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년…묻혀 있던 그 날의 기억

입력 2020.03.28 (07:49) 수정 2020.03.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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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현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주리입니다.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죠?

네, 남북의 창이 오늘로써 정확하게 800번째 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햇수로는 31년째 시청자 여러분들을 찾아뵙고 있는 건데요.

통일논단, 북한리포트 등 다른 이름으로 방송된 것까지 합하면 시작된 지 44년이 흘렀는데요.

남북한과 한반도를 다루는 국내 최고 프로그램인 남북의 창 8백 회 특집. 지금 시작합니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인데요.

진상규명이 이뤄진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해도 많습니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달래고 전쟁의 진정한 종지부를 찍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이야기, 정은지 리포터가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지난해 11월, 전주 도심의 한 산 자락에서 70년 동안 묻혀 있던 유골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두개골과 치아, 다리와 팔뼈 등 발견된 유해는 30여 개체. 참혹했던 그 날의 광경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옥창민/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벨트를 하셨던 분도 있고 단추를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 정도로 미결수, 그러니까 형이 확정되지 않은 분들까지도 무작위로 이 분들을 모셔다 놓고 잔혹하게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았나 판단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현수/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모든 학살 현장에서 거의 나타나는 현상인데, 대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확인사살을 하고..."]

70년 전 그날, 이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약 1800여 명이 수용돼 있었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 좌익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형을 받은 정치범들이 적지 않았던 상황.

북한군이 전라도까지 밀고 내려오자, 북측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만으로 천 4백여명이 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종희/전무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전부 다 이렇게 포승줄로 묶어서 트럭에다 싣고 와서 낮이고 밤이고 주야가 없이 여기서 학살을 했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아주 여기 올 때마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통곡을 하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이번에는 북한군이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긴급히 퇴각하게 된 북한군이 전주형무소의 재소자 등 천여 명을 즉결 처분한 겁니다.

[성홍제/전주형무소 희생자 유족회장 : "두개골에 실탄이 들어가 있을 때 그 고통과...당사자는 얼마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겠어요. 그걸 볼 때 자식 된 도리로..."]

극단적인 이념 대립이 죽음으로 내몬 민간인 희생자들...

가해자도, 피해자도 침묵하는 동안 끔찍했던 전쟁의 참상은 깊은 땅 속에 봉인됐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추정지는 전국에 약 160여 곳.

그 중에서도 발굴이 이뤄진 건 극히 일부분입니다.

전국 곳곳 이름 모를 산 밑 차가운 땅에는 아직도 학살 된 민간인들이 묻혀 있는데요.

이들은 언제쯤 억울함을 벗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 날을 이야기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숱한 고생을 겪었다고 합니다.

[양덕호/ 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그 때 당시 (전주형무소 유가족이라고) 말을 하면 사람으로 인정을 안 했잖아요. 인정을 안 해주기 때문에 그 때 말을 못했지."]

빨치산에 숙식을 제공한 죄로 3년 형을 선고받았던 아버지.

11살... 철부지 마음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외면했던 게 가슴 속 한으로 남았습니다.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학교를 갔다가 오면 그 형무소 옆으로 (수감자들) 한 열 댓 명씩 나와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제가 가면 아들이니까 아빠 손을 흔들고... 그분들한테 이제 우리 아들이라고 그랬을 거 아니야. 이제 그런 얘기를 하는 걸 어디에서 보고 고개를 숙이고 가고 그랬습니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사상과 이념보다는 당장의 삶을 살아내기에 바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유해라도 찾고 싶어 국가기록원으로, 전주 야산으로 안 다녀본 데 없이 다니길 몇 년... 아버지는 아직 아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양덕호/ 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면회 갈 때 옷을 싸가지고 갔는데 그 옷을 갖다 무덤에 (안치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의 넋이라도.. 뼛가루라도 섞여 있을까 싶어 발굴 현장에서 모셔온 한 줌 흙...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아버지 흙을 퍼왔습니다."]

억울하고 참담한 그 세월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아버님 억울하게...모든 걸 잊어주시고 편안하게 계십시오..."]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는 피란민 수백 명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숨졌는데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어떤 기억은 삶을 지배하고 오늘의 나를 만듭니다.

70년 전 일어난 노근리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인 양해숙 씨.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비행기) 한 대가 먼저 들어와 가지고 싹 돌아서 이렇게 나오더니 철길에다가 막 쏟아놓는가 봐 뭐를... 빠방빠방 하고 막 굉장해."]

1950년 7월 충북 영동 지역. 철로를 따라 피난을 가던 사람들 위로 총탄이 날아들었습니다.

