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향한 여정…키프로스는 지금

입력 2020.03.28 (08:08) 수정 2020.03.28 (10:1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키프로스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유럽과 중동이 교차하는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인데요.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분단돼 있지만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10여 년전부터 키프로스 국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차이를 좁혀가고 있고요.

최근에는 전사자 유해도 공동 발굴하면서 전쟁과 분단의 상흔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도 많은 걸 시사하고 있는 키프로스의 상황.

김명주 기자가 직접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에메랄드 빛 바다가 넘실대는 지중해 동부 섬나라.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가진 키프로스다.

경기도 만한 면적에 백 20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섬엔 대통령이 두 명이다.

<녹취>
[크리스토퍼/남키프로스 리마솔 시민 : "저희는 하나이길 원합니다. 터키계(북측)인지 그리스계(남측)인지 묻지 마세요. 분쟁은 양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이제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도 니코시아의 한 호텔.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들이 서정적인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과 북에서 온 이들은 모두 젊은 시절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의 기억을 갖고 있다.

키프로스 평화합창단이 이렇게 노래를 부른지 23년. 매주 한 차례씩 모여 노래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아이탄 바이쿱/북키프로스 주민(전쟁 유가족) : "(남편을 잃었을 때) 몇 년 동안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요. 당시에 18개월 된 아기가 있었거든요. 전쟁 때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서 조국 평화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 노래를 통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됐어요."]

놀라운 사실은 합창 연습 장소가 유엔 완충지대 안에 있다는 점이다.

남북 양측의 국경검문소가 5백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외교단은 차량으로, 일반인들은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

[티티나/전 키프로스가이드협회 회장 : "이 분쟁 지역은 유엔이 1964년부터 관할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엔 평화유지군이 가장 오래 상주한 지역입니다."]

우리 비무장지대와 같은 군사적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1990년대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일부 국경 초소들을 무인화하기도 했다.

1974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4만 명의 터키군이 섬에 상륙했다.

이를 놓고 지금도 남측 그리스계에선 터키군의 침공으로, 북측 터키계에선 그리스의 키프로스 강제 합병을 막기 위한 평화 작전으로 해석한다.

[아멧 소전/동지중해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 "1974년 7월 15일 당시 그리스에는 키프로스를 침공해 섬 전체를 통합하려고 했던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에노시스'라고 불렀습니다. 5일 후에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전쟁이 일어난 원인입니다."]

결국 터키군이 섬의 북부 영토 36%를 점령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유엔 완충지대도 180킬로미터 길이로 확장돼 사실상 국경선이 됐다.

수도 니코시아에는 마치 독일 통일 전의 베를린 장벽 같은 유엔 완충지대가 도심을 통과한다.

치열했던 내전의 현장은 40여 년 동안 인적이 끊긴 채 폐허가 됐다.

키프로스의 어두운 역사를 방증하는 무더기 총탄 자국들.

남측 초소엔 그리스와 남측 국기가, 북측엔 터키와 북측 국기가 내걸려 있다.

[스피로스/남키프로스군 니코시아방어 부사령관 : "상대에게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특정한 위치에서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유엔 완충지대와 붙어 있는 한 건물의 꼭대기 층.

남측 저격수들을 배치하는 최전방 초소다.

전쟁의 흔적은 수도 한복판에 고스란히 남았다.

북측 장벽 너머로 터키계 주민들 일상도 시야에 들어온다.

[스피로스/남키프로스군 니코시아방어 부사령관 : "완충지대 건너편 북측 주민들은 식당 같은 자유 지역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어요. 만나도 아무 문제가 없죠.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만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골목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레드라 거리 국경검문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니코시아 최대 번화가의 이 검문소는 지난 2008년 남북 양측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문을 열었다.

여권이나 신분증만 있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 국경검문소를 통해 남북을 오갈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하루 평균 출입자 수가 2천여 명에 달합니다.

쇼핑이나 관광을 하기 위해 국경을 건너기도 하고, 친지 방문도 언제든 가능하다.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북한 개별관광이 현실화된다면 이런 모습을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을까?

[타신/북키프로스 주민 (터키계) : "남측에 친구가 있어서 친한 친구들 만나서 커피를 마시려고 국경을 넘어왔어요."]

[체리/남키프로스 주민(그리스계) : "서로 왕래를 할 수 있으니까 북측에 뭘 사러 가는 중이예요. (예를 들면요?) 그냥 둘러보려고요. 날씨가 좋잖아요."]

이제는 자유왕래가 가능해질 만큼 긴장은 누그러졌지만, 나이 많은 실향민들은 터키군에 대한 앙금을 지울 수 없다.

