"

20대 불법 체류 태국인 노동자 A 씨도 최근 1달 만에 일하던 슈퍼마켓을 그만뒀습니다. 사장의 성추행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습니다.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장은 "하면 왜 안 돼?"라며 다시 다가왔고, 밀린 임금을 달라고 말하자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내쫓았습니다.

이후 사장은 "불법이더라? 준비해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해고 통보만으로 막막했던 A 씨에게 불법 체류 신고를 암시하는 메시지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A 씨는 애초 불법 체류 신분인 걸 알고도 고용한 사장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 것에 분노하며, 본인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 최근 노동청에 임금 체불을 진정했습니다.

사장의 성추행에 시달리던 A 씨는 해고 이후 사장으로부터 이 같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수지 씨나 A 씨의 경우 해당 사건을 노동청에 진정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서입니다. 출입국관리법은 공무원이 직무 수행 중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을 발견하면 그 사실을 지체 없이 출입국사무소에 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만 범죄피해나 인권침해 상황에 처해 피해구제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는데,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고 해서, 업주의 불법이 불법이 아닌 것은 아냐"

이 때문에 업주가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일에는 한 외국인 노동자가 임금체불과 관련해 노동지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이 출동해 체포하려고 시도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함께 있었던 장혜진 노무사는 "사용자가 조사를 받으러 나오면서 진정인을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신고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수년간 꾸준히 늘어 이제 4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단속도 중요하지만, 해당 외국인이 불법 체류 상태인 것을 알고 고용한 뒤 이를 악용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신분이 불법 체류자라고 해서, 사용자의 불법이 불법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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