철로는 완전히 파괴됐고 그 위로 시신이 즐비했습니다.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눈(안구)이 이만치 (빠져서) 달려가지고 있어. 떨어지지도 않고. 이 얼굴 전체가 다 막 벗겨져 가지고 피는 철철 나고..."]

그날의 폭격으로 한쪽 눈을 잃은 양해숙 씨는 평생 전쟁의 상처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얼굴이니까 외부에 다 노출이 되잖아. 내 얼굴이니까. 이렇게 바라보면 그때마다 내가 숨으려고 하는 마음. 아는 사람 있으면 저쪽으로 돌아서 피하는 마음. 그게 그 마음이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르지..."]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철로 아래 쌍굴다리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렇게 3박 4일 동안 굴다리 안에선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양해찬/노근리 사건 유족회장 : "(아기가) 젖을 먹으려고. 우니까 인기척이 나니까 막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애기 때문에 우리까지 다 죽게 됐다. (아버지가) 그쪽에 물 많은 데 갖다가 산 애기를 집어던져서 죽은 현장이에요."]

총 쏘는 애니메이션 굴속은 지옥이었습니다.

시신 뒤집어쓰고 핏물 번지는 애니메이션 자료 목이 타도 시신 속에 엎드려 핏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양해찬/노근리 사건 유족회장 : "웅덩이가 있었어요. 물 웅덩이. (핏물을) 손으로 걷어내면서 그 물을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과 20여 명.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유족들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피난민을 위장한 인민군을 색출하기 위해 고심했었다는 미군의 증언이 이어졌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묻고 위로를 받기조차 부질없이 느껴질 만큼 세월은 훌쩍 지나가버린 뒤였습니다.

[정구도/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이사장 : "이것은 끝난 전쟁도 아니고, 왜냐하면 종전이 안 됐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상처는 피해자들에게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 피해자의 고통으로만 보지 말고 민족의 고통이고, 치유 받아야 될 고통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 과정은 적군의 잔혹성 뿐 아니라 인간성을 잃고 돌변했던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죽음이 들려주는 그날의 진실.

이제는 외면해 왔던 그 날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성숙한 시선으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해야 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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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70년…묻혀 있던 그 날의 기억
    • 입력 2020-03-28 07:50:33
    • 수정2020-03-28 10:12:40
    남북의 창
[앵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현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주리입니다.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죠?

네, 남북의 창이 오늘로써 정확하게 800번째 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햇수로는 31년째 시청자 여러분들을 찾아뵙고 있는 건데요.

통일논단, 북한리포트 등 다른 이름으로 방송된 것까지 합하면 시작된 지 44년이 흘렀는데요.

남북한과 한반도를 다루는 국내 최고 프로그램인 남북의 창 8백 회 특집. 지금 시작합니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인데요.

진상규명이 이뤄진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해도 많습니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달래고 전쟁의 진정한 종지부를 찍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이야기, 정은지 리포터가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지난해 11월, 전주 도심의 한 산 자락에서 70년 동안 묻혀 있던 유골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두개골과 치아, 다리와 팔뼈 등 발견된 유해는 30여 개체. 참혹했던 그 날의 광경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옥창민/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벨트를 하셨던 분도 있고 단추를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 정도로 미결수, 그러니까 형이 확정되지 않은 분들까지도 무작위로 이 분들을 모셔다 놓고 잔혹하게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았나 판단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현수/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모든 학살 현장에서 거의 나타나는 현상인데, 대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확인사살을 하고..."]

70년 전 그날, 이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약 1800여 명이 수용돼 있었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 좌익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형을 받은 정치범들이 적지 않았던 상황.

북한군이 전라도까지 밀고 내려오자, 북측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만으로 천 4백여명이 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종희/전무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전부 다 이렇게 포승줄로 묶어서 트럭에다 싣고 와서 낮이고 밤이고 주야가 없이 여기서 학살을 했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아주 여기 올 때마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통곡을 하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이번에는 북한군이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긴급히 퇴각하게 된 북한군이 전주형무소의 재소자 등 천여 명을 즉결 처분한 겁니다.

[성홍제/전주형무소 희생자 유족회장 : "두개골에 실탄이 들어가 있을 때 그 고통과...당사자는 얼마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겠어요. 그걸 볼 때 자식 된 도리로..."]

극단적인 이념 대립이 죽음으로 내몬 민간인 희생자들...

가해자도, 피해자도 침묵하는 동안 끔찍했던 전쟁의 참상은 깊은 땅 속에 봉인됐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추정지는 전국에 약 160여 곳.