[안드레아스/남키프로스 주민 (전쟁 실향민) : "터키인들이 우리를 쫓아냈어요. 이젠 고향에 가지 않아요. 이미 다른 사람이 집에 살고 있어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면 북키프로스는 어떤 모습일까? 직접 걸어서 국경을 넘어보기로 했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유엔 완충지대인데요.

남쪽과 북쪽 국경 검문소 사이 거리가 불과 50여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방금 북 키프로스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을 건너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출입국 수속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북측의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손님들을 맞는다.

북측의 1인당 국민소득은 남측 2만 7천 달러의 절반 수준.

터키어를 쓰는 북측은 물가도 남측보다 30% 이상 저렴하다.

[사디/북키프로스 상인 (터키계) : "보시다시피 남측 손님들이 거의 대부분이예요. 비율은 적지만 상인들도 오는데 대부분이 쇼핑하러 온 손님이예요. 그래서 가게들이 유로화 가격표를 내걸고 있는 거예요."]

25만 명의 북측 국민 가운데 절반가량은 1974년 내전 이후 터키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나머지 터키계 본토인 가운데 8만 명은놀랍게도 남측 신분증을 갖고 있다.

남측 정부는 남측 신분증을 가진 북측 주민들에게 의료보험 등의 복지 혜택을 주고 있다.

거리에서 만난 이 대학생도 두 개의 신분증을 보여줬다.

[버그라/북키프로스 대학생 : "남키프로스 신분증이 사실 훨씬 쓸모가 많은데 모든 유럽 국가들 여행이 가능하고요. 그런데 북키프로스 신분증이 없으면 터키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신분증이 다 필요합니다."]

남북 양측은 180킬로미터 국경 전체에 9군데의 검문소를 운영하고 있다.

차를 타고 국경을 통과해 북측 지역으로 들어가자 거리 곳곳에 터키 국기가 펄럭인다.

대규모 이슬람 사원이 보이고, 산비탈에 설치된 대형 선전 문구도 터키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니코시아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 동부 항만도시 파마구스타에 도착했다.

북측 관할 지역인 이곳엔 ‘고스트 타운’이라 불리는 유령 도시가 있다.

철조망 안쪽 6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모든 건물과 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고스트 타운’의 시계는 1974년에 멈춰있다.

[터키군 관계자 : "안돼요. 촬영하지 마세요. 안돼요. 여기는 군사 지역이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46년 전 터키군이 파마구스타를 점령하면서 수많은 건물들이 폭격을 당해 붕괴됐다.

3만9천여 명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놔두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주민들이 떠난 자리엔 전쟁의 상흔이 가득하다. 1970년대 번성했던 해안가 호텔 리조트들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텅 비어있다. 낡은 철조망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뿐이다.

1974년 이후 이 철조망 안쪽으로는 군 당국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도 즐겨 찾던 지중해 최고 휴양지는 이렇게 40여 년 동안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터키 정부는 최근 고스트 타운을 재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남측 실향민들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난관이 적지 않다.

[아르나/남키프로스 주민(실향민) : "어렸을 때 매일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어요. 여름엔 아주 멋진 마을이었죠. 그런데 파마구스타에 갔을 때 고향 마을 안에 유령이 있는 줄 알았어요. 정말 유령 같았어요. 어떻게 제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정말 안 좋았어요. 매번 갈 때마다 똑같이 느꼈어요. 정말 고향에 가고 싶어요."]

남북 양측은 유엔과 함께 유해 발굴 사업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를 설립한 건 지난 1981년. 유해를 발굴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름을 찾아 처음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가기까지, 위원회 설립 이후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분쟁이 계속됐던 11년간 모두 2,002명이 실종된 가운데, 지금까지 천2백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고 960여 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귈덴/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 북측 대표 : "상실의 트라우마가 더 심한 이유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인데요. 결과를 알리기 전까지는 가족들의 슬픔은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수사를 해서라도 실종에 대해 어떤 답을 해줘야 합니다."]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 서로에게 사망 원인과 책임을 묻지 않는다.

EU와 미국 등의 국제사회가 매년 거액을 기부하는 것도 이 사업의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다.

[필 헨리 아르니/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 UN측 대표 : "한국과 북한 정부도 정치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실종자) 가족들의 필요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업이 시작되면 정치적인 긴장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도 좋아할 것입니다."]

1974년 8월 어느 날 이 마을에서 80여 명의 터키계 주민들이 희생됐다.

실종자위원회는 유해를 발굴해 마을에 희생자 묘역을 만들었다.

희생자들의 각종 유품도 40여 년이 흘러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찰라쉬/북키프로스 타쉬켄트묘역 관계자 : "(마을 사람들은) 가족이 전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요. 가족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했고요. 매년 8월이 되면 추모식을 거행합니다."]

우리의 판문점에 해당되는 회담장.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유엔 중재 하에 지난 2004년부터 이 곳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통일 협상을 해왔다.

[안젤라 바르젤리니/유엔 사무총장 키프로스 특별보좌관실 정무수석 : "(최근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에 7명이 남북 키프로스 양측이 해결책을 찾고 합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두 공동체가 포괄적 해결을 위한 관심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엔 터키가 키프로스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서 천연가스 시추 작업을 시작한 것이 문제가 됐다.

남측은 터키 정부가 불법 시추작업을 중단해야 평화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이다.

[드미트리스 사무엘/남키프로스 외교부 대변인 : "터키가 우리 섬의 정치와 통치에 간섭하기를 원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외세의 영향력 없이 남북 키프로스 양측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엔 평화유지군 대변인은 KBS와의 녹취에서 남북 양측 주민 수천 명이 이미 유엔 완충지대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양측의 긴장을 해소해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단축하고, 궁극적으로 섬의 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하겠다는 게 유엔 평화유지군의 목표다.

[알림 시디크/키프로스 유엔 평화유지군 대변인 : "완충지대 안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있고 집주인도 있고 사업가들도 있습니다. 민간인도 완충지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1974년 이후 계속 보안 조건을 완화했습니다. 정상적인 환경으로의 복귀를 촉진하는 노력의 일환이죠."]

터키어 가사에 그리스계 작곡가가 곡을 붙인 이 노래.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이다.

전쟁을 피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 단원들은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랜다.

취재진이 귀국한 이후 키프로스도 코로나19의 여파를 비껴가지 못했다.

지난달 말 레드라 거리 등 4곳의 국경검문소가 임시 폐쇄되면서 국경을 다시 개방하라는 남북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통일 운동 막으려고 코로나19 끌어들였어요."]

평화를 향한 여정으로 키프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나라를 분열시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반드시 통일을 이뤄낼 것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평화를 향한 여정…키프로스는 지금
    • 입력 2020-03-28 08:09:00
    • 수정2020-03-28 10:12:40
    남북의 창
[앵커]

키프로스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유럽과 중동이 교차하는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인데요.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분단돼 있지만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10여 년전부터 키프로스 국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차이를 좁혀가고 있고요.

최근에는 전사자 유해도 공동 발굴하면서 전쟁과 분단의 상흔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도 많은 걸 시사하고 있는 키프로스의 상황.

김명주 기자가 직접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에메랄드 빛 바다가 넘실대는 지중해 동부 섬나라.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가진 키프로스다.

경기도 만한 면적에 백 20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섬엔 대통령이 두 명이다.

<녹취>
[크리스토퍼/남키프로스 리마솔 시민 : "저희는 하나이길 원합니다. 터키계(북측)인지 그리스계(남측)인지 묻지 마세요. 분쟁은 양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이제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도 니코시아의 한 호텔.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들이 서정적인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과 북에서 온 이들은 모두 젊은 시절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의 기억을 갖고 있다.

키프로스 평화합창단이 이렇게 노래를 부른지 23년. 매주 한 차례씩 모여 노래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아이탄 바이쿱/북키프로스 주민(전쟁 유가족) : "(남편을 잃었을 때) 몇 년 동안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요. 당시에 18개월 된 아기가 있었거든요. 전쟁 때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서 조국 평화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 노래를 통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됐어요."]

놀라운 사실은 합창 연습 장소가 유엔 완충지대 안에 있다는 점이다.

남북 양측의 국경검문소가 5백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외교단은 차량으로, 일반인들은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

[티티나/전 키프로스가이드협회 회장 : "이 분쟁 지역은 유엔이 1964년부터 관할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엔 평화유지군이 가장 오래 상주한 지역입니다."]

우리 비무장지대와 같은 군사적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1990년대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일부 국경 초소들을 무인화하기도 했다.

1974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4만 명의 터키군이 섬에 상륙했다.

이를 놓고 지금도 남측 그리스계에선 터키군의 침공으로, 북측 터키계에선 그리스의 키프로스 강제 합병을 막기 위한 평화 작전으로 해석한다.

[아멧 소전/동지중해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 "1974년 7월 15일 당시 그리스에는 키프로스를 침공해 섬 전체를 통합하려고 했던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에노시스'라고 불렀습니다. 5일 후에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전쟁이 일어난 원인입니다."]