그 중에서도 발굴이 이뤄진 건 극히 일부분입니다.

전국 곳곳 이름 모를 산 밑 차가운 땅에는 아직도 학살 된 민간인들이 묻혀 있는데요.

이들은 언제쯤 억울함을 벗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 날을 이야기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숱한 고생을 겪었다고 합니다.

[양덕호/ 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그 때 당시 (전주형무소 유가족이라고) 말을 하면 사람으로 인정을 안 했잖아요. 인정을 안 해주기 때문에 그 때 말을 못했지."]

빨치산에 숙식을 제공한 죄로 3년 형을 선고받았던 아버지.

11살... 철부지 마음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외면했던 게 가슴 속 한으로 남았습니다.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학교를 갔다가 오면 그 형무소 옆으로 (수감자들) 한 열 댓 명씩 나와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제가 가면 아들이니까 아빠 손을 흔들고... 그분들한테 이제 우리 아들이라고 그랬을 거 아니야. 이제 그런 얘기를 하는 걸 어디에서 보고 고개를 숙이고 가고 그랬습니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사상과 이념보다는 당장의 삶을 살아내기에 바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유해라도 찾고 싶어 국가기록원으로, 전주 야산으로 안 다녀본 데 없이 다니길 몇 년... 아버지는 아직 아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양덕호/ 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면회 갈 때 옷을 싸가지고 갔는데 그 옷을 갖다 무덤에 (안치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의 넋이라도.. 뼛가루라도 섞여 있을까 싶어 발굴 현장에서 모셔온 한 줌 흙...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아버지 흙을 퍼왔습니다."]

억울하고 참담한 그 세월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양덕호/전주형무소 희생자 유가족 : "아버님 억울하게...모든 걸 잊어주시고 편안하게 계십시오..."]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는 피란민 수백 명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숨졌는데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어떤 기억은 삶을 지배하고 오늘의 나를 만듭니다.

70년 전 일어난 노근리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인 양해숙 씨.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비행기) 한 대가 먼저 들어와 가지고 싹 돌아서 이렇게 나오더니 철길에다가 막 쏟아놓는가 봐 뭐를... 빠방빠방 하고 막 굉장해."]

1950년 7월 충북 영동 지역. 철로를 따라 피난을 가던 사람들 위로 총탄이 날아들었습니다.

철로는 완전히 파괴됐고 그 위로 시신이 즐비했습니다.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눈(안구)이 이만치 (빠져서) 달려가지고 있어. 떨어지지도 않고. 이 얼굴 전체가 다 막 벗겨져 가지고 피는 철철 나고..."]

그날의 폭격으로 한쪽 눈을 잃은 양해숙 씨는 평생 전쟁의 상처를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양해숙/노근리 사건 생존자 : "얼굴이니까 외부에 다 노출이 되잖아. 내 얼굴이니까. 이렇게 바라보면 그때마다 내가 숨으려고 하는 마음. 아는 사람 있으면 저쪽으로 돌아서 피하는 마음. 그게 그 마음이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르지..."]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철로 아래 쌍굴다리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렇게 3박 4일 동안 굴다리 안에선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양해찬/노근리 사건 유족회장 : "(아기가) 젖을 먹으려고. 우니까 인기척이 나니까 막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애기 때문에 우리까지 다 죽게 됐다. (아버지가) 그쪽에 물 많은 데 갖다가 산 애기를 집어던져서 죽은 현장이에요."]

총 쏘는 애니메이션 굴속은 지옥이었습니다.

시신 뒤집어쓰고 핏물 번지는 애니메이션 자료 목이 타도 시신 속에 엎드려 핏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양해찬/노근리 사건 유족회장 : "웅덩이가 있었어요. 물 웅덩이. (핏물을) 손으로 걷어내면서 그 물을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과 20여 명.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유족들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나섰습니다. 피난민을 위장한 인민군을 색출하기 위해 고심했었다는 미군의 증언이 이어졌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묻고 위로를 받기조차 부질없이 느껴질 만큼 세월은 훌쩍 지나가버린 뒤였습니다.

[정구도/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이사장 : "이것은 끝난 전쟁도 아니고, 왜냐하면 종전이 안 됐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상처는 피해자들에게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 피해자의 고통으로만 보지 말고 민족의 고통이고, 치유 받아야 될 고통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 과정은 적군의 잔혹성 뿐 아니라 인간성을 잃고 돌변했던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죽음이 들려주는 그날의 진실.

이제는 외면해 왔던 그 날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성숙한 시선으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해야 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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