결국 터키군이 섬의 북부 영토 36%를 점령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유엔 완충지대도 180킬로미터 길이로 확장돼 사실상 국경선이 됐다.

수도 니코시아에는 마치 독일 통일 전의 베를린 장벽 같은 유엔 완충지대가 도심을 통과한다.

치열했던 내전의 현장은 40여 년 동안 인적이 끊긴 채 폐허가 됐다.

키프로스의 어두운 역사를 방증하는 무더기 총탄 자국들.

남측 초소엔 그리스와 남측 국기가, 북측엔 터키와 북측 국기가 내걸려 있다.

[스피로스/남키프로스군 니코시아방어 부사령관 : "상대에게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특정한 위치에서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유엔 완충지대와 붙어 있는 한 건물의 꼭대기 층.

남측 저격수들을 배치하는 최전방 초소다.

전쟁의 흔적은 수도 한복판에 고스란히 남았다.

북측 장벽 너머로 터키계 주민들 일상도 시야에 들어온다.

[스피로스/남키프로스군 니코시아방어 부사령관 : "완충지대 건너편 북측 주민들은 식당 같은 자유 지역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어요. 만나도 아무 문제가 없죠.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만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골목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레드라 거리 국경검문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니코시아 최대 번화가의 이 검문소는 지난 2008년 남북 양측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문을 열었다.

여권이나 신분증만 있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 국경검문소를 통해 남북을 오갈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하루 평균 출입자 수가 2천여 명에 달합니다.

쇼핑이나 관광을 하기 위해 국경을 건너기도 하고, 친지 방문도 언제든 가능하다.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북한 개별관광이 현실화된다면 이런 모습을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을까?

[타신/북키프로스 주민 (터키계) : "남측에 친구가 있어서 친한 친구들 만나서 커피를 마시려고 국경을 넘어왔어요."]

[체리/남키프로스 주민(그리스계) : "서로 왕래를 할 수 있으니까 북측에 뭘 사러 가는 중이예요. (예를 들면요?) 그냥 둘러보려고요. 날씨가 좋잖아요."]

이제는 자유왕래가 가능해질 만큼 긴장은 누그러졌지만, 나이 많은 실향민들은 터키군에 대한 앙금을 지울 수 없다.

[안드레아스/남키프로스 주민 (전쟁 실향민) : "터키인들이 우리를 쫓아냈어요. 이젠 고향에 가지 않아요. 이미 다른 사람이 집에 살고 있어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면 북키프로스는 어떤 모습일까? 직접 걸어서 국경을 넘어보기로 했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유엔 완충지대인데요.

남쪽과 북쪽 국경 검문소 사이 거리가 불과 50여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방금 북 키프로스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을 건너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출입국 수속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북측의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손님들을 맞는다.

북측의 1인당 국민소득은 남측 2만 7천 달러의 절반 수준.

터키어를 쓰는 북측은 물가도 남측보다 30% 이상 저렴하다.

[사디/북키프로스 상인 (터키계) : "보시다시피 남측 손님들이 거의 대부분이예요. 비율은 적지만 상인들도 오는데 대부분이 쇼핑하러 온 손님이예요. 그래서 가게들이 유로화 가격표를 내걸고 있는 거예요."]

25만 명의 북측 국민 가운데 절반가량은 1974년 내전 이후 터키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나머지 터키계 본토인 가운데 8만 명은놀랍게도 남측 신분증을 갖고 있다.

남측 정부는 남측 신분증을 가진 북측 주민들에게 의료보험 등의 복지 혜택을 주고 있다.

거리에서 만난 이 대학생도 두 개의 신분증을 보여줬다.

[버그라/북키프로스 대학생 : "남키프로스 신분증이 사실 훨씬 쓸모가 많은데 모든 유럽 국가들 여행이 가능하고요. 그런데 북키프로스 신분증이 없으면 터키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신분증이 다 필요합니다."]

남북 양측은 180킬로미터 국경 전체에 9군데의 검문소를 운영하고 있다.

차를 타고 국경을 통과해 북측 지역으로 들어가자 거리 곳곳에 터키 국기가 펄럭인다.

대규모 이슬람 사원이 보이고, 산비탈에 설치된 대형 선전 문구도 터키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니코시아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 동부 항만도시 파마구스타에 도착했다.

북측 관할 지역인 이곳엔 ‘고스트 타운’이라 불리는 유령 도시가 있다.

철조망 안쪽 6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모든 건물과 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고스트 타운’의 시계는 1974년에 멈춰있다.

[터키군 관계자 : "안돼요. 촬영하지 마세요. 안돼요. 여기는 군사 지역이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46년 전 터키군이 파마구스타를 점령하면서 수많은 건물들이 폭격을 당해 붕괴됐다.

3만9천여 명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놔두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주민들이 떠난 자리엔 전쟁의 상흔이 가득하다. 1970년대 번성했던 해안가 호텔 리조트들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텅 비어있다. 낡은 철조망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뿐이다.

1974년 이후 이 철조망 안쪽으로는 군 당국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도 즐겨 찾던 지중해 최고 휴양지는 이렇게 40여 년 동안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터키 정부는 최근 고스트 타운을 재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남측 실향민들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난관이 적지 않다.

[아르나/남키프로스 주민(실향민) : "어렸을 때 매일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어요. 여름엔 아주 멋진 마을이었죠. 그런데 파마구스타에 갔을 때 고향 마을 안에 유령이 있는 줄 알았어요. 정말 유령 같았어요. 어떻게 제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정말 안 좋았어요. 매번 갈 때마다 똑같이 느꼈어요. 정말 고향에 가고 싶어요."]

남북 양측은 유엔과 함께 유해 발굴 사업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를 설립한 건 지난 1981년. 유해를 발굴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름을 찾아 처음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가기까지, 위원회 설립 이후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분쟁이 계속됐던 11년간 모두 2,002명이 실종된 가운데, 지금까지 천2백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고 960여 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귈덴/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 북측 대표 : "상실의 트라우마가 더 심한 이유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인데요. 결과를 알리기 전까지는 가족들의 슬픔은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수사를 해서라도 실종에 대해 어떤 답을 해줘야 합니다."]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 서로에게 사망 원인과 책임을 묻지 않는다.

EU와 미국 등의 국제사회가 매년 거액을 기부하는 것도 이 사업의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다.

[필 헨리 아르니/키프로스 실종자위원회 UN측 대표 : "한국과 북한 정부도 정치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실종자) 가족들의 필요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업이 시작되면 정치적인 긴장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도 좋아할 것입니다."]

1974년 8월 어느 날 이 마을에서 80여 명의 터키계 주민들이 희생됐다.

실종자위원회는 유해를 발굴해 마을에 희생자 묘역을 만들었다.

희생자들의 각종 유품도 40여 년이 흘러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찰라쉬/북키프로스 타쉬켄트묘역 관계자 : "(마을 사람들은) 가족이 전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요. 가족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했고요. 매년 8월이 되면 추모식을 거행합니다."]

우리의 판문점에 해당되는 회담장. 남북 키프로스 양측은 유엔 중재 하에 지난 2004년부터 이 곳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통일 협상을 해왔다.

[안젤라 바르젤리니/유엔 사무총장 키프로스 특별보좌관실 정무수석 : "(최근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에 7명이 남북 키프로스 양측이 해결책을 찾고 합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두 공동체가 포괄적 해결을 위한 관심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엔 터키가 키프로스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서 천연가스 시추 작업을 시작한 것이 문제가 됐다.

남측은 터키 정부가 불법 시추작업을 중단해야 평화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이다.

[드미트리스 사무엘/남키프로스 외교부 대변인 : "터키가 우리 섬의 정치와 통치에 간섭하기를 원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외세의 영향력 없이 남북 키프로스 양측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엔 평화유지군 대변인은 KBS와의 녹취에서 남북 양측 주민 수천 명이 이미 유엔 완충지대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양측의 긴장을 해소해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단축하고, 궁극적으로 섬의 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하겠다는 게 유엔 평화유지군의 목표다.

[알림 시디크/키프로스 유엔 평화유지군 대변인 : "완충지대 안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있고 집주인도 있고 사업가들도 있습니다. 민간인도 완충지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1974년 이후 계속 보안 조건을 완화했습니다. 정상적인 환경으로의 복귀를 촉진하는 노력의 일환이죠."]

터키어 가사에 그리스계 작곡가가 곡을 붙인 이 노래.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이다.

전쟁을 피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 단원들은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랜다.

취재진이 귀국한 이후 키프로스도 코로나19의 여파를 비껴가지 못했다.

지난달 말 레드라 거리 등 4곳의 국경검문소가 임시 폐쇄되면서 국경을 다시 개방하라는 남북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통일 운동 막으려고 코로나19 끌어들였어요."]

평화를 향한 여정으로 키프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나라를 분열시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반드시 통일을 이뤄낼 것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